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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교수의 인터랙션 Aug 03. 2022

학생들을 가르친다는 것-

내 직업이 '교수'가 아닌 '학생들을 가르치는 사람'인 이유

“Hi, Professor, can I skip your class tomorrow?”


학생에게 이메일을 받았다. 자기 여자 친구가 우울증으로 힘들어하는 와중에 자살시도를 해서 지금 응급실에 있다고 연락이 왔다. 자기가 정신과 치료를 받도록 도와주고, 함께 있어주고, 같이 운동하는데도 상황이 크게 나아지지 않는다면서, 여자 친구의 영향으로 자신도 공부에 집중을 못한다면서 본인이 학기를 제대로 마칠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며 상담을 해왔다. 일단은 내일 내 수업에 오지 말고, 여자 친구 옆에 있어주라고.. 드라이브라도 가서 같이 걸으면서 얘기를 많이 하라고 이메일에 답을 해줬다. 하지만, 이렇게밖에 조언을 해주지 못하는 나 스스로가 안타까웠다.  물론 나는 정신과 의사도 아니고 전문 상담사도 아니지만, 학생들을 강의실에서 일주일에 두 번씩 만나는 나로서는 그들의 정신건강이 가장 많이 걱정이 된다.


——————

미국에서 교수로서 강의를 시작한 지, 6년이 되고 막 7년 차가 되었고 최근 조교수에서 부교수로 승진이 되었다. 한국에서 컨설팅 회사에서 2년 넘게 근무하다가 번아웃이 와서 방황하던 나는, 당시 남자 친구이었던 남편과 같이 2011년에 유학길에 올라 공부를 하고, 2016년에 박사학위를 받고 졸업과 동시에 미국 사립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었다. 그로부터 6년 후, 지금 나는 어디까지 온 것일까. 그리고, 앞으로는 어디로 나아가야 할 것인가.


최근 승진심사를 위해 자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내 지금까지의 커리어를 돌이켜보았다. 나는 무엇을 위해 지금까지 왔을까.


교수가 되고 처음 몇 년은 나의 성공을 위해서 노력했다. 새로운 직장에서의 명성, 연봉, 자랑스러운 나의 부모님의 딸, 누군가의 며느리, 아내가 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하지만 나를, 정확하게 나의 성공을, 너무 생각한 나머지, 학생들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처음 교수로 임용이 되어 강의실에 들어섰을 때, 동양인으로서 나이보다 어리게 보이는 외모 혹은 여자 교수라는 이유 때문에 학생들에게 무시당할까 봐 가면을 썼었다. 더 당당해 보이려고, 더 엄격해 보이려고, 학생들에게 빈틈을 보이고 싶지 않았었다. 숙제 제출이 늦어져서 한 번만 봐달라고 사정하는 학생에게 ‘다른 학생들과 공평하지 않다’는 것을 이유로 숙제를 받지 않거나 감점이라는 페널티를 주었다. 내 수업시간에 휴대폰을 보거나 자기 노트북만을 보고 있는 학생이 있으면, 갑자기 그 학생에게 질문을 해서 당황하게 만들거나 그 앞에 서서 노트북을 닫으라는 식으로 무언의 압력을 가했다. 당연히 학생들도 나를 경계하는 것이 보였고, 나는 그것이 그들이 열심히 하지 않은 탓이라고만 생각했었다. 이 모든 행동이 자신이 없었던 나를 방어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었음을 나중에서야 깨달았다.


모두가 아마 그랬듯.. 코로나가 막 시작되었던 2020년 초부터 심각한 무기력증과 번아웃을 경험했다.

시대가 가져다준 갑작스러운 상황에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없구나 하면서 좌절했었다. 그 당시 교수 4년 차였던 나는 안 그래도 불안했던 내 커리어에 안 좋은 영향이 생길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더욱 움츠려 들었던 것 같다.

새벽 기상과 명상을 시작한 것이 바로 그때부터다. 그 당시 내가 컨트롤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고민하던 중에 택했던 방법이었던 것이다. 명상을 하면서 나의 두려운 마음을 똑바로 보면서, 동시에 연민도 생겼다.

힘들구나.. 네가 열심히 하고 싶고, 잘하고 싶었는데 그게 좌절되어서 그러는 거구나.. 제삼자가 되어 나를 조금씩 객관적으로 보기 시작했던 것 같다.


코로나가 발발하고 그 해 가을학기를 시작하면서, 그 당시에는 건물에 들어가는 것조차 두려웠었다. 마스크를 쓰는 것도 익숙지 않아서 괜히 숨도 안 쉬어지는 것 같고 강의도 길게 못할 것 같았다. 그렇게 무거운 마음을 가지고 학기 첫날 강의실에 들어갔는데, 내 수업을 들을 학생들이 눈에 들어왔다. 마스크를 쓰고 몇몇은 장갑까지 낀 두려운 눈빛을 한 스무 명 남짓의 학생들이 내 앞에 앉아있었다.


‘지금 이 친구들은 얼마나 불안할까.’ ‘이 학생들은 미국 생활 자체가 인생에서 처음 맞이하는 것일 수도 있는데 얼마나 두렵고 무서울까,’ ‘이들의 부모님들은 유학을 보내고 얼마나 걱정을 하실까’ 하는 생각이 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Thanks for coming all the way from your home country to study at our school’


나도 모르게 학생들에게 이렇게 학업을 위해 용기를 가지고 나와줘서 고맙다고 했다. 이렇게 불안한 시기에 각자의 꿈을 이루기 위해 유학을 나와 지금 내 강의실에 앉아있구나. 나의 유학생 시절의 모습이 오버랩되기도 했다.


그때부터 나는 더 이상 나를 방어하지 않기로 했다.

그들에게 지식을 전달하는 ‘권위자’가 아니라, 나보다 더 불안하고 두려울 그들에게 최대한 용기를 주고 응원을 하는 ‘서포터’가 되기로 다짐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나의 수업은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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