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를 제대로 졸업하지 못한 엄마는 딸 셋을 낳고 마흔이 넘은 나이에 시험을 보러 갔다. 그런데 시험장으로 가던 도로 위에서 트럭과 승용차가 충돌하는 대형사고가 눈앞에서 펼쳐지는 바람에 엄마는 시험을 보러 가지 못했다고 한다.
엄마는 나에게 자주 그때 이야기를 하며, 이게 나의 운명인가 봐. 나는 집에만 있어야 하는 팔자인가 봐.라고 말하며 주부로써 살아가는 자신의 인생을 한탄하곤 했다.
그래서 내가 미국에서 아무도 없이 남편과 둘이서 아이를 낳고 육 개월이 되기도 전에 언니가 나를 진심으로 걱정해 주며 너도 엄마처럼 살지 말고 반드시 직장을 가지라고 했을 때 나의 마음은 철렁 내려앉아 버렸다. 나는 불안감에 휩싸였고 두려웠다. 나도 엄마처럼 집에서 애만 보는 신세가 되면 어떡하지?
나는 살면서 이루어 놓은 게 하나도 없었다. 모아둔 돈도 없고 직장을 오래 다닌 적도 없고 꿈을 이룬 적도 없다. 그리고 그렇게 무엇 하나 해내지 못하고 도망치고 방황만 하다 결국 가장 두려워하던 엄마처럼 집에서 애만 보는 신세를 맞이했다.
하지만 나는 궁금했다. 왜 셋 딸 중에서 오직 나만 엄마와 같은 운명의 수레바퀴에 엮이게 된 걸까. 왜 나는 엄마처럼 운명과 팔자를 탓하며 아무것도 해내지 못하는 인생을 살게 되었을까. 그래서 나는 가슴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왜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 건가요. 왜 제가 하고자 하는 마음을 품는 것은 다 실패로 끝나는 건가요. 왜 우리 엄마는 고작 시험을 보는 것조차 할 수 없었던 건가요. 그리고 던져진 나의 질문들은 언제나처럼 경험을 통해 답으로 떠올랐다.
미국 생활이 아직까지 익숙하지 않은 나는 남편 없이 혼자 밖을 나가는 것이 언제나 두렵다. 하지만 언제나 집 근처 공원만 가는 것이 딸 아라에게 미안해 용기를 내어 버스를 타고 아라가 좋아하는 식물원을 가기로 마음먹었다.
모든 것은 완벽했다. 몇 번이고 핸드폰을 보며 버스 도착 시간과 내려야 할 정류장을 확인했다. 그리고 버스를 기다리며 지루해할 아라에게 과자를 건넸고 걱정과 다르게 아라는 과자를 먹으며 즐겁게 버스를 기다렸다. 그런데 갑자기 과자봉지가 찢어지며 안에 있던 과자들이 땅으로 쏟아졌고 아라는 울면서 그래도 과자를 먹겠다고 짜증을 부렸다. 나는 봉지에 남어 있던 과자들을 물통 뚜껑에 담아 아라에게 건넸고 그제야 울음을 멈춘 아라는 다시 조용히 과자를 먹었다. 그리고 버스가 오는지 확인하려고 뒤를 돌아 선 순간 버스가 이미 나의 눈앞을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어쩔 줄 몰라 발을 동동 구르며 초조한 마음으로 기사님이 나를 다시 봐주기를 바랐지만 버스는 매정하게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30분마다 한 번씩 오는 버스를 다시 기다릴 수가 없어 나는 아라의 손을 잡고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겁고 힘겨웠다. 아라 때문에. 아라 때문에. 머릿속은 그 말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너 때문에 오늘 또 아무 데도 가지 못했어. 내가 얼마나 완벽하게 준비했는데.
나는 집에 가자마자 아라에게 텔레비전을 틀어주고 혼자 조용히 부엌으로 가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 내가 뭐라도 하려고 하면 꼭 무슨 일이 생겨. 내 인생은 항상 이런 식이야. 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야."
나는 공원에 가지 못해서 화가 난 것이 아니었다.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 내 인생에 화가 났다.
신은 나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다 빼앗아 갔고 겨우 아이 손잡고 공원 가는 것조차 허락해 주지 않았다. 나의 인생은 항상 이 모양 이 꼴이었다.
몇 분간 울면서 감정을 쏟아내고 다시 안정을 되찾은 나는 남편의 따뜻한 위로를 받으며 전화를 끊었는데 갑자기 아라가 나에게로 달려왔다. 그리고 아직 말이 다 트이지도 않은 아이가 조그마한 목소리로 "쏘리, 쏘리" 하고 몇 번이나 말하다가 갑자기 목소리가 찢어질 것처럼 울어댔다.
그 순간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분명 머릿속으로 아라에게 화를 냈지만 아직 어린아이에게 화를 낼 수 없어 입 밖으로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는데 엄마가 화가 났었다는 것을 아라는 어떻게 알았을까. 나는 아라를 꼭 껴안으며 "괜찮아. 네가 잘못한 것은 하나도 없어. 엄마가 미안해. 쏘리, 쏘리" 하고 말하며 아이의 등을 토닥여 주며 울어도 괜찮다고 말해줬다.
그리고 아라가 낮잠에 든 사이에 눈을 감고 바람 소리를 들으며 명상에 잠겼다. 그리고 그렇게 답은 왔다. 뒤엉켜 있던 감정들이 풀려나며 나에게 말했다.
내 잘못들이 아니었어. 내가 못나고 무능해서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것이 아니었어. 그런데 언제나 나는 내 탓만 했어. 내가 부족해서 할 수 없다고 말했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며 항상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어.
그랬다. 마치 버스를 놓친 게 아라 탓이 아니었듯이, 나의 인생에 실패만 존재했던 것은 내 탓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나는 자꾸 내 탓을 했다. 어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나를 마주하고 바라봐 주지 않았다.
버스가 온 순간 과자가 쏟아진 것처럼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이었을 뿐이데 오는 실패마다 다 내 탓을 하고 감정을 바라봐 주지 않으니까 같은 일들이 삶 속으로 반복적으로 나타날 수밖에는 없었다.
반복되는 실패 속 엉킨 감정들은 항상 나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나를 봐줘. 나를 사랑해 줘. 네 삶의 모든 것들을 사랑해 줘.
산스크리트어로 '망상'을 의미하는 마왕 '마라'가 붓다에게 나타나 그를 공격했을 때, 붓다는 마라에게 차를 내어주고 반갑게 맞이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마라여, 나는 너를 본다.
붓다는 단 한 번도 마라의 공격에 대응하거나 맞서 싸우지 않았다. 그리고 붙잡지도 밀어내지도 않았다. 그 대신에 몸속에서 고통이 느껴지는 곳을 찾아가 조용히 주의를 기울이며 망상 너머를 보았다. 붓다는 그렇게 삶이 가져다주는 모든 것에 열려 있었다.
어쩌면 삶에 같은 일이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내가 그것을 바라봐 주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내가 좋다, 나쁘다는 꼬리표를 붙여 버리고는 저항하며 무의식 속으로 던져 버렸기 때문에 갈 길을 잃은 감정들이 삶으로 계속해서 떠올랐는지도 모른다.
나는 오늘 나의 '마라'를 바라보려 한다. 그리고 반갑게 맞이하며 마치 아이를 대하듯 괜찮다고 말해주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