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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찹쌀경단 Oct 25. 2022

넌 참 일반적이지 않아

P은행 지현서 계장의 이야기 09

유난히 눈이 일찍 떠진 아침, 현서는 평소보다 여유 있게 출근했다. 이런 날은 왠지 꼭 지점 앞 카페에 들러 커피 한 잔을 테이크아웃해서 출근하고 싶어 진다. 커피를 즐겨마시는 타입이 아닌데도 그냥 카페에 가는 기분 자체가 상당히 좋다. 뭐랄까. 이게 직장인이지 싶은 기분. 은행을 가고 싶고, 안 가고 싶고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쓸모 있는’ 사회인임을 증명해주는 기분.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모금과 그 안에 담긴 얼음의 달그락거리는 소리는 하루를 상쾌하게 시작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에너지를 준다.


카페에 들어가자 민경이 테이블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민경아, 일찍 왔네.”

“아, 좋은 아침! 오늘 시간 좀 여유 있는데 같이 커피 마시다가 들어가자.”


현서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손에 들고 민경 앞자리에 앉았다.


“민경아, 나 결혼할 것 같아.”

“뭐어? 남자 친구 있는 줄도 몰랐어. 하긴, 왠지 있을 것 같았지만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없었네. 축하해! 언제쯤 하는데?”

“이제 식장 보러 다니려고. 식장 예약이 가능한 날로 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

“남자 친구는 어떤 분이야? 몇 살이고? 사진 보여줘 봐.”


현서는 민경에게 사진을 보여주며 처음으로 준호에 대해 말했다. 회사에서 사적인 이야기는 굳이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아 그동안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상견례도 마친 시점이라 동갑내기 민경에게 먼저 이야기를 꺼낸 것이었다.


“K전자라니 멋진데. 훈훈하시고. 너랑 잘 어울려. 얼마 전에 K전자 성과급 기사 났던데! 능력 있는 분이시네.”

“일이 많아서 바쁜가 봐. 야근도 많고. 결혼하고 나서 은행 다니기 너무 힘들면 그만두고 남자 친구 내조나 열심히 할까 싶은 생각도 들어.”

“아, 정말? 근데 그만두기엔 좀 아깝지 않아?”

“아니, 난 전혀 아까운 거 없어. 하하. 내조 잘하고, 애기 생기면 아기 잘 키우고 가정 돌보는 게 가족을 위해 더 중요할 것 같아. 난 현모양처가 꿈이야.”


거짓말이다. 사실 현모양처가 꿈은 아니었지만 순간적으로 그렇게 말했다. 말하다 보니 딱히 은행에서 이루고자 하는 바가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노동력을 제공하는 것이 훨씬 가치 있지 않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어차피 텔러직이라 과장, 차장, 지점장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올라가 봤자 선임 텔러인데, 거창한 꿈을 꿀 것도 없었다. 민경이 넌 나와는 다르잖아.


“물론 그것도 중요하긴 하지만... 난 아직 결혼 생각이 없어서 그런지 내 일이 더 중요하단 생각이 들어. 그리고 현서 너의 남자 친구는 그러진 않겠지만, 일 그만두면 경제활동 안 하는 와이프한테 돈 쓰는 걸로 눈치 주는 남자도 있을 수 있잖아. 요즘은 옛날이랑 달라서 그럴 수도 있을 거 같아. 뭐라도 사고 싶은데 용돈을 남편한테 받아써야 하면... 으, 싫을 것 같은데. 자존심 상해.”


민경이 어깨를 움츠리며 웃었다.


“에이, 그런 남자 안 만나면 되지.”


민경이 얘는 별 생각을 다 하네. 이제껏 연애하면서 만난 남자들은 전부 나에게 더 해주고 싶어 했고, 베풀고 싶어 했는데. 그런 남자를 만날 거란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데. 외벌이가 되면 어차피 와이프가 집안일하고 가정을 주로 챙기면서 남편이 일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도울 텐데, 그 노고에 고마움을 모르는 뻔뻔하고 속 좁은 남자는 안 만나면 되는 거 아닌가? 

그리고 준호는 그런 스타일이 아닐 거라고 현서는 생각했다.


“결혼하고 바로 그만두겠다는 건 아니고,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거야. 작년까지만 해도 너무 힘들어서 결혼만 하면 그만두겠다고 다짐했었거든. 요즘은 몸이 적응한 건지 좀 할 만해서 그런 생각은 쑥 들어가긴 했어. 근데 혹시 아기 가지면 바로 휴직 들어가야 할 수도 있을 것 같긴 해.”

“결혼하고 아기 바로 가질 생각이야?”

“응. 남자 친구도 아기는 바로 가졌으면 하더라고.”

“난 요즘 드는 생각이, 결혼하더라도 아기는 늦게 갖거나 아예 없어도 괜찮지 않을까 싶어.”

“응? 왜?”

“하고 싶은 것도 많고, 여행 가고 싶은 곳도 많은데 아기가 생기면 힘들어지잖아. 그래서 최대한 미련 안 남게 여행도 열심히 다니고 나중에 아기를 갖던지, 아님 요즘은 딩크족도 많으니까 결혼하고 부부만 둘이서 재미있게 살아도 좋을 것 같아.”

“난 결혼하고 아기를 안 갖는다는 건 생각도 안 해봤어. 아기는 당연히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왔는데.”


민경이는 나랑 동갑인데도 가끔 보면 일반적이지 않단 말이야. 결혼을 하면 아기를 낳고 가정을 꾸리는 게 당연한 절차 아닌가? 무슨 하고 싶은 게 그리 많다는 걸까? 참 신기해. 혼자 여행도 잘 다니더니 또 어딜 가고 싶어서 저러는지. 가족보다 더 중요한 게 있을까?


“뭐가 하고 싶은데? 가족보다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뭔지 궁금해.”

“가족보다 중요하다기보단 뭐랄까 여러 가지 하고 싶은 게 많아. 일단 새로운 분야에 도전도 해보고 싶고, 내 커리어도 끊기지 않았으면 좋겠고, 요즘 스페인어 학원 다니고 있는데 스페인어 공부도 계속하고 싶고, 스페인어 좀 잘하게 되면 남미 여행을 가고 싶은데 아기 태어나면 거의 10년간은 해외여행 못 간다고 하더라고. 그런 생각 하니까 자녀 없이 즐기면서 사는 것도 좋겠다 싶어서. 나중에 생각이 어떻게 바뀔지는 모르지만 말이야.”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 영어 잘하고, 스페인어까지 공부하는 민경의 모습은 멋있어 보이긴 했지만 그게 내 핏줄을 낳아 기르는 것보다 중요한가? 어차피 우리는 한국인이고 한국에서 살 건데. 남미는 도대체 왜 가겠다는 걸까? 치안도 안 좋고 멀어서 한 번에 가는 비행기도 없을 텐데. 아이들 걸어 다니기 시작하면 가까운 일본이나 괌 같은 데로 여행 가면 되지.


민경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머릿속에 남는 말이 하나 있었다. 남편한테 용돈을 받아쓰는 상황. 그게 이상하다고 생각해보진 않았는데. 가정주부가 되면 당연하다고 생각해서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엄마도 결혼과 동시에 일을 그만두고 아빠한테 평생 돈을 받아서 썼으니까. 게다가 준호는 충분히 여유 있는 집 아들이잖아. 지금 매월 내 통장에 꽂히는 돈이 사라지면, 준호가 나에게 매월 그만큼을 줄 수 있을까? 내가 달라고 해야 줄까? 아니면 알아서 줄까? 물론 나도 결혼 후엔 씀씀이가 달라지겠지만, 옷이나 가방 같은 거 산다고 하면 준호가 눈치를 줄까? 딱히 눈치 줄 것 같진 않은데 내 돈으로 사는 게 맘 편하긴 하겠지? 민경이는 왜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 갑자기 마음을 심란하게 만드는 거야.


“시간 다 됐다. 가자.”


현서는 먹다 남은 커피를 챙겨 일어나 민경과 함께 지점으로 걸어갔다. 결혼하더라도 은행 안 그만두고 계속 다니는 게 나을까? 은행 안으로 걸어가는 현서의 머릿속이 싱숭생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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