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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살아있어 줘서 고마워

내 삶을 채웠던 편애의 무게

by 알쏭달쏭


어릴 적부터 아빠는 삼 남매 중 유독 둘째 딸인 나만 편애하셨다. 그것은 단순한 편애가 아니라, 딸을 세상 모든 고난으로부터 보호하려는 숭고하고 편협한 사랑이었다.

나는 그런 편파적인 사랑이 좋았다. 넘치고도 넘치는 사랑을 받으며 나 또한 아빠가 세상에서 제일 좋았다. 나는 아빠의 모습을 가장 많이 닮았다. 사람을 좋아하고, 착하고, 우스갯소리하며, 웃는 주름이 많은 인상이 나에게 그대로 복사된 듯했다.


아빠가 뇌출혈로 쓰러지신 후, 나는 후회를 남기지 않으려 발버둥 쳤다. 아빠를 만나면 꼭 안아주었고,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들었던 푸석한 손톱도 깎아드리고, 발도 씻어드렸다. 우리는 시간을 빚 내 쓰듯 여행을 떠났고, 나는 아빠의 모든 순간을 영상에 담았다. 그리고 아빠의 눈을 마주치며 진심을 담아 이 말을 자주 했다.


"아빠, 살아있어 줘서 고마워."





둘째 딸을 낳은 지 겨우 두 달 되었을 때, 엄마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차분하면서 두려움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아무래도 아빠 보러 와야겠다. "


"아빠 많이 안 좋아? 내가 주말에 꼭 갈게"


"그럼 늦을 것 같은 데. 내일 올 수 있겠어?"

"아 알겠어. 그럼 내일 갈게."

'늦을 것 같다'는 그 다섯 글자가 벼락처럼 가슴을 쳤다. 전화를 끊자마자 단단한 돌덩이가 가슴에 들어앉아 나를 짓눌렀다. 아니야. 아니겠지. 아닐 것이다. 연약한 희망과 단단한 현실 부정 사이에서 영혼이 갈가리 찢기는 듯했다.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오래 사는 것보다 어떻게 살았느냐가 중요한 거다. 아빠가 아픈 기간 동안 우리와 많은 시간을 보냈고, 충분히 많이 안아주었고, 많이 표현했으니까 우리 아빠는 행복했을 거야.'


하지만 그렇더라도 오래 살아주면 안 되나. 힘들더라도 우리 곁에 더 오래 있어주면 안 될까.






코로나여파로 병원 출입이 엄격히 금지되었지만, 임종 직전에 예외적으로 마지막 인사를 허용해 주었다. '임종'이라는 서늘한 단어가 거슬렸지만, 아빠를 볼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남편과 나는 마스크를 하고 들어갔다. 누워있는 아빠는 초췌한 얼굴로 힘겹게 숨을 쉬고 계셨다. 어쩌면 마지막일 이 모습에, 나는 아빠에게 위안이라도 드리고 싶었다. 그놈의 코로나 때문에 얼굴도 제대로 못 보여준다는 슬픔에, 나는 살짝 마스크를 내려 아빠에게 억지로라도 더 환한 웃음을 보여드렸다.


사위는 한 번도 보지 않고 , 아빠는 오직 나만 뚫어지게, 애절하게 보셨다. 아빠의 눈빛은 '우리 딸 왔냐'와 '가지 마라'는 수많은 말을 담고 있었다. 얼마 전 태어난 둘째 딸이 나랑 똑같이 생겼는데, 그 손녀는 아직 따뜻하게 안아보지도 못하셨는데... 아빠의 아쉬움이 느껴져 아기 영상을 보여드렸다.

아빠는 희미하게 움직이는 영상 속 아기를 빤히, 그리고 또 빤히 보셨다.


그리고 이내, 모든 회한과 사랑, 그리고 작별의 고통을 대신하듯, 눈물 한 방울을 흘리셨다. 나는 아빠의 눈물을 닦아주고 뺨에 입 맞추며 속삭였다.


"아빠 사랑해."




사실 그게 마지막 대면일 줄 몰랐다. 늘 안 좋아졌다가도 다시 기적처럼 좋아지셨으니까, 요양원에 이동해서도 몇 개월은 더 사실 거라고, 비이성적인 희망에 매달려 현실을 부정하고 있었다. 생각하면 너무 슬퍼서 '돌아가실 수도 있다는 자각'자체를 할 수 없었다. 나는 딸이었고, 아빠의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다음날 새벽, 아빠는 돌아가셨고 장례식이 시작되었다.


장례식 기간 동안에는 오히려 담담했다. 멍하니 해야 할 일을 기계처럼 하기 시작했다. 중요한 건 남동생이 결정하며 진행하고 있었다.


'이젠 아빠 안 아프겠지? 고통받는 것보다 편안해지시는 게 아빠 입장에서는 나을 수도 있겠다.'


라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많은 분들이 위로해 주러 오셨고, 감사함과 미안함에 마음은 무거웠지만, 생각보다 눈물이 펑펑 나오진 않았다. 하지만 잠은 단 한순간도 편히 잘 수 없었다.

후회를 남기지 않기 위해 평소에 표현을 많이 하려고 노력했지만, 그리움은 어쩔 수 없었다. 우리 둘째 딸이라도 한번 안아보고 가시지. 제발 조금만, 조금만 더 사시지.





아무렇지 않은 듯, 어제도 본 것처럼 아빠가 꿈에 나와 건강한 모습으로 활짝 웃으며 식사하시는 걸 보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먼 곳 어딘가에 여행을 가셨다고 생각해 봐. 아빠가 동남아 그 어디쯤에서 삶을 즐긴다고 생각하면 좀 낫더라."


사촌언니가 장례식에서 건넨 이 짧은 문장은, 슬픔을 통과하는 가장 따뜻한 위로가 되었다.


아빠가 돌아가신 지 3년이 지났다. 외할아버지를 닮아 눈썹이 예쁘게 내려간 우리 둘째 딸을 키우면서 아빠 생각이 더 깊어진다. 아빠에게 받은 가장 크고 편파적인 사랑을, 이제는 내 딸에게 돌려주고 있다.


보고 싶다. 나의 영원한 사랑. 우리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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