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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십에 읽는 흑역사

#2. 모태 솔로의 탄생

by Peregrine

1989년 여름


나와 함께 재수를 하였고, 대학에 들어가서는 함께 영어회화 동아리에서 활동하던 연주가 남자아이들이 나에 대해 하는 말을 전해주었다.


“너는 빈틈이 없대! “


한 번은 대학 동기인 정은이가 나에게 그랬었다.


“네가 오히려 눈이 높아. 신이는 자기가 마음에 안 들어도 남자가 만나자고 하면 만나. 너는 네 맘에 안 들면 아예 만나질 않잖아.”


빈틈없이 눈이 높은 나? 나는 모태 솔로인데...


내가 모태 솔로가 된 배경에는 뼈아픈 과거가 있었다.


대학입학 사정결과 임학과에 합격하였는데, 진짜 가기 싫었다. 무엇보다도 점수에 맞춰서 일단 지원한 것이었는데, 막상 학교에 가려니, 그것이 뭐 하는 학과인고? 아는 게 없다. 게다가 이과생이면서 과감하게 수학을 포기한 내가 대학 가서도 이과 공부를 해야 한다는 사실이 까마득하였다. 사실 임학과도 이과이면서도 수학을 가장 적게 할 것 같은 학과이지 않을까 하는 근거 없는 기대를 가지고 지원하였다. 만약 내 기대가 잘못된 것이라면? 이미 2년 동안 이과에 몸 담으며 충분히 차고 넘치는 고역을 치른 뒤였다. 그냥 다니느냐 재수를 하여 문과생으로 인생 경로를 바꾸느냐? 미련 없이 재수를 선택했다.


재수를 선택하면서, 재수학원이 남녀 합반일 거란 생각을 못했다. 나는 초등학교는 남녀 합반이었지만, 오래되어서 기억에 없고, 여자 중학교를 거쳐 여자 고등학교를 6년간 다녔다. 그리고 견물생심이라지만 또 역으로 눈에 안 보이면 굳이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내 눈앞에 있는 여자아이들과 노느라 남자에 대한 생각이 없던 나이기에, 눈을 돌리면 여기저기 나와 같이 다시 일 년 동안 공부해서 대학에 가려는 남학생들이 수두룩한 사실이 신기하였다.


‘쟤는 멀쩡하게 생겨 가지고, 재수하네!’하고 자동으로 갖게 되는 의문으로 이 얼굴, 저 얼굴을 흘끔흘끔 살폈다.


그중에서도 남학생 한 명이 눈에 띄었다. 항상 초록색 반팔 폴로를 입고 있었고, 쌍꺼풀이 있는 큰 눈으로 시선을 앞에 고정하고 뿔테 안경을, 오른손을 벌려 쓸어 올리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말을 해본 적은 없었지만 지적으로 보였다. 느낌이 중요하니까!


한동안 그 초록 반팔 폴로 남학생이 왼쪽 팔에 깁스를 하고 다녀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하기도 하였다.


맨 앞자리에 앉은 나와 내 짝꿍, 뒷자리에 앉는 두 친구와 항상 점심 도시락도 같이 먹었으며, 그 초록 반팔 폴로를 입고 깁스를 한 남학생에 대한 호감을 이야기하곤 하였다. 알고 보니, 그 남학생의 이름은 전명훈이었고 삼수생이었다.


나도 꿈이 있는 사람인데, 그래 올 한 해 공부 열심히 해서, 대학가자! 3월부터 4월까지 두 번의 모의고사를 볼 때까지는 그러했다. 모의고사 점수도 나쁘지 않게 나왔다. 학급 학생들과도 서로 익숙해지고, 가끔 수업시간에 누군가 던진 농담으로 웃고 친해지면서, 자연스럽게 반 단체로 봄 소풍을 가기도 하였다.


함께 다니는 친구 4명 중 나와 희라가 명훈오빠, 경수오빠와 함께 토요일 자율학습을 일찍이 마치고 호프집에서 만나자고 하였다. 희라는 명훈오빠를 좋아하는 나를 위해 함께 가주었다. 한참을 이야기하다가 명훈오빠가 전혀 맥락 없이,


“송이야, 내 여자친구 할래?”하고 물어보았다.


주위에 희라와 경수오빠도 있고 ‘혹시나 내 마음을 들켰나?’ 하는 당혹감에 “아니요!”하고 즉각적인 대답이 나와버렸다.


명훈오빠는 나의 답변에 당황했는지, 희라를 향해서

“희라야, 내 여자친구 할래?”하고 물었다.


희라도 당황했을 것이다. 내가 명훈오빠를 좋아하는 것을 잘 아는 상황이라 희라는 아무런 답변을 하지 않고 머뭇거렸다. 이런 다이내믹이 어떻게 가능한지 알 수 없지만, 그 이후로 명훈오빠와 희라는 사귀는 사이가 되었고, 자연스럽게 나와 경수오빠가 커플이 되는 분위기였다.


나는 경수오빠에게 전혀 사귈 생각이 없다고 하였고, 희라와 나의 관계는 어색함 그 자체였다.


왜 이런 상황이 벌어졌는지 이유를 몰랐다. 바로잡는다는 것도 우스웠다. 희라의 마음은 어떠한 지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희라는 다른 반으로 스스로 옮겼고, 나는 애써 두 사람의 관계에 거리를 두었다. 결국 두 사람 역시 그 해가 다 가기 전에 헤어졌지만, 나에게는 큰 트라우마로 남았다. 앞으로 절대로, 절대로 나의 마음을 친한 친구에게도 들키지 말아야지!




그 이후로 나 좋다고 오는 사람 쳐내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도 침만 흘리다 닦아내었다.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표가 나는 모양이다. 눈치를 챈 상대가 어떻게 해도 나의 반응은 아닌 척 거리를 두는 바람에 종국엔 아닌가 하고 물러났다.


그래도 그때는 끊는 전화라도 걸어서 “여보세요?”하는 수화기 너머 상대의 목소리를 듣고 끊을 수 있었다.


‘콜러 아이디’가 없던 참 좋은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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