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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단지

by 김대리

몸이 녹아내릴 듯한 무더위가 며칠째 계속되고 있다. 아침 9시부터 30도면, 인간적으로 회사도 재택근무를 권장해야 하는 게 아닌가? 근로자를 보호해야지. 현실은 이 찜통 같은 날씨에도 긴 팔 와이셔츠에 넥타이까지 졸라매고 출근해야 한다. 부장은 보수적인 회사 분위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내가 볼 땐 고지식한 '꼰대' 문화일 뿐이다. 궁색한 '손풍기' 하나 믿고 길을 나선다. 어쨌거나 출근은 해야 한다.

지하철역까지 가는 길이 구만리 같다. 몇 분 걸었을 뿐인데 등판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아침부터 샤워를 하고 데오드란트를 바른 들 무슨 소용인가, 집 밖으로 나오자마자 사우나인데. 몸에서 쉰내가 나는 게 아닐지 걱정이다. 아직 결혼도 안 한 노총각인데, 홀아비 냄새까지 나면 저래서 결혼을 못 한 거라는 둥, 뒷말 나오기 딱 좋다.

1번 출구 앞에는 오늘도 전단지 돌리는 할머니 두 분이 나와 계신다. 아이고, 아침부터 고생하시네. 시골에 계신 어머니 생각이 나서 마음이 안 좋다. 차양이 큰 모자에 선글라스, 토시까지 중무장을 하셨다. 이런 불볕더위에는 저렇게 꽁꽁 싸매야 오히려 덜 덥다. 그래도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다. 연세도 많으신데 저러다 쓰러지시는 건 아닐지 걱정이다.

가까이 다가가니 할머니 두 분 다 경쟁하듯이 전단지를 쑥 내미신다. 나보다 좀 더 가까운 할머니의 전단지를 먼저 받아드리고, 체념한 듯 물러나는 나머지 한 분에게도 손을 내밀었다.

"주세요, 어머니."

'어머니' 소리가 듣기 좋은 듯 할머니께서 웃으시며 전단지를 주신다. 별거 아닌 호의지만, 덕분에 저 두 분은 단 몇 분이라도 일찍 마치실 수 있다. 할머니의 미소에 덩달아 나도 기분이 좋다. 하늘을 찌를 듯한 불쾌지수 덕에 웃을 일도 없는데, 이렇게라도 웃으니 얼마나 좋아.

"잠시만요."

누군가 짜증스럽게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갔다. 아이씨, 절로 인상이 찌푸려진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니 아가씨 한 명이 빠르게 계단으로 내려가고 있다. 단발머리에 티셔츠, 하늘하늘한 치마를 입은 아가씨다. 뒷모습이 낯익다. 아, '그 아가씨'구나. 늘 이 시간쯤 출근하는 아가씨로, 출근길에 몇 번 마주쳤다. 아담한 체구에 예쁘장하게 생겨서 나도 모르게 눈길이 갔다. 말도 한 번 섞은 적 없지만, 고새 눈에 익었나 보다. 아가씨 표정은 늘 도도하고 새침하다. 요즘엔 날이 더워서 그런지 한껏 미간을 찌푸린 채다. 예쁜 아가씨가 좀 웃고 다니면 좋을 텐데, 안타깝다. 사는 게 힘든가?

그나저나 저 아가씨는 한 번도 할머니들 전단지를 받아준 적이 없다. 어머니 뻘 되시는 분이 이 더운 날씨에 고생하시는데, 참 인정머리가 없다. 그거 받아주는 데 몇 초나 걸린다고, 좀 받아주면 될 것을. 어쩜 저렇게 모질까. 가정교육을 제대로 못 받은 게 틀림없다. 뻔하지, 하나만 보면 열을 알 수 있다. 우리 때는 저렇게 싹수없게 굴면 집에 가서 먼지가 나도록 맞았다. 그래서 우리 세대는 어르신을 공경할 줄 알고 예의가 바르다. 요즘 학교에서는 체벌이 금지되어 맞고 자라는 분위기가 아니라던데, 본디 잘못하면 처맞아야 사리 분별을 제대로 하는 사회 구성원으로 자라는 법이다. 나라가 어찌 되려나, 참 걱정이다.

개찰구에서 카드를 찍고 플랫폼으로 내려갔다. 후덥지근하다. 요즘은 에너지를 절약한답시고 공공장소나 대중교통의 기온을 26도에 맞춘다지. 사람들이 정말 융통성이 없다. 이런 날씨에는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어야지, 누구 하나 쓰러져봐야 정신 차리려나. 사람들이 짜증 섞인 얼굴로 연신 손부채질을 해도, 바깥에서부터 끌어온 열기에 사방이 후끈후끈하다.

열차 도착을 알리는 알림이 울렸다. 반사적으로 열차가 들어오는 방향을 쳐다보는데, 그 아가씨가 보인다. 오늘은 바로 옆 칸이네, 괜히 반갑다. 나는 못 본 척 고개를 돌리고, 시선을 정면에 고정한다. 자연스럽게 이동해서 같은 칸을 탈 수도 있겠지만, 오늘은 아니다. 피차 반갑게 인사할 사이도 아니고. 그냥 그런 사람이다, 매일 마주치지만 아직 아무 사이도 아닌.

열차가 승강장으로 들어왔다. 열차 안에는 이미 사람이 터져 나올 듯 가득하다. 문이 열리지만 아무도 내리지 않는다. 사람이 더 탈 여유 따위 없어 보이지만, 다음 열차를 탄다는 선택지는 없다. 뒤에서부터 맹렬히 전진하는 인파에 은근슬쩍 떠밀려 열차에 탄다. 테트리스 하듯이 사람들 틈에 몸을 끼워 넣는다.
사방으로 눌려 숨을 쉴 수가 없다. 바로 앞에 선 남자의 정수리가 코에 닿을 듯하다. 이럴 땐 큰 키도 참 별로다. 기름기 도는 머리카락 사이로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다. 아, 정수리 냄새. 말로 설명하고 싶지 않은, 축축하고 묵은 비린내가 난다. 토악질이 날 것 같았지만 겨우 숨을 참았다. 하지만 이내 냄새가 코를 뚫고 들어온다. 지독하다. 어떻게든 피해 보려고 몸을 비틀다 뒤에 서 있는 여자와 부딪혔다. 여자의 얼굴이 내 등에 닿은 듯, 뾰족한 콧날이 느껴진다.

"아, 죄송합니다,"
어설프게 뒤돌아보며 목례하는데, 여자가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손바닥으로 연신 콧등을 쓸어내린다. 아, 좀 부딪힐 수도 있지, 누군 좋은 줄 아나. 울컥했지만 티는 내지 않았다. 여기서 말 섞어봐야 좋을 게 없다. 괜히 싸움이라도 나면 ‘지하철 진상남’으로 인터넷에 오르내릴지도 모른다. 나야말로 아까 부딪히면서 아가씨 얼굴의 파우더가 옷에 묻은 건 아닌가, 신경이 쓰인다.
사람들과 부딪히지 않으려 고개를 치켜든다. 말없이 허공을 본다. 앞에 서 있는 남자의 정수리를 피해 숨을 조금이라도 위로 빼본다. 그러다 임산부석이 시야에 들어온다. 역시 아줌마가 앉아 있다. 딱 봐도 사십 대 중반이다. 나잇살이 퍼져서 배가 불룩 나와 있다. 누가 봐도 자연임신은 아니다. 그래도 아주 당당하게 앉아 있다. 머리통 위에 "임산부를 위해 비워주세요"라고 적혀 있지만, 눈을 감은 채 필사적으로 자는 척 중이다.

역시 여자의 적은 여자다. 임산부석에 앉아 있는 사람은 늘 새파랗게 어린 여자, 노처녀, 아니면 할머니뿐이다. 남자들은 앉지 않는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지옥 같은 만원 열차 안에서도 절대 앉지 않는다. 사람들이 말이야, 시민의식이라는 게 있어야지. 이러니까 이 나라 출산율이 그 지경인 거다.

일부러 아줌마를 빤히 쳐다보지만, 그녀는 끝내 눈을 뜨지 않는다. 부끄러움도 없군. 어느덧 내릴 역에 도착했다. 사람들에게 떠밀려 역사를 빠져나온다. 우리 회사까지 가는 출구에는 하필이면 에스컬레이터도 없다. 계단으로 올라가며 마음속으로 작게 저주를 던졌다.

‘에라이, 아줌마야. 사무실 에어컨이나 콱 고장 나버려라.’
출구로 나오자마자 무더운 공기에 숨이 막힌다. 진짜 누구 한 명 쓰러지지 않는 게 이상한 날씨다.


오늘도 어지간히 덥다. 장대비라도 오면 좋으련만. 올해 장마는 비가 오는 둥 마는 둥 하다가 끝나버렸다. 비가 오지 않으면 건조하기라도 하면 좋겠는데, 물기 어린 공기 덕에 집에서 나오자마자 온몸이 끈적하다.

어제 회식에서 과음하는 통에 속이 좋지 않다. 부장님과 함께하는 회식인데, MZ 사원들은 선약이 있다며 집에 가버렸다. 그래서 부장님께 대작해서 술 마셔드릴 사람이 나랑 박 대리뿐이었다. 부장님은 사람 좋게 괜찮다 하시지만, 나라도 나중에 한마디 해야겠다. 회식도 사회생활의 일부인데, 요즘 신입 사원들은 그런 자리는 참석하기 싫어하면서 상사한테는 잘 보이려 한다. 다 철딱서니 없는 소리다. 애초에 회사에서 공과 사를 무 자르듯이 구분할 수도 없고, 또 그렇게 정 없이 구는 부하를 예뻐할 상사는 없다. 결국 다 사람이 하는 일인데 사사로운 감정 없이 성과만 놓고 평가해달라는 얘기는, 나중에 상사를 로봇이 대체하는 날에나 가능할 것이다.

쓰린 속을 부여잡고 길을 나선다. 오늘도 전단지를 나눠주시는 할머니들은 일찍부터 자리를 지키고 계신다. 가끔은 정말 존경스럽다. 이 무더위에 저렇게 한결같을 수 있다니. 앗, 오늘은 그 아가씨가 나보다 몇 걸음 앞서 걷고 있다. 오늘도 역시 전단지를 받지 않는다. 할머니가 가슴팍까지 전단지를 들이밀고 눈앞에서 흔들어 대는데도 몸을 비틀어 피한다. 나 같으면 저럴 시간에 하나 받아주겠다, 어쩜 저리 매정할까. 나도 모르게 혀를 찬다. 아가씨의 뒤통수가 계단 밑으로 사라진다.

“에구머니나, 성님, 괜찮아유?”

전단지를 나눠주던 할머니 중 한 분이 비틀하더니 지하철 출구에 풀썩 주저앉는다. 이어서 기둥에 몸을 기대는 듯하다가, 옆으로 픽 고꾸라졌다. 내가 얼른 달려가 할머니를 부축한다.

“어르신, 제 말 들리세요? 어르신?”

할머니 등 밑으로 팔을 넣어 안듯이 일으키고, 흔들어 불러보지만 반응이 없다. 온몸이 뜨끈하고 축축한 것을 보아 아무래도 더위에 지쳐 쓰러진 것 같다. 휴대폰을 꺼내어 119에 신고했다. 같이 전단지를 돌리던 할머니는 연신 발을 구르며 ‘어떡해, 어떡해’를 연발할 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출근하는 사람들은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돌려 보면서도 누구 하나 멈춰서서 도와주진 않는다. 발걸음을 재촉해서 지하철 역사 내로 사라질 뿐. 다들 참 매정하다. 자기 어머니가 길거리에 쓰러져도 저럴 건가?

그 때 누군가가 나에게 나가와 할머니를 흔든다. 어, 그 아가씨다. 할머니가 쓰러진 것을 보고 다시 계단을 올라왔나 보다.

“할머니, 할머니, 눈 좀 떠 보세요, 할머니!”

아가씨는 능숙하게 할머니 목에 손가락을 댄다. 맥박을 확인하는 것 같다. 몇 초 정도 가만히 있더니 안심한 듯 할머니를 기둥에 기대어 앉히고 겉옷, 모자, 마스크, 토시와 양말, 그리고 신발을 벗긴다. 아이고, 저렇게 겹겹이 싸매고 있으니까 덥지. 얇은 셔츠 한 장만 남긴 아가씨가 가방에서 손풍기를 꺼내어 할머니의 얼굴 가까이에 대준다. 나도 양복 주머니의 손풍기를 꺼내어 거들고, 동료 할머니도 전단지 뭉치로 연신 부채질을 해댄다.

“저기, 의사예요?”

곁눈질로 아가씨를 보면서 슬쩍 물어본다. 맥박 짚는 것도 그렇고, 눈 앞에서 사람이 쓰러졌는데 당황하지도 않고 능숙하게 응급 처치를 하는 걸 보니, 병원에서 일하는 사람 같다.

“간호사예요.”

아가씨가 할머니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대답한다. 내 쪽은 쳐다보지도 않는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났을까, 할머니가 끙하고 신음 소리를 낸다. 얼굴을 조금씩 찌푸리고 몸을 조금씩 움직인다. 아이고, 다행이다. 심각한 얼굴로 바라보던 아가씨의 얼굴도 탁하고 긴장이 풀린다.

“할머니, 제 말 들리세요?”

할머니가 두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끄덕인다. 아가씨가 할머니 손에 손풍기를 쥐여주고 가방에서 보온병을 꺼낸 다음, 뚜껑에 찬물을 담아 조심스럽게 할머니 입술에 대어준다. 한 손으로는 할머니의 목덜미를 바치고, 컵을 조금씩 기울여 천천히 할머니에게 찬물을 먹인다. 체구가 작은 할머니는 나약한 아기 같고, 그런 할머니를 돌보는 아가씨는… 멋있다. 백의의 천사가 이런 거구나, 속으로 감탄했다.

구급대원이 도착했다. 아가씨가 침착하게 상황을 설명한다. 한 십오 분 전에 갑자기 쓰러지셨어요. 처음엔 의식이 없었는데, 옷을 벗기고 부채질 계속해 드리니까 돌아왔어요. 언제요? 구급대원의 질문에 아가씨가 손목시계를 본다. 삼 분쯤 됐어요. 구급대원 중 한 명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차트에 상태를 기록하고, 나머지 두 명이 할머니를 들것에 눕혀 구급차에 실었다. 동료 할머니가 아가씨의 손을 잡으며 연신 고맙다고 말하고 구급차에 올라탔다. 큰일이 아니라서 천만다행이다.

수고했다는 말이라도 하려는데, 아가씨는 고개만 내 쪽으로 까딱하더니 다시 계단으로 내려간다. 무슨 바쁜 일이 있는지, 붙잡을 겨를도 없었다. 이것도 인연인데 인사라도 하고 가지. 아쉽지만 붙잡지 않았다. 어차피 오가며 마주칠 텐데, 조바심 낼 필요 없다.

회사에는 지각했다. 할머니를 구하느라 어쩔 수 없었다. 간밤의 회식 때문인지, 부장도 별말 없었다. 물어보면 장광설을 풀어놓으려 했는데. 점심시간에 부하 직원들 상대로나 자랑해야지. 하루종일 모니터만 바라보며 일하면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주저하지 않고 할머니에게 뛰어가 도움의 손길을 내민 스스로가 기특하고 대견했다. 역시 사람은 착하게 살아야 해. 좋은 일을 하니까 이렇게나 기분이 좋다. 이게 바로 선한 영향력일까.

그 아가씨를 생각한다. 달려와서 내 품에서 할머니를 받아 드는데, 젖은 머리에서 옅은 샴푸 향기가 났다. 나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진다. 싹수없는 아가씨인 줄 알았는데 가던 길을 굳이 돌아와 할머니를 도와준 걸 보면, 첫인상이 차가울 뿐이지 좋은 사람인 것 같다. 어우, 새침데기. 그나저나 요즘같이 퍽퍽한 시대에도 그렇게 사명감 넘치는 간호사가 있다니, 역시 아직 세상은 살 만하다. 내일부턴 마주치면 알은체라도 먼저 해볼까 보다. 아가씨도 아까 먼저 목례한 걸 보면 앞으론 안면을 트고 지내자는 뜻이 아닐까? 무료한 일상에 나만의 비밀이 생긴 것 같아 설렌다.


현관을 나서는 발걸음이 가볍다. 평소보다 십 분 정도 일찍 나왔다. 오늘은 유독 꼼꼼하게 씻었다. 새 셔츠를 꺼내입고 산뜻한 넥타이를 맸다. 무슨 기대를 하는 거야, 생각하면서도 들뜬 마음을 감출 수가 없다. 쏟아지는 햇살이 싱그럽다.

며칠 동안 아가씨를 만나지 못했다. 우연을 가장해서라도 마주치고 싶었는데, 운이 없었다. 간호사들은 교대 근무를 한다던데, 어쩌면 낮 근무가 아니라 밤 근무라서 엇갈렸는지도 모르겠다. 지난번엔 고마웠다고, 진중하게 한마디 건네야지 벼르고 있다. 오늘은 꼭 만나면 좋겠다. 시간이 너무 지나면 약발이 떨어져 말 걸기가 어색해지고 말 것이다.

역 앞에는 전단지를 돌리는 할머니가 한 분 서계신다. 예전 그분들은 아니다. 그 두 분은 며칠째 보이지 않는다. 한 분은 아직 병원에서 치료 중일 테고, 이 참에 나머지 한 분도 쉬시나 보다. 앗, 저 앞에 아가씨가 보인다. 반가운 마음에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를 뻔했다. 걸음을 재촉한다. 플랫폼을 내려가면 우연히 마주친 척 알은체를 해야겠다. 지난 번에 보니 같은 방향인데, 운이 좋으면 몇 정거장 같이 가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아가씨와 몇 걸음 거리를 유지하면서 다가간다. 아가씨가 먼저 출구에 다가가자 할머니가 전단지를 내민다. 오늘도 받지 않는다. 며칠 전에 그렇게 열심히 도와줄 땐 언제고, 관심 없는 척하는 모습이 이젠 귀엽다. 아무리 들이밀어도 아가씨가 받아주지 않자, 할머니가 인상을 팍 구긴다.

“아, 좀 받아줘라, 손 아프다!”

할머니가 역정을 내도 아가씨는 못 들은 척 지나쳐 계단을 내려가 버린다.

“어머니, 저 주세요, 저.”

사람 좋게 웃으며 할머니에게 손을 내밀었다. 여전히 탐탁잖은 표정으로 아가씨의 뒤통수를 노려보며 할머니가 전단지를 내민다. 전단지를 받아 드니 아가씨는 이미 사라졌다. 역사로 들어와 전단지를 쓰레기통에 버렸다. 하나쯤 그냥 받아주지, 다 좋은데 역시 아쉽다. 발걸음을 재촉한다. 주위를 둘러보는 척 자연스럽게 두 눈으로 아가씨를 쫓는다.


또 저 아저씨다.
요즘 아침마다 저 아저씨랑 마주친다. 한여름에 땀 뻘뻘 흘리면서 양복 재킷까지 챙겨 입는 거 보면 진짜 답 없다. 그냥 보기만 해도 눅눅하고 쉰내 날 거 같다. 딱 봐도 ‘꼰대력’ 높은 중소기업이나 다니겠지.

저 봐, 또 시작이다. 아무도 안 보는데 전단지 받으면서 괜히 인사하고 웃고. 목소리는 또 엄청 커요. 어차피 역사 들어가자마자 쓰레기통에 버릴 거면서 사람 좋은 척 쩌네.

저 전단지 돌리는 할머니도 완전 별로다. 다들 바쁜데 길 막고 전단지 들이대는 거, 솔직히 민폐 아님? 요즘 그걸 누가 읽는다고. 제발 잡상인들 규제 좀 했으면.

아, 날이 더우니까 이것도 저것도 다 짜증 난다. 아, 진짜 왜 이렇게 더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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