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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소 Sep 24. 2023

연인은 부모의 피상적 매개체 (2)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맛을 알고, 사랑도 받아본 사람이 줄 수 있다. 그동안 허투로 사랑을 했다.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줄 알았다. 이제는 안다. 그 때는 그저 사랑받고 싶었던 어린아이에 불과했다는 것을. 애시당초 사랑을 줄 수 있는 성숙한 인격체가 아니었다. 자신도 사랑할 줄 모르는 데 누구를 사랑 할 수 있겠느냐 말인가. "나중에 다시 만나더라도 원래부터 몰랐던 사람들 처럼 그냥 지나쳤으면 좋겠어."라는 말을 전 남자친구에게 들을 당시에는 마치 심장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단순히 그를 나를 배신한 나쁜놈으로 몰아갔지만, 이제와 생각해보면 조금 다른 시선이 보인다. 이런게 바로 시차가 주는 풍요로움 일 것이다.


 도대체 사랑한다는 게 뭘까. 사전에는 '어떤 사람이나 존재를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다'라고 나와있다. 방식은 마다 다르겠지만 어쨌든 사람을 아끼고 귀중히 여긴다는 핵심이지 않을까 싶다. 사랑을 하면 그를 믿고 기꺼의 나를 내어주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어떻게 하면 저 사람을 더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된다. 그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 되고, 그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 된다. 내 자신과 그를 구별하기 힘들정도로 비슷한 사람으로 느끼게 된다. 연인과의 갈등은 대체적으로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애인을 자신의 연속선상에서 놓는 지점에서부터. 


 부모와 있었던 과거의 부정적인 기억도 갈등의 재료이다. 무의식은 어떻게든 변형시켜 몇 십년도 더 지난 일을 지금 이 상황에 대입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다시는 겪고싶지 않은 끔찍한 기억이니까 최대한 피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의도와 다르게 나도 모르는 사이 상대방을 비난하는 화살로 변하기도 한다. 심지어 그에게 상처주는 일을 타당하게 느끼기도 한다. 그러니 기필코 온전히 삶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사랑도 제대로 줄 수있다. 불행의 도피처로 사랑을 택하는 것 만큼 지옥같은 일은 없을 것이다. 본인이 사랑받을 사람이라는 확신을 가져보지 못했다면, 누군가를 사랑하기로 결정한 선택에도 역시나 끊임없는 의문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러니 자신부터 제대로 사랑해라. 그 누구도 아닌 자신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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