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의 그늘>
불안은 인간이 가진 태초의 감정이다.
불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태초부터 인간이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해왔는지, 그리고 그것이 생존과 어떤 식으로 연결돼 있는지 알 필요가 있다. 불안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 간략한 예를 들어보자. 사람의 발길이 한 번도 닿지 않은 외딴섬이 있다고 하자. 그런데 조용하고 평화롭던 섬에 갑자기 인간이 나타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우선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없다. 생존을 최우선으로 두고 자신의 유전자를 남기도록 설계된 자연법칙에 따라 위협이 되지 않는다면 인간을 피할 이유도, 경계할 이유도 없다. 그리고 이런 일은 실제 자연에서 얼마든지 일어난다. 인간을 한 번도 보지 못한 동물은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
이제 인간의 대학살이 시작된다. 그것이 생존을 위한 먹이 사냥이건 그렇지 않건 간에 이유는 중요하지 않다. 사람이 새로운 포식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그 과정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어느 날, 한 무리에서 같이 생활하던 개체가 인간에 의해 죽임을 당하거나 자신 스스로 죽을 뻔한 일을 겪게 된 동물은 뇌에 새로운 생존 회로를 만든다. 즉 인간을 포식자로 인식하고 살아남기 위한 즉각적인 반응을 뇌에 새기는 것이다. 이후 한가로이 낮잠을 자거나 먹이 활동을 하다가 인간의 냄새를 맡으면 포식자임을 알아차리고 전력으로 도망친다. 이것이 모든 동물의 진화 과정이었고 이에 적응하지 못한 개체는 살아남지 못해 후대에 자신의 유전자를 남길 수가 없었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수렵 채집 시절, 맹수의 습격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순식간에 목숨을 잃었다. 그래서 다른 종처럼 생존을 위한 공포 회로를 가지고 있다. 이를테면 옆 동료가 우거진 풀숲에서 튀어나온 맹수에게 목숨을 잃었다고 하자. 그날 저녁, 동료의 죽음을 애도하며 내가 살아남았음에 안도하겠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뇌 안에서는 생존을 위한 엄청난 일들이 일어난다. 오늘 있었던 잔혹한 사건, 즉 맹수가 튀어나온 장소와 그때 있었던 상황을 기억하고 그것이 맹수의 경고 신호가 되어 뇌 안의 공포 회로에 깊이 각인된다.
미국의 신경과학자 폴 맥린은 진화학적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의 뇌 구조는 R 복합체, 대뇌변연계, 대뇌피질, 이렇게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고 했다. R 복합체는 파충류를 뜻하는 영어 단어에서 (Reptile) 앞 글자만 따온 것이다. 심장박동, 호흡, 순환 등 기본적인 생명 유지를 담당하기에 파충류의 뇌라 부른다. 대뇌변연계는 약 1억 년 전 초기 포유류에게도 있었을 만큼 아주 오래된 포유류의 뇌로 감정과 본능의 원천이다. 대뇌피질은 고등 포유류의 마지막 진화 단계에서 발달한 부분으로 이성적 사고와 언어 등 고차원적 사고 능력이 발휘되는 부분이다.
폴 맥린이 제시한 뇌 구조는 현재까지도 명확히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뇌를 극단적으로 단순화시켰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러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론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불안을 이해하기 위한 가장 기초적인 개념을 아는 것에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폴 맥린이 제시한 뇌 구조는 이해하기에 아주 직관적이고 명료하다. 불안은 인간의 뇌 중 감정을 담당하는 대뇌변연계에 의해 일어나는 반응이다. 변연계는 기본적으로 시상하부와 편도체, 해마, 대상 피질로 이루어져 있는데 불안은 주로 편도체와 해마, 시상하부 사이의 상호 작용이 중요하게 관여한다. 불안을 느낄 때 뇌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보기 위해 호모 사피엔스 시대로 돌아가 보자.
동료를 잃었다. 사냥 실력은 부족해도 우직함으로 한몫 단단히 하던 그가 한순간에 목숨을 잃었다. 평소와 다를 건 없었다. 그저 수풀이 우거져 있고 처음 맡아보는 비릿한 냄새와 이상할 정도로 주변이 고요했다는 것뿐이다. 순간 목덜미를 스치는 서늘함에 움직임을 멈췄을 때, 풀숲을 헤치는 날카로운 비명 소리와 함께 내 앞의 그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리고 그곳엔 낭자한 선혈만이 남았다. 너무 놀라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전력으로 도망쳤다. 터질 듯한 심장과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을 뒤로하고 조금 전 생을 달리한 동료에 대한 죄책감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냉혹한 현실에서 이런 일은 아주 흔했으나 함께 웃고 떠들던 동료에 대한 상실감은 언제나 적응하기 힘들었다.
며칠이 지났다. 사고의 충격으로 멀리 가지 못한 채 마을 근처에서 채집만 했다. 그리고 이제 음식이 떨어져 간다. 굶어 죽지 않으려면 다시 움직여야 한다. 떨린 가슴을 부여잡고 나선 길에 날카로워진 신경은 주변의 모든 것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스쳐 가는 바람 소리와 수풀의 움직임이 예전과 다르게 느껴지다가 갑자기 온몸이 굳으며 설명할 수 없는 공포가 밀려온다. 그날의 서늘함과 비릿한 악취를 다시 맡는 바로 그 순간이다. 이때 제일 먼저 위험을 감지하는 것은 뇌 안의 편도체이다. 편도체는 작은 구형의 아몬드처럼 생겼다고 해서 아미그달라 (Amygdala)라고 하는데 여러 감각 기관이 느낀 정보를 종합하여 인간의 감정을 결정한다. 즉, 후각과 촉각이 느낀 그날의 비릿한 악취와 서늘함을 바탕으로 얼마 전 동료의 죽음을 기억하고 공포라는 감정 정보를 입혀 이를 시상하부에 전달한다.
이 신호를 받은 시상하부는 코르티솔과 아드레날린 같은 스트레스 호르몬을 분비하여 호흡과 심장 박동을 빠르게 하고 신체를 위험에 맞서거나 도망치기에 알맞은 상태로 만든다. 이후 이상한 소리를 듣게 되면 생존에 중대한 위협을 느껴 반사적으로 도망을 친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뇌에서 벌어지는 불안 회로의 활성화 방식이며, 이는 이성적 판단을 거치지 않은 즉각적인 반응이다. 뇌에 각인된 불안, 공포 회로에 이성적 판단이 개입될 경우 생존 가능성은 희박해진다. 그 때문에 인간은 이런 회로에 대해 이성적 판단을 우회하는 즉각적인 방향으로 진화해왔다. 그러나 원시시대처럼 약육강식으로 생존을 위협받지 않는 현대 사회에서는 이성적 판단을 우회하는 과도한 불안이 정신 장애의 원인이 된다.
현대인의 불안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공포와 불안을 구별해야 될 필요성이 있다. 공포와 불안은 인간에게 같은 신체 반응을 일으키지만, 위험에 대한 실존 여부에서 그 차이점이 있다. 공포는 실제로 존재하는 진짜 위험에 대한 반응이다. 하지만 불안은 일어날 것만 같은 일, 예측하지 못하거나 통제하지 못하는 사건에 대한 염려이다. 즉 서늘한 촉감과 비릿한 악취 후 맹수가 나타나는 것이 공포이다. 불안은 아직 맹수가 나타나지 않았는데 같은 외부 조건에 의해 맹수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감정이 불안이다. 그리고 많은 현대인을 고통 속으로 몰아넣고 있는 감정은 실재하는 위험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 일어날 것 같거나 통제하지 못한다고 느끼는 일에 대한 불안 회로의 활성화 방식이다.
지금까지 언급한 불안의 발생 기전은 뇌 과학의 관점에서 설명한 것이다. 불안의 기전을 편도체와 시상하부, 해마 사이의 상호 작용으로 접근하는 것은 분명 의미가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인간의 뇌는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뇌과학에서처럼 어떤 부분의 활성화 또는 상호 작용에 의해서만 불안이 발생한다고 단정 지어 설명하기에는 뇌의 기능과 인간이란 생명체가 너무 복잡하게 되어있다. 그런데도 불안의 발생 기전을 뇌 과학으로 설명한 이유는 실존에 대한 이해 없이 발생 근원을 찾아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또한 생존을 위한 인간의 진화과정에서 불안의 감정을 가지게 된 것이 필연적이고 당연하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불안을 느끼는 게 잘못된 것이 아니다. 불안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생존할 수 있었고 삶에서 닥쳐오는 많은 어려운 일들을 헤쳐 나올 수 있었다. 중요한 것은 불안이 내 삶에 파괴적인 영향을 미치기 시작할 때 이를 알아차릴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다.
우리의 뇌는 원시시대의 삶에 최적화되어 있다. 즉 그때 이후, 현대 문명사회에 맞게 추가적인 진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라는 것이다. 이 말의 의미는 위협의 대상이 아님에도 그것을 위험으로 인식하며 불안 회로를 가동시켜 내 몸을 준비시킨다는 말이다. 심장 박동을 빠르게 하여 근육을 투쟁 상태로 전환하고, 최악의 상황을 생각하며 이를 방어하기 위한 준비를 한다. 원시시대에는 이렇게 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현대 사회는 그렇지 않다. 시험을 망쳤다고 해서 내가 죽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세미나를 죽 쒔다면 상사에게 한소리 들을망정 죽고 사는 것에는 관계가 없다. 그러나 우리의 뇌는 이를 구분하지 못한다. 물론 이것이 좋은 점도 있다. 이런 불안이 있기 때문에 미리 시험공부를 하고 탁월한 업무 실적도 나올 수가 있다.
하지만 현대 사회는 경쟁의 시대이다. 남들보다 뛰어난 성과를 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도태된다. 그렇기에 강한 스트레스와 압박, 그에 따른 긴장감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랜 기간 지속될 가능성이 크다. 또한 이 과정에서 일을 그르친 경험이 있다면 그것을 만회하기 위한 불안은 더욱 커진다. 결국 이런 시간에 오래 노출될수록 불안장애로 발전할 가능성이 크다.
또한 불안에 반응하는 정도의 차이는 사람의 기질에 달려 있기도 하다. 여기서 말하는 기질이란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특성,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나만의 타고난 특성과 측면들을 말한다. 기질이 유전적 요인에 의한 것인지, 혹은 유전적 요인에 환경적 요소가 결합하여 만들어지는 것인지 명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어떤 요인에 의해 영향을 받든 기질적으로 불안에 대한 민감도가 높은 사람이라면 정상적인 불안의 범주를 넘어 삶에 파괴적인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나는 오랫동안 끊임없는 불안 속에서 고통받고 있다. 이런 지난한 시간 동안 가장 힘들었던 것은 불안에 의한 신체 반응보다 편안하게 쉴 수 있는 시간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스트레스 상황에 놓여 있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흘러 들어오는 부정적인 생각과 현실이 되지 않는 최악의 공상은 언제나 나를 긴장시켰고 수면을 방해했다. 그래서 휴일에도 쉴 수가 없었다. 이렇게 항상 긴장 속에서 살아가는 게 가장 힘들었다.
의식의 고리를 따라 십수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언제나 불안에 떨고 있는 내가 비친다. 예쁨만 받고 살아도 부족할 나이에 내 눈에 비친 꼬맹이는 집에 돌아가면 부모님이 싸우고 있지는 않을지, 예전처럼 집안 살림이 박살 난 채 나뒹굴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하며 땅만 보다 집으로 향한다. 그리고 제발 아무 일이 없기를 마음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이 기억 속에 연결된 또 다른 나는 어둠 속에 양팔로 두 무릎을 감싸 안고 있다. 아버지를 피해 엄마, 누이들과 함께 옆집에 숨었다. 밖에서는 아버지가 술에 취한 채 엄마를 찾아다니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린다. 얼굴을 무릎에 파묻고 절대 들키면 안 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얼마간 시간이 지나자 소란스러웠던 밖이 잠잠해지고 옆에 있던 누이들도 하나둘씩 잠에 빠져들기 시작한다. 울음소리에 묻힌, 이제 그만 자라는 엄마의 목소리에 몸을 뉘었지만 잠이 올 리 만무하다. 어느덧 조금씩 어둠이 가시고 날이 밝아오는데 오늘 학교에 갈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선다. 그리고 그날의 기억은 여기서 끝이 난다.
바닥에 핏방울이 응어리져 있다. 하얀색 도화지에 빨간색 물감을 흩뿌려 둔 듯 바닥에 낭자한 피가 기억에 선명하다. 선홍빛 피에 대한 기억이 너무 강렬하여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날카롭게 날이 선채로 깨진 맥주잔을 따라 선혈이 흐르고 어디서 들리는지 모를 나의 울음소리가 너무 크다. 그 울음소리를 따라가면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작은 꼬마 아이가 방치된 채 그렇게 울고만 있다. 어제 일처럼 기억이 선명하다. 적어도 40년의 세월이 흐른 것 같은데 어떤 기억의 조각은 깨진 유리처럼 너무 세세해 지금 일어난 일처럼 느껴진다. 이렇게 의식과 무의식 속에 켜켜이 쌓인 슬픔의 그림자는 세를 더해 짙은 어둠이 되고 가슴속의 끊어지지 않는 올가미가 되어 나를 짙은 어둠 속으로 끌어내렸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밝고 환한 빛을 본 적이 없기에 세상 전부가 흑빛으로만 되어 있는 줄 알았다. 그래서 환한 미소를 찡그림으로 봤고 청명한 가을 하늘을 비바람이 몰아치기 직전의 먹구름으로 봤다. 객관적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왜곡된 기전으로 인식했기에 모든 것에 부정적이었다. 과거가 부정적이었으니 정해진 게 없는 불확실한 미래도 부정적일 거라고 생각했다. 인생을 사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의 연속이고 트라우마였으니, 나의 뇌는 생존하기 위한 회피 반응만을 만들어왔을 것이다. 이렇게 형성된 부정 편향과 회피 반응은 불안 민감도를 최대로 올려놨을 것이고 결국 39살 청년의 마음을 진득하게 녹여내 삶을 파괴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부모님의 잘못도 아니며 나의 잘못도 아니다. 주어진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나의 뇌가 이렇게 성장했을 뿐이다. 그래서 기질적으로 불안에 대한 민감도가 높은 것뿐이다. 어릴 적에는 이런 행동이 생존에 유리했을지 몰라도 지금은 그렇지 않다. 과거를 바꿀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렇다고 끔찍한 지옥 속에 마냥 이대로 살아갈 수만은 없다.
내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나 자신뿐이다.
그래서 오늘도 요가와 명상을 하고 알아차림을 연습하고 또 연습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