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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D-70> 화장대 정리하기

one day one me, 화장대 정리, 거울닦기, 눌러붙은 노란 먼지

by 산책이

<2025년 D-70> 화장대 정리하기 2025년 10월 23일 목요일


어린 시절, 볼에 난 주근깨를 보며 좌절했지만

어른만 되면 화장을 할 수 있으니 깨 따위는 다 가릴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티브이에 나오는 연예인들의 백옥 같은 피부를 충분히 흉내 낼 수 있다는

환상이 있었기에 버틴 거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세수도 열심히 해봤다.

주근깨는 얼굴에 강력하게 붙어 있는 모래알일 거라는 터무니없는 마음으로 말이다.

손끝 사이로 '주근깨들이여 모두 떨어져 나가라' 주문을 외면서 얼굴을 박박 문질렀던

10대 시절을 생각하니 좀 짠하다.


어른이 된 지도 한참이 지났는데 주근깨들은 여전히 내 얼굴에 머물고 있다.

평생 함께할 수밖에 없는 운명인가 보다.

타고난 피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데 아직도 쉽지 않다.

심지어 각종 뾰루지들과 염증들도 새로운 이웃으로 자리 잡아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시간이 흘러 기미도 생길 텐데 참 걱정이다.


"화장한다며! 화장으로 다 가릴 수 있다며!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라고 묻는다면

나는 그저 고개를 푹 숙일 수밖에 없다.

화장으로 안 되는 게 있더라.

심지어 나는 화장에 소질도 없고, 사실 흥미조차 없었다.

'화장대'라는 단어를 보자 내 메이크업 역사가 떠올랐다.

그래서 한 번 적어봤더니 어느새 글이 이만큼이나 되어 있었다.


아무튼, 내 메이크업이 빈약하다는 변명은 여기까지 하고

이제 오늘의 미션, ‘화장대 정리’ 이야기로 넘어가자.




내 공간 중 그나마 화장대가 가장 깔끔하다. 매일 아침, 출근길 자동차 안에서 화장을 하기 때문이다.

웬만한 건 모두 검은 파우치 안에 들어 있고, 그 파우치는 자동차 캐비닛 속에 자리 잡고 있다.

덕분에 집에 있는 화장대는 여유롭다.

빗 1개, 드라이기 1개, 토너 1개, 선크림 1개, 족집게 1개…


그런데.. 왜 더럽지?


미니멀리스트의 환상도 한몫한다.
무인양품에서 봤던 그 화장대처럼, 왜 내 것은 그렇게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을까?

하지만 그건 애초에 이룰 수 없는 꿈이다.


내 공간은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전시장이 아니니까.
생활의 때가 묻는 건, 살아 있다는 증거라고 스스로를 달랜다.


무언가 뽀얗고 텁텁한 것들이 겹겹이 쌓여 있는 것 같아
화장대 위와 거울을 물티슈로 한 번 쓱- 닦았다.
그런데 노랗고 까만 먼지가 그대로 쓱- 하고 묻어난다.


생활의 때도 주기적으로 밀어줘야 하는데,
오랜 시간 방치해 둔 탓인지 먼지들이 눌어붙어 있었다.
한번 닦기 시작하니 이상하게 가속이 붙는다.


손끝에 힘을 주어 쓱쓱 닦고, “어머, 먼지가 노랗다!” 하며 놀란 뒤 다시,
있는 힘껏 닦았다.



거울도 마찬가지였다.
이사 올 때부터 있던 자국인가 싶어 그냥 내버려 뒀던
검은 알갱이 자국들이 쓱쓱- 닦인다. ‘이게 닦이는 거였구나.’

깨달음과 함께 물티슈로 쓱쓱,
이어서 마른걸레로 팔을 휘저으며 둥글게 둥글게 거울을 닦았다.


지난번 욕실 청소 때도 느꼈지만, 먼지를 걷어낸 거울 속 내 모습은 늘 낯설다.
주근깨가 더 또렷이 보여서일까, 어색해서 한동안 눈을 맞추지 못했다.


눌어붙어 있던 먼지들이 닦여 나가듯, 내 마음속에 끈적하게 엉겨 붙은 먼지들도
함께 사라져 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 먼지들이 사라지면

‘나’라는 존재가 조금 더 또렷이 보이지 않을까.

내가 원하는 것, 내가 진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말이다.

그 모습이 어색하고 낯설더라도, 이젠 한 번쯤은 마주해 보고 싶다.
누군가의 기대에 맞추거나 세상의 기준에 따라 생각하는 게 아니라,

온전히 나답게.


그런 상념에 젖어 있는 사이, 정리는 어느새 끝이 났다. 아마 10분도 안 걸렸을 것이다.


밝아진 거울 앞, 정리된 화장대 앞에 선다.

거울이 더러워서 그동안 화장할 기운이 없었던 걸까.
화장대를 정리한 김에 이번 주말엔 피부를 어떻게 가꿀지도 고민해 봐야겠다.


그러고 보니, 이제는 백옥 같은 피부보다 ‘생기 있는 피부’를 갖고 싶다.

결국 내가 진짜 원했던 건, 생기 있는 모습이었다.


역시, 비우면 채워진다.

먼지를 닦고, 정리를 하니
마음이 채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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