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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중진미 Aug 26. 2022

흥보가 & 흥보가 기가 막혀

[고전문학 with 케이팝] 실험적 판랩, 육각수의 흥보가 기가막혀

고전문학이 지루하고 따분하다고요? 케이팝이 있잖아요. 고전문학에서도 우리의 케이팝은 그 존재 가치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판소리 사설 ‘흥보가’와 육각수의 ‘흥보가 기가 막혀’를 엮어 보았습니다.



우리의 판소리에는 모두 다섯 마당이 있다. ‘흥보가’를 비롯하여 ‘춘향가’, ‘심청가’, ‘수궁가’, 그리고 ‘적벽가’가 그것이다.      

다음은 조선 후기에 생성되어 오늘날까지 전승되고 있는 판소리 다섯 마당 중 하나인 ‘흥보가’의 한 대목이다. 흥보는 집을 나가라는 놀보에 말에 놀라고 기가 막혀 놀보에게 통사정을 한다. 그러나 놀보는 단칼에 노! 결국 짐을 싸 집을 나오지만, 어디로 가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수다한 그 자식들을 데리고 말이다. 

    

판소리 사설흥보가

[중모리장단] 흥보가 기가 막혀, 나가란 말을 듣더니마는, 섰든 자리여가 끓어 엎져서, “아이고, 형님! 형님, 이게 웬 말이오? 이 엄동 설한풍에 수다헌 자식덜을 다리고, 어느 곳으로 가서 산단 말이오? 형님, 한번 통촉을 하옵소서.” “이놈, 내가 너를 갈 곳까지 일러 주랴? 잔소리 말고 나가거라!” 몽둥이를 추켜들고 추상같이 어르는구나. 흥보가 깜짝 놀래 안으로 들어가며, “아이고, 여보, 마누라! 형님이 나가라 허니, 어느 영이라 어기오며, 어느 명령이라고 안 가겼소? 자식들을 챙겨 보오. 큰자식아, 어디 갔나? 두채 놈아, 이리 오느라.” 이삿짐을 챙겨 지고, 놀보 앞에 가 꿇어 엎져, “형님, 갑니다. 부대 안녕히 계옵시오.” “잘 가거라.” 흥보가 하릴없이 울며불며 나가면서, 신세 자탄 울음 운다. “아이고, 아이고, 내 신세야. 부모님이 살았을 적에는 네 것 내 것이 다툼 없이 평생에 호의호식, 먹고 입고 쓰고 남어 세상 간 줄을 몰랐더니, 흥보의 신세가 일조에 이리될 줄을 어느 뉘가 알겼느냐? 여보게, 마누라!” “예.” “어느 곳으로 갈까? 아서라, 산중으로 가자. 산중으 가 사자헌들 백물이 귀하여 살 수 없고, 아서라, 도방으로 가자. 일 원산, 이 강경, 삼포주, 사 법성, 도방으 가 사자헌들 비린내 짓궂어 살 수 없고, 충청도 가 사자헌들 양반들이 모도 억시어서 그곳에는 살 수가 없으니, 어느 곳으로 가서 산단 말이냐?”     



[아니리] 이렇게 흥보가 울며불며 나가, 그렁저렁 이리 갔다가 저리 갔다 허는디, 아, 살 디가 없이니까 거 동네 앞에 물방아실도 자기 안방이요, 이리저리 돌아댕기다가 셍현동 복덕촌을 당도하였것다. (이하 생략)   

  

※중모리장단 【명사】

⦗악⦘ 판소리 및 산조 장단의 하나. 진양조 장단보다 좀 빠르고 중중모리 장단보다 좀 느린 속도로, 8분의12 박자임.     


※아니리 【명사】

⦗악⦘ 판소리에서, 창을 하는 중간에 장면의 변화나 정경 묘사를 위해 이야기하듯 엮어 나가는, 창 아닌 말. 

    

※창ː (唱) 【명사】

⦗악⦘ 판소리나 잡가 등을 가락에 맞추어 높은 소리로 노래를 부름. 또는 그 노랫소리《판소리의 경우, ‘발림’·‘아니리’와 함께 3대 요소를 이룸》     


※발림 【명사】

⦗악⦘ 판소리에서, 극적인 효과를 위하여 창하는 사람이 곁들이는 몸짓이나 손짓. 너름새.   

  

시나리오 vs 희곡 vs 판소리 사설

영화의 대본을 시나리오라 하고, 연극의 대본을 희곡이라 하듯이 판소리에도 대본이 있다. 그걸 우리는 판소리 사설이라고 부른다. 윗글은 강도근 명창이 부른 판소리의 대본격인 판소리 사설이다. 이 글의 특징은 창과 아니리가 교차하면서 전개되고, 운문과 산문이 결합된 형태의 3·4조 또는 4·4조의 운율이 그것이다. 또한 일상적 구어와 현재형 시제를 사용하여 장면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판소리 장단의 빠르기를 보면, 진양조장단이 가장 느리고, 중모리장단, 중중모리장단, 자진모리장단, 휘모리장단 순으로 빠르다.      


판소리 vs 오페라

판소리의 ‘아니리’는 클래식 음악에서는 ‘레치타티보’와 비슷하다고 「퇴근길 클래식 수업」의 저자 나옹준은 말한다. 그의 기막힌 설명을 좀더 들어보자. 판소리의 ‘창’은 당연히 ‘아리아’에 비유하고, ‘고수(북 치는 사람)’의 역할을 반주를 담당하는 소규모 오케스트라에 비유한다.      


판소리는 아니리로 전체적 줄거리를 이야기하고, 창으로 사건과 감정을 자세히 노래하면서 창과 아니리가 교차 반복하는 표현 방식이다. 마찬가지로 오페라에서도 레치타티보로 상황을 설명하고, 아리아로 자세한 감정을 드러내고 나면, 다시 레치타티보로 상황을 이야기하고, 또다시 아리아로 그 상황을 자세히 표현한다.      

우리의 판소리와 서양의 클래식이 어쩜 이렇게 닮았을까. 모든 예술은 동서양이 서로 통하는 게 딱 맞나 보다.     

이야기가 잠시 옆길로 빠져 버렸다. 우리의 흥보가 형님의 분부 받잡고 기가 막혀하는 그 대목에서 이 노래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새로운 장르 판 랩흥보가 기가 막혀

바로 육각수가 부르는 ‘흥보가 기가 막혀’이다. 이 노래는 잘 알다시피 경북 울진 출신 도중운과(아, 울진 산불로 금강송 수만 그루가 걱정이 된다.) 전남 영광 출신 조성환이 결성한 남성 듀오 ‘육각수’가 불러, 1995년 제16회 MBC 강변가요제에 출전하여 금상을 수상했다. 원문과 마찬가지로 흥보의 기막힌 상황이 잘 드러나 있다.     



흥보가 기가 막혀 흥보가 기가 막혀

흥보가 기가 막혀 흥보가 기가 막혀

흥보가 기가 막혀 흥보가 기가 막혀

흥보가 기가 막혀


아이고 성님 동상을 나가라고 하니

어느 곳으로 가오리오 이 엄동설한에

어느 곳으로 가면 산단 말이오

갈 곳이나 일러주오     


지리산으로 가오리까

백이 숙제 주려 죽던

수양산으로 가오리까

아따 이놈아 내가 니 갈 곳까지 일러주냐

잔소리 말고 썩 꺼져라 

- 육각수, ‘흥보가 기가 막혀’     



전통 판소리를 현대적 랩과 융합하여 실험적인 ‘판 랩’ 장르를 탄생시키기도 한 이 노래는, 그 인기몰이로 1995년 당시 정치권의 비자금 사건을 비판하기도 했다. 당연히 노래방에서 신나게 개사를 하면서 말이다. 세월이 흘렀지만 요즘도 정치권은 기가 막히긴 마찬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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