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류아민 Dec 14. 2024

에필로그

선우의 일기

 탈의실에서만 십 분째였다. 지훈 선생님은 옷 두 개를 들고 몸에 이리저리 대보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뒤돌아 보며 나에게 물었다.


"선우야. 이 노란 옷이 멋있어, 검은 옷이 멋있어?"


뭐가 다른 거지? 그냥 다 멋있으니까 빨리 나가자고 손을 잡아 이끌었지만 선생님은 또다시 머리를 올렸다가 내렸다가 옷을 입었다가 벗었다가 혼자 정신이 없었다.


선생님이 거짓말을 했다. 거짓말하지 말라고 배웠는데, 선생님은 왜 거짓말을 하지? 난 배가 아프지 않았다. 물론, 화장실도 가지 않았다. 거울 앞에서 꽃단장을 하고 있는 선생님을 기다렸을 뿐이다. 아마 키 큰 선생님 때문이겠지. 어린이집에서부터 그 선생님만 쳐다봤다. 어른들 참 이상하다. 좋으면 가서 좋다고 말하면 되지 대체 왜 저러는 걸까.


실내 수영장은 재미가 없었다. 놀이기구도 없고 물 뿜는 해골도 없다. 밖에 나가서 놀고 싶은데 선생님이 위험하니까 밖은 나중에 나가자고 했다. 핑계는. 키 큰 선생님이 안에 있으니까 그렇겠지. 쌍둥이들은 물을 무서워해서 밖에 안 나갈 텐데, 어떻게 하면 밖에 나갈 수 있을까. 그래, 쌍둥이들한테 밖으로 나가자고 해야지.


팔을 마구마구 휘저어 쌍둥이들을 불렀다. 밖으로 나가자고 크게 크게 손가락질을 했다. 밖으로 나가기 싫은지 정하은이 고개를 저었다. 손을 모아 간절한 마음으로 빌었다. 제발, 제발! 정하나가 고민하는듯하더니 정하은을 설득하는 것 같았다. 좋아, 지금이야!


"선생님 우리 나가요! 밖에서 놀고 싶어요. 네? 아아 선생님!"


나는 필사적으로 선생님의 다리에 매달려서 흔들어댔다. 밖은 더우니 안에 있자고 나를 번쩍 들어 안아 올렸다. 경험상 잡히면 끝이다. 선생님을 밀어내고 팔을 잡아끌었다. 다른 친구들도 나를 따라 선생님의 다리를 잡고 밖으로 당겼다. 잘한다, 잘한다!


"아아아 나가자고요! 나가요, 나가!"


선생님도 어쩔 수 없었는지 그제야 알겠다며 다리를 움직였다. 나가면서 흘깃 봤는데 쌍둥이들도 키 큰 선생님한테 나가자고 하는 것 같았다. 휴, 다행이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우리는 큰 폭포로 달려가 폭포 안에서 놀았다. 물이 머리 위로 쏟아질 땐 선생님이 우리를 안고 대신 맞았다. 선생님의 머리가 물에 젖어 미역이 되었다. 푸히히, 내 핑계 대며 거짓말하더니 꼬시다.


유수풀에서 튜브를 타고 놀고 있는데 키 큰 선생님 손을 잡고 물에서 놀고 있는 쌍둥이들이 보였다. 나는 큰소리로 쌍둥이들을 부르며 손을 흔들었지만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선생님, 우리 저기 가요."

"어디?"


선생님은 내가 말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벌떡 일어섰다. 그러고는 나와 친구들의 튜브를 꽉 잡고 걷기 시작했다. 물이 흐르는 속도보다도 더 빨랐다. 재미있긴 했지만 너무 빨리 도착해 아쉬웠다. 그 선생님이 그렇게 좋을까. 에효, 솔직하지 못한 선생님을 위해 내가 나설 차례군!


"정하은! 정하나! 물 무섭다더니 들어왔네? 같이 놀자!"


나는 친구들을 해마가 물 뿜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 우리끼리 놀 수 있는데 지훈 선생님이 따라왔다. 아까와는 다르게 다리가 엄청 무거워 보였다. 해마 입에서 나오는 물줄기를 손으로 막으며 놀고 있는데 정하나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선생님 괜찮을까?"

"왜?"

"맞아! 아까 안에서도 왕선생님한테 터져서 물에 못 들어간다고 했었어."

"뭐가 터져?"

"몰라."


하은이의 말에 골똘히 생각했다. 그러다 지난여름 가족여행에서 큰누나만 바다에 안 들어갔던 게 떠올랐다. 그때 뭐 때문이었더라... 아하!


"선생님, 선생님!"

"응?"


나는 선생님의 팔을 잡아당기며 두 손을 조그마하게 모았다. 선생님은 고개를 숙여 내 손에 귀를 가져다 댔다.


"키 큰 선생님이요. 그날인가 봐요."


'터졌다'는 게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지만, 큰누나가 '터졌다'라고 말했을 때 엄마가 '그날이야?'라며 편의점에서 이것저것 사 왔던 게 생각났다. 내 말을 들은 선생님은 나를 똑바로 바라보더니 당황스러워했다. 엄마랑 반응이 달랐다. '그날'이 안 좋은 건가? 그러다 갑자기 입고 있던 옷을 급하게 벗으며 키 큰 선생님한테로 갔다. 그렇게 돌아온 선생님 웃으며 내 머리를 마구 휘저었다.


"선우야, 고맙다."

"뭐가요?"

"알려줘서."


뭔지 모르겠지만 선생님의 기분이 좋아 보였다. 나 잘한 건가? 헤헤!


"자, 이제 놀아볼까?"


선생님은 하나와 하은이를 번쩍 안아 들고 성큼성큼 물속으로 들어갔다. 우리도 선생님을 따라 물속으로 들어갔다.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선생님의 기운이 넘쳐흘렀다. 이제 된 건가? 그렇다면 나도 신나게 놀아야지!


어린이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지훈 선생님한테 선생님을 좋아하는지 물었다. 선생님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좋아하는 친구가 있는지 물었다. 나는 당당하게 정하나를 좋아한다고 했다. 그러고 선생님의 대답을 기다렸다. 선생님은 대답대신 내 볼을 꼬집으며 웃었다.


선우의 일기 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