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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 이별 연구소

by 김대리

카테고리 > 결혼생활

제목 > 헤어져야겠지?

작성시간> 202X.04.08 23:28 조회수: 10,302


연봉 꼴랑 3천이면서 결혼식은 무조건 5성급 호텔, 신혼여행은 한 달 유럽, 결혼하면 일은 그만두고, 시댁은 무조건 1년에 2번만 가겠다는 여자. 나 잠재적 퐁퐁남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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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37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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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 1> 23:31 방생 금지

익명 2> 23:32 예뻐? 예쁘면 적당히 놀다 버릴 듯

익명 3> 23:32 요즘 저런 식으로 밀어붙이는 여자들 많음

익명 4> 23:33 조졌네




취조실에 나와 여자가 마주 앉아 있다. 여자는 불안해 보인다. 책상 위에 놓인 두 손을 연신 꼼지락댄다. 자연스러운 일이다. 범죄자든, 아니든, 잘못한 게 있든, 없든 누구나 취조실에 들어오면 움츠러들기 마련이다. 아니지, 세상에 잘못을 한 번도 저지르지 않은 사람이 과연 있을까? 눈앞의 이 여자도 분명 과거 본인이 저지른 잘못을 곱씹고 있다. 그게 바로 사법 시스템의 힘이다. 누구든 반성하게 만드는 것.

"자, 지금부터는 참고인 조사입니다. 물 한 잔 드시고 편하게 얘기하시면 됩니다."

상냥하게 말을 건네며, 곁눈질로 휴대폰 액정을 확인한다. 아무것도 없다. 불쑥 속이 상한다. 아침부터 여자 친구한테서 연락이 없다. 내가 보낸 메시지도 아직 읽지 않았다. 여자 친구는 취업 준비로 바빠져서 그렇다고 하지만, 마음이 식은 건 아닌가 불안하다. 요즘 들어 메시지도 짧아졌고, 예전엔 매일 보내던 아침, 저녁 안부 인사도 사라졌다.

집중해야지, 나는 휴대폰을 뒤집어 놓는다. 노트북에 띄워진 여자의 인적사항을 빠르게 훑어본다. 이름 한세연, 나이 스물 여덟 살, 직업은 대학원생, 전과는 없다. 여자는 일주일 전 발생한 신림동 살인사건 피해자의 전 여자 친구다.

원룸에서 한 남자가 죽은 채 발견되었다. 현장은 골목에 자리 잡은 오 층짜리 건물의 원룸이었다. 가구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고, 너저분하고, 총각 냄새가 나는, 전형적인 '남자가 혼자 사는 방'이었다. 식탁에는 며칠 전 라면이라도 끓여 먹었는지, 더러운 냄비가 그대로였다. 시체는 바닥에 엎어져 있었고, 뒤통수 쪽에 둔기로 얻어맞은 듯한 상처가 보였다. 목이 늘어난 반팔 티셔츠에 트레이닝 반바지 차림이었다. 나이는 삼십 대 초반.

사망 추정 시간은 지난밤 아홉 시쯤. 다음 날 아침, 혼자 사는 아들에게 반찬을 주기 위해 들른 어머니가 불운한 첫 목격자였다. 아들에게 연락이 닿지 않자 냉장고에 반찬만 넣어놓고 가겠다며 집주인에게 마스터키로 문을 열어달라 했다가 발견했다.

둔기는 현관에 널브러져 있는 피 묻은 10kg 아령으로 추정. 하지만 둔기에서 나온 지문은 없었다. 범인이 깨끗이 닦아 놓았겠지.

건물 현관 앞 CCTV는 가짜였다. 경찰임을 밝히고 협조를 구하자 집주인은 이번 달엔 꼭 바꿀 예정이었다며 궁색하게 변명했다. 요즘 여자 세입자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이런 식으로 가짜를 두는 경우가 많다. 하여튼 그래서 원룸에 출입한 사람을 파악할 수 없었다.

건물은 총 다섯 개층, 맨 위층에 집주인이 살고, 남자는 삼 층에 살았다. 장사가 그다지 안 되는 원룸인지, 한 층마다 네 세대가 있었지만 남자 집의 양옆 집은 비어 있었다. 물어보지도 않았건만, 집주인은 근처 대학교에 기숙사가 생기면서 장사가 안된다며 앓는 소리를 했다. 모든 세대에 가서 물어봤지만, 수상한 사람을 본 사람은 없었다. 남자의 바로 아랫집에 사는 여자가 무슨 소리를 듣지 않았을까 기대했지만 여자는 그날 남자 친구의 집에서 잤고, 그러므로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사건은 미궁에 빠졌다. 피해자의 주변인을 조사하다가, 일 년 전쯤 헤어졌다는 전 여자 친구를 찾았다. 지금 내 눈앞에 앉아 있다. 이 여자가 범인일까? 그렇지만 여자는 상당히 왜소한 체격이다. 홧김에 10kg의 아령을 들어 자기보다 키가 훨씬 큰 남자의 뒤통수를 가격하긴 어려워 보인다. 공범이 있는 걸까? 차라리 그게 더 설득력 있다.

공교롭게도 피해자 사망 당일 저녁, 여자의 행적이 묘연했다. 저녁을 먹고 오후 여덟 시쯤에 집 근처 보라매 공원을 산책했고, 밤 열 시쯤 집에 돌아왔단다. 보라매 공원에서 신림동 피해자의 집까지는 택시로 십오 분 밖에 걸리지 않는다. 하지만 공원 입구 CCTV에 여자가 밤 여덟 시쯤 공원에 들어갔다가 밤 아홉 시 오십 분쯤 나오는 장면이 찍혔다. 물론 CCTV가 없는 쪽으로 드나들었을 수도 있다. 공원을 산책하는 척 알리바이를 확보하고 중간에 빠져나와 피해자를 살해했을 지도.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다. 공원에서 누굴 만났냐고 물어도 여자는 혼자 산책했다고 했다. 개를 키우는 것도 아니고, 체격을 봐선 딱히 다이어트 목적으로 운동을 할 것 같지도 않은데, 그 부분이 의심스럽다.

"왜 혼자 걸었어요?"

내 질문에 여자가 눈을 사납게 치켜뜬다. 생각이 복잡하면 혼자 걷고 싶을 수도 있는 거 아니에요? 뭐, 그렇지.

“애인 있어요?”

“그게 이 사건이랑 무슨 상관이에요?”

“질문에 대답하세요.”

여자는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만나는 사람이 있다고 말했다. 사귄 지는 몇 달 되지 않았단다.

"전 남자 친구는 얼마나 사귀었어요?"

"반년쯤 만났어요."

"왜 헤어졌죠?"

"제가 차였어요. 이유는 몰라요."

여자는 이 년 전, 원룸 근처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죽은 남자를 만났다고 했다. 남자가 담배를 사러 왔다가 여자에게 눈도장을 찍고, 몇 번 들르다가 번호를 물어보고. 흔한 연애사였다. 단순히 호감에 기반한 연애는 썩 낭만적이진 않았나 보다. 여자는 대학원생, 남자는 사회초년생, 적당히 지질하고 적당히 돈에 쪼들리는 연애를 하다가 헤어졌단다. 반년 연애하는 동안 기억에 남을 만한 이벤트도 딱히 없었다고 했다. 그게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간에.

"혹시 짐작 가는 사람 없어요? 전 남자 친구하고 사이가 나빴던 사람이 있다던가."

"몰라요, 그 사람 친구들 만난 적 없었어요."

여자는 불안한 듯 손톱을 물어뜯기 시작한다. 확실히 뭔가 숨기고 있는데... 형사의 촉이 울리지만, 그게 뭔지 지금은 알 수가 없다. 일단 조서를 다 꾸미고 여자를 귀가시켰다. 여자를 배웅하고 들어오는 길에, 후배를 불러 피해자의 주변인에게 여자에 대한 평판과 소문을 조사하도록 지시했다.


피해자 주변인 조사를 이어나갔다. 이번에는 남자의 '불알친구'를 불러 조사했다. 친구는 남자가 죽은 밤에 확실한 알리바이가 있었다. PC방에서 하루 종일 게임을 했다. 내부에 설치된 CCTV로 내내 자리에 앉아 있는 모습을 확인했다.

"주변에 원한 살만한 사람 없었어요?"

나의 질문에 친구는 고민하다가, 이미 조사했던 전 여자 친구가 의심스럽다고 말한다.

"왜죠?"

"아, 그 새끼가 쓸데없는 글을 하나 써가지고요."

친구가 얘기하길, 죽은 남자는 헤어질 때쯤 직장인 커뮤니티 게시판에 글을 하나 올렸는데, 당시 여자 친구를 험담하는 내용이었다고 했다. 여자 친구가 일 년에 고작 삼천만 원 밖에 못 벌면서, 결혼식은 무조건 5성급 호텔에서 올려야 한다고 우긴다는 글이었다. 친구가 사이트에 로그인하여 남자가 썼다는 글을 찾아서 보여주었다. 조회수가 꽤 나왔는지, 짧은 글에 달린 댓글이 백 개가 넘었다. 대부분 여자를 힐난하고 조롱하는 내용이었다.

"이게 어쨌다는 거죠?"

"그때 사귀던 여자 친구도 같은 커뮤니티에 가입되어 있었거든요. 원래 직장인만 가입할 수 있는 사이트인데, 예전에 인턴 할 때 만들어놓은 계정이 있었나 봐요."

죽은 남자의 글을 본 전 여자 친구가 본인을 저격해서 쓴 글이냐 따졌고, 그 일을 계기로 둘이 크게 다투고 헤어졌다고 했다.

별 일이 없는 게 아니었구먼. 신상까지 털린 건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여자는 온라인에서 제대로 수모를 당했다. 사람을 죽일 만큼의 원한은 아닌 것 같지만, 보여주기에 목숨 거는 MZ세대라면 또 모르지. 죽어, 나를 쪽팔리게 했으니까 넌 죽어야 해. 더 중요한 것은 여자가 이별 사유에 대해서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다. 왜 속였는지 물어봐야 했다.

여자를 다시 불렀다. 취조실에 앉은 여자는 지난번보다 훨씬 불안해 보인다. 연신 손톱을 물어뜯으며 안절부절못한다. 나는 이미 여자에게 종이로 출력한 그 글을 보여주었다. 눈앞의 여자와 글 속의 여자를 비교하면서, 묘한 괴리감을 느낀다. 여자는 성형한 것 같지도 않고, 옷차림도 수수하다. 말투도 차분하고 경박스럽지 않다. 여자가 정말 그런 말을 했을까? 어쩌면 죽은 남자가 지어낸 글일지도 모른다.

"거짓말을 하시면 어쩝니까. 이게 장난 같아요?"

나는 일부러 눈을 부라리며 험악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참고인들은 가끔 겁을 좀 줘야 솔직해진다.

"바른 대로 말해요. 그날 보라매 공원에서 누굴 만난 거죠?"

여자가 어쩔 줄 몰라한다.

"이거 보세요, 사귀는 동안 별일 없었다면서요, 근데 이 글 뭐예요. 그리고 하필이면 전 남자 친구가 살해당한 시간에 혼자 두 시간이나 공원을 걸었다는 거, 이상하지 않아요? 솔직하게 대답하세요. 자꾸 거짓말하면 한세연씨가 범인이라고 볼 수밖에 없어요."

여자가 펄쩍 튀면서 항변한다. 제가 안 죽였어요. 제가 걜 왜 죽여요, 무슨 이런 글 하나 썼다고 사람을 죽여요. 그리고, 죽일 거면 벌써 죽였죠, 일 년도 더 지난 일인데. 난감했다. 여자의 말이 맞다. 현장에서 여자의 지문이 나온 것도 아니니 명확한 알리바이가 없다 한들, 이것만으로 기소할 수는 없다. 하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결정적인 증거가 없어도 몰아붙여야 한다.

"그러니까 솔직하게 말하라고요. 누구 만났어요?"

여자는 어쩔 줄 몰라하다가, 나에게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라고 했다. 기가 찼다.

"어차피 취조실에서 나온 얘기는 밖으로 새지 않아요."

"그래도 안돼요. 확실하게 해 주세요, 형사님이 맹세하셔야 저도 솔직하게 말할 수 있어요."

어이는 없었지만, 오른손을 들어 '맹세'라고 엄숙하게 말했다. 여자는 고개를 젓는다.

"안 되겠어요, 각서를 써주세요. 밖으로 절대 발설하지 않는다고."

"아니, 지금 장난해요?"

오른손으로 책상을 내리치며 으름장을 놓았다. 하지만 여자는 물러서지 않는다. 각서 써주시면 저도 솔직하게 말할게요. 하, 진짜 귀찮게 구네. 파일 속 이면지를 꺼내어 적당히 휘갈겨 썼다. 나는 조사 과정에서 알게 된 내용을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겠습니다. 종이 하단에 이름을 적고, 서명을 남겼다. 어차피 법적 구속력 따위 없는 종이쪼가리일 뿐이다. 각서를 넘겨주자, 여자는 그제야 안심한 듯 입을 열었다.

"... 사실 그날 밤에 만난 사람이 있었어요."

옳거니.

"형사님, 안전 이별 연구소라고 아세요?"

그게 뭐야. 폭력성을 보이는 이성에게서 안전하게 벗어난다는 의미로, '안전 이별'이라는 말은 들어봤지만 그걸 연구하는 곳이 있다는 얘기는 처음 듣는다. 의아한 내 표정에 아랑곳 않고, 여자가 말을 이었다.

죽은 그 남자, 폭력적인 성향이 있었어요. 처음엔 간도 쓸개도 다 빼줄 것처럼 잘해주더니, 두 달 지나니까 본색을 드러내더라고요. 다른 이성 친구 연락처 다 지우라고 강요하고, 한 시간만 통화 안돼도 집 앞으로 찾아오고. 화나면 욕하고, 때리는 시늉도 하고요. 얼마나 무서웠는지 몰라요. 그래서 헤어지려 했는데, 친구가 말리는 거예요. 그런 놈은 그냥 이별 통보하면 해코지한다고. 그러면서 연구소를 소개해줬어요. 친구도 그쯤에 때리는 남자 친구랑 헤어졌거든요.

여자의 말을 요약하면, 그 연구소는 여자들에게 폭력적인 남자 친구와 안전하게 이별할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해 주는 곳이라고 했다. 철저히 베일에 쌓여있는 유령 업체였다. 홈페이지도 없고, 사무실도 없다. 있는 거라곤 구두로 전해지는 인터넷 전화번호뿐인데, 그마저도 매번 바뀐다고 했다. 문자도 안되고, 반드시 본인이 직접 전화를 걸어야 하며, 여자만 의뢰할 수 있었다. 또한 신규 고객이 되려면 기존에 연구소에 작업을 의뢰했던 추천인이 있어야 했다. 그 이후 복잡한 인증 작업을 거치는데, 일단 의뢰자는 본인의 신변을 상세하게 밝혀야 한다. 이름, 나이, 주소, 전화번호는 물론이오, 직업, 가족과 지인관계까지 전부 다. 호기심에 찔러보기만 하는 사람들을 걸러내고, 외부로 발설하지 못하도록 막는 장치라고 했다. 반면 연구소나 연구원에 대해서는 알 수 있는 정보가 전혀 없었다. 위치가 어디인지, 직원은 몇 명인지. 의뢰 비용은 생각 외로 저렴했다. 한 건에 백만 원. 처음 제안한 방법이 통하지 않으면, 헤어질 때까지 다른 방법을 제시하며 끝까지 책임진다고 했다. 하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연구소를 소개해준 친구는 단 일주일 만에 남자 친구한테 차였고, 여자도 연구소에서 소개해 준 방법을 통해 한 달 만에 폭력적인 남자 친구를 떨궈낼 수 있었다. 결혼을 재촉하면서 "식은 무조건 5성급 호텔에서 올리고, 신혼여행은 한 달 동안 유럽으로 가야 하고, 결혼하면 무조건 일은 그만둘 것이며, 시댁은 일 년에 두 번만 가겠다"는 말을 질리도록 해서 죽은 남자가 먼저 이별을 고하게 만든 것이다. 남자가 커뮤니티에 글을 올리면서 일이 귀찮아지긴 했지만, 덕분에 크게 싸웠고, 질린 남자는 미련 없이 여자에게 이별을 고했다.

여자는 죽은 남자와 헤어지고 몇 달 전 지금의 남자 친구를 만났지만, 이번 남자 친구도 하필이면 폭력적이라고 했다. 크게 싸우고 뺨을 맞은 적도 있다고. 그래서 연구소에 헤어지는 방법을 재의뢰했고, 그날은 보라매 공원에서 연구원을 만났다. 본인 인증을 하는 자리였다고 했다. 전 왜 똥차만 꼬이는지 모르겠어요, 말을 마친 여자가 푸념처럼 덧붙였다.

황당한 이야기였다. 증거를 요구하자, 여자는 연구소와의 통화기록을 보여주었다.

"증거는 이게 다예요. 형사님이 못 믿으셔도 어쩔 수 없어요. 전 솔직하게 말씀드렸어요. 비밀 꼭 지켜주셔야 해요."

여자가 돌아가고, 나는 고민에 빠졌다. 진짜일까? 세상은 요지경이고, 정말 별의별 서비스가 다 존재한다. 신종 사기나 보이스피싱은 아닐까? 하지만 여자의 말에 따르면 효과를 봤다는 고객이 최소한 두 명이나 있다.

여자의 말을 떠올리며, 괜히 씁쓸해졌다. 이제 만나고 헤어지는 것도 돈을 주고 사는 시대인가. 문득 휴대폰을 확인하지만, 여전히 여자 친구의 연락이 없다. 확실히 취업 준비 동아리에 가입한 이후로, 여자 친구가 바빠졌다. 그날도 하루 종일 연락이 되지 않았다. 걱정이 되어서 밤늦게 집 앞으로 찾아갔는데, 웬 남자와 다정하게 걸어오고 있는 게 아닌가. 나는 다가가서 남자를 노려보았다. 놀란 여자 친구는 같이 공부하다가 집 방향이 같아서 선배가 데려다준 거라 변명했다. 남자도 맞장구를 쳤다. 이 시간에? 재밌네. 남자에게 윽박을 질러 내쫓았다. 겁을 주려고 주먹을 올렸었나? 술을 많이 마셔서 사실 기억은 안 난다. 그날 여자 친구가 울면서 사과했지만, 진심은 아니었던 것 같다. 다시 그런 일이 생기면, 아니, 그런 일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 여자 친구가 의심할 거리를 절대 만들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니까. 그 남자와 주고받은 메시지도 확인시켜 줬고, 동아리도 탈퇴했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 여자 친구의 마음이 식은 것 같다. 불안하다.

고개를 젓는다. 집중해야지. 어쨌든 여자가 범인인지 아닌지 확인하려면, 즉, 여자의 알리바이를 입증하려면, 연구소가 진짜라는 것도 확인해야 했다. 며칠을 고민하다가, 여자에게 다시 연락을 취했다.


몇 주 뒤, 나는 취조실에 앉아 조서를 마무리하고 있다. 신림동 살인사건의 진범이 잡혔다. 죽은 남자의 직장 동료가 범인이었다. 치정에 의한 살인이었다. 남자는 직장 내 여자 동료와 만나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여자가 양다리였단다. 실상을 알게 된 남자 친구가 죽은 남자 집에 찾아왔고, 같이 있는 두 남녀를 보고 분노를 참지 못하여 남자를 살해했다. 여자 동료는 남자 친구를 맞닥뜨리자마자 혼비백산해서 도망쳤고, 두 남자가 싸우는 소리는 들었지만 살해 장면을 직접 목격하지는 못했다고 진술했다. 다음 날부터 죽은 남자도, 남자 친구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회사에 소문이 날까 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단다. 사람이 죽었는데, 참. 그 여자도 어지간하다.

안전 이별 연구소에 대해서도 이미 알아보았다. 한세연에게 진위를 확인해야 하니, 연구소에 친구인 척 내 여동생을 추천해 달라고 부탁했다. 동료 형사에게 부탁할까 하다가, 형사라는 직업 때문에 괜한 의심을 살 것 같아서 평범한 직장을 다니는 여동생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여자는 처음엔 망설였지만, 범인으로 몰릴 수 있다는 말에 순순히 따랐다. 연구원을 만나고 온 여동생이 연구소가 진짜라는 걸 확인해 줬다. 도와준 대가로 용돈 십만 원을 쥐어줬다. 발설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버린다고 협박도 살짝 곁들여서.

여동생은 상습적으로 폭언을 퍼붓는 형사와 만나고 있다고 설정했다. 남자 친구가 공권력을 쥐고 있어서 더 무섭다고 너스레를 떨도록 시켰다. 연구원은 여동생에게 남자 친구와 아이디를 공유하는 배달 애플리케이션에 지속적으로 별 한 개짜리 악성 리뷰를 남기라고 조언해 줬단다. 가상의 남자 친구 부모님이 작은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고 말한 뒤 제안해 준 방법이라고 했다. 꽤 신박했다. 나라도 우리 부모님이 식당을 하시는데, 여자 친구가 악성 리뷰를 남기는 진상이면 오만정이 다 떨어질 것 같다.

모니터에 한세연의 파일을 띄웠다. 지금 보니 사진 속 여자는 묘하게 억울하게 생겼다. 좀 괴롭히고 싶게 생겼다랄까. 초등학생 때 친구들이 치마를 들춘다거나 해서 괴롭히는 여학생들은 공통점이 있었다. 조금만 건드려도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고, 툭하면 울음을 터뜨리고. 그런 반응이 재밌어서 더 괴롭히는 건데, 어른들은 늘 제멋대로 해석하곤 했다. 쟤가 너를 좋아해서 그런 거라고. 글쎄, 내가 볼 땐 좋아하는 게 아니라, 먹이를 가지고 노는 맹수들의 심리에 더 가까워 보였는데.

휴대폰을 집어든다. 연락처를 찾아 통화버튼을 눌렀다. 몇 번의 신호음이 흐르고, 건너편에서 여보세요, 대답하는 소리가 들린다.

"응, 최 기자님, 잘 지냈어요? 왜 전화했긴, 우리 기자님 특종 하나 챙겨주려고 전화했지."

이 바닥에서 가장 끈덕진 기자에게 안전 이별 연구소에 대해서 알려주고 파보라고 지시했다. 오죽하면 별명이 ‘불도저’다. 예상대로 최 기자는 바로 물었다. 이제 몇 달 지나지 않아 만천하에 연구소의 실체가 까발려질 것이다.

"잘되면 다음에 술이나 한 잔 사요. 그래요, 들어가세요."

흡족하게 통화를 마무리했다. 방법이 좀 투박해서 그렇지, 고발 정신 투철한 좋은 기자다. 벌써 기사가 기다려진다.

이로써 사건 종결. 조서를 마무리해서 과장에게 넘기면 끝이다. 몇 주 동안 고생했더니 온몸이 찌뿌둥하다, 사우나나 갈까. 창을 닫으려다 여자의 사진이 한 번 더 눈길을 사로잡는다. 쯧, 혀를 찬다.

어디 감히, 건방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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