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부메랑
1990년 겨울
남의 뒷담화를 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나의 인격이 성숙하다거나 고귀해서 그런 건 아니다. 다만 무슨 징크스처럼 나의 비난이, 심지어 입 밖으로 내뱉은 것도 아니고 마음으로만 되뇌어도, 부메랑이 되어 내게 돌아와 콕 박히는 아픔이 두렵기 때문이다.
나와 같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학원에서 재수하고 이번에 당당히 서울대 치대에 합격한 민영이를 축하해 줄 겸, 민영이네 집에 놀러 갔다. 얘기 도중에 민영이가 토플 교재와 카세트테이프 여러 개가 들어있는 세트를 보여주었다. 서울대에서 신입생 소집을 마치고 나오는데, 학교 정문 앞에서 기다리던 아저씨와 말을 섞은 결과 할부로 사 왔다는 것이다. 교재 내용은 제대로 살펴보지는 않았지만, 종이 재질도 누렇고 그다지 믿음이 안 가는 교재로 보였다.
그래도 갓 대학을 들어간 아이가 할부를 내면서 그 교재로 영어공부를 한다고 하니, 마음속으론,
‘미친년!’하고 되뇌었다.
정확하게 영어공부를 한다는 것이 미친년인지, 길거리에서 잡상인한테 허접한 교재를 마지못해 사 와서 미친년이라고 속으로 삭인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여간 대학에 합격하고 저지른 짓이라, 다행히 엄마에게 크게 혼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며칠 앞으로 다가온 후기 시험을 준비하느라 선착순으로 입실이 가능한 정독 독서실에 새벽에 가서 밤 10시 문을 닫을 때 집에 가려고 나왔다. 그날도 집을 향해 독서실에서 나오는데 어떤 남자분이,
“저, 학생, 여기 간단한 설문조사를 하고 있는데 시간 있으면 한 5분만 응답해 주고 갈래요?” 하길래, 그러마고 했더니, 그러면 옆에 세워 둔 봉고차에 앉아서 설문을 해달라는 것이다.
1시간가량 시간이 지나서 봉고차에서 풀려난 나의 손에는 007 가방 사이즈에 교재와 카세트테이프가 담긴 ‘태성 토플’이 들려져 있었다. 1년인가 할부로! 집으로 곧장 갈 수가 없었다. 공중전화로 민영이에게 전화를 걸어,
“야, 나도 너 산거 산거 같아. 나 이거 집에 못 가져갈 것 같거든? 이거 너네 집에 뒀다가, 나중에 후기 합격하면 가져가면 안 되냐?”
나의 다급한 소리에 민영이가 그러라고 해서, 집으로 가는 대신 민영이네 집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늦은 시각이라 민영이네 집에 들어가는 대신 007 가방만 민영이에게 건네주며, 고맙다고 했더니, 민영이 어머니가 그러셨단다,
“이년이나 저년이나 똑같다!”
나는 그런 욕을 먹어도 싸다. 아니 누군가 그런 명쾌한 지적을 해주고 나니, 내 마음도 후련해졌다. 대학에 합격한 민영인 그나마 나은 년이다.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꼭 대학에 합격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대학에 합격하지 못하면 굳이 토플을 공부할 필요가 없는데, 또 합격을 해도 유학을 고려해 본 적도 없는데, 내 손에 쥐어진 토플교재가 꼬리표처럼 나를 따라다녔다. 얼마 뒤, 대학에 합격한 순수한 기쁨보다는 이제 나의 꼬리표를 뒤에서 끌어다 엄마 앞에 내놓아도 ‘내가 아르바이트해서 갚아 나갈게!’ 하면 덜 혼날 수도 있겠다는 안도감이 더 컸다.
새 학년이 시작된 3월 중순경, 아침방송에서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무분별한 교재판매가 극성이라며, 미성년자이면서 강압에 의해 구매한 경우라면, 조기해약으로 인한 위약금을 지불할 필요 없이 반품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드디어 내가 저 무지막지한 강매의 피해자라고 커밍아웃할 수 있었다.
작은언니와 함께 교재 판매사 사무실까지 찾아갔다. 내가 30분 이상 지나서도 나오지 않으면 경찰에 신고하라고 언니에게 일러주고, 떨리는 마음으로 애물단지 007 가방을 들고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동안 나의 마음고생을 ‘이때다!’ 싶어 판매원보다는 직위가 높을 것 같은 담당자에게,
“어떻게 그럴 수 있나요? “
“학생이 돈이 어딨 어요?” 그때 판매원한테 반박하고 싶었지만 마음으로만 되뇌었던 걸 토해내었다.
담당자의 변은 이러했다.
“사무실에 앉아서 판매원이 어디서 어떠한 방법으로 교재를 팔았는지는 알 길이 없다!”
“아니, 그게 말이 되는가?”
“그럼 어쩌겠는가?”
“나 참! 그동안 납입한 교재비는 환불 가능한가요?”
“그건 안됩니다!”
“나 진짜, 이거 한 번도 거들떠도 안 봤어요!”
“그건 제가 관여할 바가 아니죠.”
삼십 분이 되기도 전에 사무실 문을 열고 두 손을 탈탈 털어 빈손임을 확인했다. 아, 그 승리감이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