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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왕풍뎅이 시인 Sep 17. 2023

잡일에 대하여

그리운 simplicity

  이 차장(6년 차)은 사무실 가운데 놓인 원형 탁자에 앉아 머리를 박고 뭔가를 벅벅 문지르고 있었다. 힐끗 보니 법인카드 영수증 뒷면에 풀질을 하여 A4 용지에 두 장씩 나란히 붙이고 있다. 집게로 묶인 영수증 다발이 펄럭거리며 다음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게 다 뭐래?"

"아, 이번에 행사 끝나고 나온 영수증들입니다. 이렇게 해놔야 빠트리지 않고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아서..."

"...... 힐링되겠다."

"ㅋㅋ 저도 이런 일이 제일 좋습니다."


  나도 이제 단순반복 업무가 좋다. 


  신입시절 근무했던 부서에서는 지역주민 500여 명을 대상으로 사업을 하고 있었는데, 가끔 그들에게 우편을 발송할 일이 있었다. 그때만큼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팀원 모두가 큰 테이블에 둘러앉아 출력한 인쇄물을 분류하고, 그것을 삼등분으로 접고, 봉투에 넣어 풀이나 테이프로 봉합하고, 개개인의 주소가 인쇄된 스티커를 떼어 붙이는 작업을 분담하여 진행하였다. 기껏 취업했더니 방 안에서 인형 눈깔을 붙이는 것과 다름없는 일을 하는 것이 맞나 싶다가도 무념무상으로 한 가지 동작을 반복하다 보면 금방 노하우를 얻게 되고 나름의 개선된 방향으로 작업을 효율화할 수 있으며 종국에는 어떤 경지에 이르게 된다. 본업(?)을 하면서는 수년이 지나도 경험하기 어려운 개인적 차원의 진보를 단시간에 이루어내고 그것을 스스로에게 증명할 수 있는 이 단순한 작업을 나는 좋아하게 되었다. 이런 종류의 잡일은 팀원들의 능력에 관계없이 노동력을 대등하게 투입하고 정직하게 결과물을 확인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업무였고 나는 그 속에서 내 몫을 분명하게 해내고 있다는 것에서 안도감을 느꼈던 것 같다. 


 어느 해였던가는 그 해의 신입사원들이 입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무용품을 넣어두는 서랍장이 확 바뀌었다. 서랍장 속에 5X5의 작은 수납장이 놓였고 각 칸에는 볼펜, 연필, 형광펜, 네임펜, 스템플러 심, 클립, 스카치테이프 등등이 차곡차곡 입주하였다. 그리고 앞에는 정말 예쁜 손글씨로 내용물을 표기한 견출지가 붙었다. 나는 감탄하고 감동하면서도 회사에 입사하여 이런 사소한 일까지 챙겨야 하는 것이 싫었던 옛날 기억이 났다.


"주임님, 이렇게까지 안 하셔도 괜찮아요."

"아니에요. 저 이런 거 좋아해요."

 

  아니 이 귀여운 사람!  작고 귀여운 사람은 또 있다. 지금 우리 사무실의 신입인데 한 달에 한번 사무실 사람들이 먹을 간식이 배송되는 날이면 뽀시락 뽀시락 거리면서 열과 성을 다하여 간식들의 행과 열을 맞추어 진열해 둔다. 서랍장을 뒤적거리는 일 없이 사무용품을 한눈에 찾을 수 있게 되거나, 꺼내먹기가 아까울 정도로 잘 정리된 간식들을 보면 이것이 잡일이 아니라 곧 프로의 세계임을 깨닫게 된다. 잡일에 개의치 않는 이런 직원들이 나는 가장 존경스럽다. 나는 그렇게 일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무실 내에 발생하는 온갖 잡일들이 왜 그렇게 하기가 싫었는지. 선배들의 심부름꾼으로 전락하여 능력을 착취당하는 것만 같았다. 왜 그렇게 더 복잡한 일, 더 어려운 일을 하고 싶어서 안달했는지. 돌이켜 보면 나는 다만 주어진 일을 즐겁게 할 선택의 자유를 반납하고 스스로를 하기 싫은 일의 노예로 만들었을 뿐이다.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그 심플한 세계를 왜 그렇게 박차고 나오고 싶어 했는지.  


  하루의 일과가 끝나면 성과를 확인할 수 있고, 퇴근길에 아무런 찜찜함도 남지 않고, 귀가해서는 일의 다음을 생각할 필요 없어 머릿속이 쾌적하며 다음 날 아침이면 새롭게 일을 시작하면서도 안정적인 하루의 마무리를 기대할 수 있는, 그런 심플한 일이 하고 싶다. 그것이 잡일인가? 나는 이제 잡일이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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