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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D-69> 오늘 사용한 텀블러 세척하기

one day one me, 텀블러 세척, 스탠리 1L 텀블러

by 산책이

<2025년 D-69> 오늘 사용한 텀블러 세척하고 깨끗해진 느낌 갖기, 2025년 10월 24일


나는 매일 아침 출근길에 세 개의 텀블러를 챙긴다.

소, 중, 대로 크기도 다른 만큼 용도도 다르다. 그중 가장 거대한 텀블러는

개근상을 줘도 될 만큼 출석률이 높다.

바로 1L짜리 빨대 달린 스탠리 텀블러다.

몇 년 전, 불에 탄 자동차 안에서도 멀쩡히 살아남은 텀블러의 사진이 sns를 떠돌았다.

모든 것이 새까맣게 그을렸는데 컵홀더에 우뚝 꽂혀있던 그 텀블러는

유난히도 단단해 보였다. 불구덩이 속에서 살아남았다니 얼마나 대단한가!


그 당시의 나는 강해지고 싶었다. 어떤 환경에서도 꿋꿋하게 살아남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였을까. 그 사진을 본 순간, 저 텀블러를 들고 다니면 왠지 ‘멘털 튼튼, 세련된 직장인’처럼 보일 것 같았다. 그럴듯한 합리화였다.


물론, 진짜 강인해지는 것과 텀블러의 구매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결국 텀블러를 사고 싶었던 건, 누군가에게 괜찮아 보이고 싶었던 내 인정 욕구였다.



그러나 생각보다 가격이 셌다. 고작 텀블러 하나 주제에 말이다.

아쉬운 마음으로 잠시 소비욕을 눌러두었는데 뜻밖의 기회가 찾아왔다!

역시 계속 째려보고 있으면 언젠가 내 것이 되는 게 맞나 보다.


친구들과 생일마다 5만 원 정도의 선물을 주고받는데, 마침 다음 달이 내 생일이었다.

그 가격이면 내 욕망을 실현시켜 줄 스탠리 텀블러를 가질 수 있었다.


그렇게 손에 넣은 1L 텀블러는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잘 쓰고 있다.


처음엔 완전히 ‘허니문 기간’이었다. 들고 다니기만 해도 만족감이 어마어마했다.

텀블러를 손에 들고 다니는 곳이 곧 런웨이 느낌이었다고 해야 할까.

돌이켜보면 어른이 돼서도 이렇게 유치하기 짝이 없다.


그래도 과시용만은 아니었다.

1L씩이나 물을 담을 수 있고 굵고 긴 빨대 덕분에 하루 종일 물을 마시기 쉬웠다.

‘하루에 물 1리터만 마셔도 피부가 좋아지고 건강해진다’는 말처럼,

이 텀블러 덕분에 물이 떨어질 일이 없었다.


무엇보다 근무 중에 물을 뜨러 가는 게 은근히 귀찮기도 하고 성가신다. 그저 물 한 컵만 뜨고

올려했으나 정수기까지 가는 길에 동료들과 계속 마주치면 괜히 어색하고 낯설다.


고개를 잠깐 끄덕이며 인사를 하는 것도 반복되면 신경이 쓰인다. 그 사람들이 싫은 건 아닌데 그래도 피하고 싶은 내 마음, 직장인이라면 한 번쯤 겪어봤음직하다.


심지어 향수를 잔뜩 뿌려 오히려 악취를 풍기거나

복도에 그 흔적을 흩뿌리는 이도 있다. 욕도 아까운 그런 사람들까지 마주치게 되면 그날 하루는

일진이 사납다. 그저 물 마시러 나섰다가 기분만 상해 돌아온 적도 있다.


나는 거기에 더해, 사회적 민감성이 높은 편이라 항상 사회적 자극을 최소화하려 노력한다.

직장생활은 인간관계를 빼고는 논할 수 없다. 꼭 필요한 의사소통만으로도 이미 에너지가 충분히 소모된다.
거기에 불필요한 대화나 마주침이 더해지면 나는 금세 넉다운이 된다.

그래서 나의 거대 텀블러는 소중하다. 나만의 1리터짜리 개인 정수기나 다름없다.


하지만 근무 중에는 그토록 고마운 텀블러가 퇴근 후엔 늘 방치된다.

식탁 위나 거실 바닥 어딘가에 놓인 채, 다음 출근 때까지 그대로 굳어 있다.

그리고 새벽 7시, 부랴부랴 텀블러를 싱크대 위에 올려놓고 뜨거운 물을 콸콸 틀어 급하게 소독한다.

그 후 다시 냉수 1리터를 채우면 나와 함께 다시 출근한다.


어제는 금요일 밤이었다. 다음 날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는 해방감에 마음이 벅차오르는 저녁이었다.

역시나 퇴근하자마자 가방도, 옷도, 아침 도시락통과 텀블러도 식탁 위와 그 주변에 널브러져 있었다.

바로 정리하는 습관이 없으니 집은 금세 어질러졌다.


그렇게 소중한 텀블러가

다음 주 월요일 아침까지 방치될 위험에 처해 있었다


그때 내가 해내야 하는 미션이 '오늘 사용한 텀블러 세척하고 깨끗해진 느낌 갖기'였다.


잠옷을 입고 침대에 덩그러니 누워 있던 찰나,

‘지금 일어나 텀블러를 씻어야 한다’는 생각보다
‘그냥 내일 하지 뭐’ 하는 귀찮음이 훨씬 강렬했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결국 방구석에서 핸드폰만 하다 하루를 끝낼 것 같았다.


그건 너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션만 완수하면 그래도 덜 죄책감이 들겠지.’

그렇게 무거운 몸을 억지로 일으켜 거실 바닥에 놓여 있던 텀블러를 들었다.


뽀드득뽀드득 소리가 나진 않았지만, 빨대를 빼고 뚜껑을 열어 텀블러를 세척하기 시작했다.
세척솔로 빨대 구석구석까지 닦은 뒤, 물기를 털어 건조대 안에 거꾸로 세워두었다.


뜨거운 물에 씻겨 말끔히 건조된 텀블러를 보면 월요일 아침 출근길에 조금은 위로가 될 것 같았다.

사실 오늘 쓴 텀블러를 자기 전에 씻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이지만,

나는 이걸 ‘미션’으로 정해야 겨우 한다.


습관이란 게 이토록 무섭다.
정리습관이 없으면
결국 미루고 방치하는 습관만 남는다.


one day, one me

하루 한 가지, 나를 위한 순수한 미션을 하는 이유도 결국

건강한 습관을 갖고 싶어서다.


우울해서, 힘들어서, 지치고 불안해서

미뤄왔던 일들이 너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던 건

반복되는 일상 덕분이었다.


요즘은 그걸 루틴이라고도 하고 리츄얼이라고 한다.

이름이야 어떻든

나를 먹이고, 입히고, 재우는 이 기본적인 일들을 놓지 않는 게 중요하다.

물론 가끔은 산책도 하고 바람도 쐬며 머리를 식히는 것도 필요하다. 그런데 그런 건 잘한다.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잘한다. 오히려 매일 하면 좋은 일들을 못할 때가 더 많다.


그러니 남은 2025년을 살아내기 위해

오늘도 내일도 해야지. 나의 미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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