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시작된 인연. 그 우연이 필연이라고 느껴질때 사랑에 빠지는게 아닌지. 인생에 불현듯 나타난 이 낯설고 신비로운감정은 설렘을 증폭시킨다. 삶에 활기를 더한다. 긍정적인 부분이 분명히 있지만 한편으로는 괴로운 면도 없지않아 있다. 모든 것은 내가 그의 인생으로 들어가고, 내 인생에 그가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시작된다. 그동안 실패한 인연들을 생각한다. 이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그들 모두를 떠나보낸 건 아닌지 하면서. 온갖 기대를 품는다. 하루에도 시나리오를 수백번 고치면서. 이 모든게 운명이 아닐까 하면서.
비극은 그때부터 시작된다. 몇 십년간 다르게 살아온 인생이 서로 맞닿게 되면 접촉면에는 지글지글한 상처가 난다. 이미 사랑에 눈이 멀어 보이지 않는다. 애초에 보지 않으려 하는 걸수도 있지만. 모든 서사에 이 관계가 운명이라는 전제조건을 넣는다. 운명이라는 게 있든 없든 중요하지 않다. 정말 중요한건 우리가 '운명'이라는 걸 내세워 그 뒤로 숨는 것이다. 모든 이유를 '운명'으로 설명하면서 수동적으로 대하게 된다. 이 사람과 내가 깊어진 이유가 일종의 필연적인 숙제였다고 생각이 들면 그때부터 생각을 덜하게 된다. 적극적으로 행동하기 보다 뭐든 운명으로 퉁치면 되니까.
그 사람과 내가 함께할 운명이었다는 건 죽기 전까지는 모른다. 한 사람과 평생을 함께 할 수도 있지만 한 번 혹은 여러번 헤어지거나 이혼을 했어도 다시 이어지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사람일은 모른다 했다. 애초에 신이 아닌이상 우리의 미래를 알 길은 없다. 그런데도 여전히 기대하며 운명이라 쉽게 확신한다. 이유는 단순하다. '운명'이라는 기대는 감정적,사고적 소모를 막기 때문이다. 혹시나 하는 변수를 미리 마음으로 차단하는 것이다. 그러다 자신의 생각이 사실이 아니었다고 깨달으면 또 실망한다. 즉, 운명은 커녕 어떠한 임팩트도 주지 못한 관계에 불과했다는 사실에 자책을 한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나타나는 큰 특징이 있다. 일단, 그 사람에 대해 알고싶어진다. 그리고 아껴주려 노력한다. 운명론의 문제는 알려고 하기 보다 안다고 섣불리 확언하게 된다는 것에 있으며, 노력하기 보다 노력을 요구하는데 있다. 예를들면, '어차피 이 사람과 나는 운명이니까 내가 어떻게 대해도 내 곁을 떠나지 않아야해.' 라든지. '있는 그대로 내 모습을 사랑해주지 않으니까 우리는 운명이 아니었던거야.'와 같은 방식이 그러하다. 그래서 운명이 있다고 믿는 것보다 없다고 생각하는게 관계진전에 더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려 한다. 실제로 있느냐 없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운명과 상관없이 사랑한다면, 지금 이 순간에 살아야 한다.
사랑은 딱딱하고 굳어 있는 물체가 아니다. 따뜻한 감정이며 유동적인 매개체다. 물처럼 자유롭게 흘러가야 비로서 살아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모든 걸 운명이라는 감옥에 가두지는 말아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