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이게 어른의 썸인가(1)
어쩌면 마지막 플러팅(2)
사람을 겉으로 판단하면 안 된다고 했지만 조 과장의 차를 봤을 때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겉모습과는 다르게 아담하고 하얀 경차를 타고 있었다. 난 쭈뼛거리며 다가가 뒷자리 문을 달칵, 열었다. 그러자 조 과장은 뒤를 홱 돌아보며 말했다.
"설마 뒤에 타려고요? 앞에 타요."
나도 뒤에 타는 게 예의가 아닌 건 알지만 앞자리는 퍽 부담스러웠다. 다리가 반쯤 접히는 건 그렇다 치고 조 과장의 풍채도 작지는 않아서 어깨가 닿을 만큼 거리가 가까웠다.
어색하게 웃으며 조수석의 문을 열었다. 차 안에서 달큼한 과일향이 은은하게 풍겨왔다. 차 안은 비교적 깨끗한 편이었다. 하나 특이한 게 있다면 요즘 시대에는 없는 시디플레이어가 옵션으로 달려있다는 것이었다. 꾸깃하게 몸을 접에 차에 오르니 역시나 조금만 움직여도 어깨가 닿았다. 최대한 창가로 몸을 붙이고 다리에 힘을 바짝 줬다.
"편하게 앉아요. 좀 좁나?"
꼼지락거리는 걸 봤는지 나를 힐긋거리며 말을 했다. 여태껏 마르고 아담한 여자만 태웠나 보지? 괜히 심술이 났다.
신호가 걸리고 차가 멈춰 설 때마다 콘솔박스에 무릎이 쿡쿡 부딪혔다. 원래 이렇게 가까운 건가? 의자를 좀 뒤로 밀수는 없나? 의자 밑으로 손을 넣어 더듬었다. 다행히 조절장치가 있어서 살짝 당겼다. 분명 살짝 당겼는데 드르륵! 큰소리를 내며 뒤로 확 밀렸다.
"으악!"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자 조 과장은 그런 내가 웃겼는지 입술을 꽉 물며 키득거렸다. 민망했다.
"좁았나 봐요. 말하지."
"무릎이 계속 닿아서."
"아, 혜정 씨가 키가 커서 그런가 보네. 조금만 참아요. 다왔... 어? 아, 이런."
조 과장이 당황해하며 내비게이션을 확인했다.
"옆으로 빠졌어야 했는데, 길을 잘못 들어서 좀 돌아가야겠네요."
그러곤 내비게이션 화면을 이리저리 옮겨보더니 도착지를 설정했다. 분명 출발할 때는 길을 잘 아는 것처럼 말했는데 이제 와서? 의아했지만 길을 잘못 들었으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 기다리고 있을 다른 직원들에게 연락을 하려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대표님한테는 제가 전화드릴게요. 전화가 더 빨라."
아, 그럴 수도. 대표님이 운전하는 차에서 핸드폰을 보고 있을 직원은 없었다. 차라리 도착해서 얘기하거나 전화하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혜정 씨는 말수가 원래 적어요? 상담할 땐 말 많이 하면서 평소엔 없는 것 같아."
"일은 일이니까요. 그리고 편해지면 말 많이 해요."
"뭐야. 나랑은 안 편하다는 거야?"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상사로서 말없는 부하직원을 혼내려는 건지 어색한 분위기를 어설픈 장난으로 풀려는 건지 단순 시비인 건지, 우선은 부하직원으로서 비위를 맞추기로 했다. 내 나름의 방식대로.
"편할 순 없죠, 지급이 있는데요."
"아, 직급. 그럼 직급 떼고는? 어떤데?"
무슨 대답을 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가장 나 다운대답을 하기로 했다.
"불편해요."
이보다 더 나다운 대답일순 없었다. 사람마다 다르지만 어쨌든 새로운 사람과 친해지는 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 적어도 1년 이상은 관찰하고 파악하면서 나와 성향이 맞는지를 알아본 뒤에 나를 오픈하는 편이다. 그러다 보니 활발하고 붙임성 좋은 사람은 부담스럽다. 딱 조 과장 같은 사람말이다.
"뭐가 불편한데? 나보고 불편하다고 하는 사람은 혜정 씨가 처음이야."
정말 그런 소리를 처음 들어본다는 듯 어깨를 들썩거리며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불편하다. 그런 질문을 대놓고 하는 것도 의사를 묻지 않고 반말을 하는 것도 몹시 불편했다.
내가 말을 않고 어색한 미소만 짓고 있자 조 과장은 나를 곁눈질하더니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대표님께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신호음이 울리더니 시끌시끌한 소리가 전화기너머에서 들려왔다.
-조 과장 어디야?
"다 와갑니다. 주문해 놨으니까 먼저 드시고 계세요."
-말 안 해도 우린 이미 시작했으니까 얼른 오기나 해
"하하! 예예!"
짧은 통화가 끝나고 침묵을 유지하던 조 과장이 잠시 들를 곳이 있다며 작은 베이커리가게 앞에 차를 멈춰 세웠다.
잠시 후 돌아온 조 과장의 손에는 작은 케이크상자가 들려있었다. 그리고 불현듯 스치는 설마, 하는 생각.
"설마 아니겠지?"
아니나 다를까 차에 올라탄 조 과장은 나에게 그 상자를 내밀며 세상 온화한 표정과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생일축하해요. 다 같이 있는 자리에서 주는 것보다 이렇게 주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얼떨떨했다. 조 과장의 말처럼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떠들썩하게 줬더라면 부담스럽고 쑥스러워서 여차하면 도망쳤을 수도 있다. 케이크도 화려하거나 크지 않은 딱 적당한 크기의 생크림케이크였다. 바쁜 일상에 쫓겨 나조차도 내 생일을 잊고 있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축하에 선뜻 고맙다는 말도 안 나왔다.
"무슨 케이크 좋아할지 몰라서 그냥 무난하게 생크림케이크했어요."
"... 감사합니다."
"뭐야, 감동받은 거야?"
장난기 가득한 미소로 말하는 조 과장의 가장 큰 문제는 저 가벼운 입이다. 그래도 감동받은 건 사실이니까.
"네. 저도 까먹고 있었는데."
"오, 챙겨준 보람 있네. 자 이제 갑시다!"
어째 나보다 생일을 챙겨준 사람이 더 기분 좋아 보였다. 인사관리도 겸한다고 하더니, 직원들의 생일도 직접 챙기는 모양이다.
이런저런 의미 없는 대화를 나누다 보니 금세 회식장소에 도착했다. 주차장은 따로 없는지 나를 가게 앞에 내려주고는 차를 돌려 골목 안쪽으로 들어갔다. 혼자 들어가기가 뻘쭘해 조 과장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주차를 했는지 금방 돌아왔다. 가게 앞에 서있는 날 발견한 조 과장은 두 손으로 입을 가리더니 한걸음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와! 혜정 씨 지금 나 기다린 거예요? 감동인데?"
그 말을 들은 나는 망설임 없이 뒤돌아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조 과장이 마냥 불편하다 생각했었는데 그사이 이런 장난 같은 무례를 범할 정도로 조 과장이 편해진 것 같다.
맛집이라 그러더니 가게 안은 손님들로 북적였다. 조 과장이 예약한 자리는 가게 안쪽에 위치한 비교적 조용한 단체석이었다. 이미 테이블에는 벌겋고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육회와 큼지막하게 썰린 육사시미가 반쯤 사라진 뒤였다. 하루종일 상담하느라 허기진 직원들과 1차로 온 곳이 비싼 육회집이라니. 조 과장의 지갑을 탈탈 털어볼까, 생각하다 의자옆에 가지런히 놓인 케이크 상자를 보며 남은 육회만 처리하고 2차를 가기로 했다.
2차로는 뜨끈하고 찐득한 국물이 먹고 싶다고 한 직원이 있어 곱창집으로 향했다. 1차에서 육회와 술을 조금 마신상태라 약간 알딸딸했다. 나이를 먹고 하나 는 게 있다면 주량이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소주 한병도 채 못 마시지만 술자리의 분위기를 즐길 수 있을 만큼의 주량은 되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조 과장은 수저를 각자의 자리에 놓았다. 보통 그런 건 막내가 하지만 조 과장은 마치 자신이 늘 해왔던 일인 듯 자연스러웠다. 곱창전골이 각 테이블에 놓였다. 그리고 테이블 중앙에는 노란 빛깔을 자랑하는 계란말이가 먹음직스럽게 위치했다.
아, 조 과장이 계란말이 좋아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빈 그릇에 계란말이 세 조각을 덜어 조 과장 앞에 놓았다. 조 과장에게 계란말이가 멀어 보여했던 행동이었지만 내 행동이 모두에게 충격을 준 모양이었다.
"뭐야? 달이 동쪽으로 졌어?"
"그러게. 오는 동안 이만큼이나 친해졌어?"
그동안 난 회사사람들에게 어떤 이미지였을까. 이렇게 놀랄 만큼 별로였던 사람이었을까? 하긴, 생각해 보면 이 회사에 입사하고 누군가를 챙긴 적이 없는 것 같다. 이건 뭐, 케이크에 대한 보답이랄까?
"잘 먹겠습니다!"
계란말이 세 조각을 동시에 집은 조 과장은 입을 한껏 벌려 욱여넣었다. 연기가 모락모락 나는 게 꽤 뜨거워 보였는데도 오두방정 없이 잘 먹었다. 내가 만든 계란말이는 아니지만 왠지 모르게 뿌듯했다.
곱창집에서도 술을 마셨다. 도합 거의 한 병은 마신 것 같았다. 그래도 띄엄띄엄 마셔서 그런지 크게 취한 느낌은 없었다. 뜨끈하고 기름진 음식을 먹어서인지 깔끔한 아이스크림이 당겼다. 그렇다고 혼자 나가서 사 먹을 수없으니 아쉽지만 음료에 담긴 얼음이라도 먹으려 젓가락으로 살살 얼음을 펐다. 그때 마지막잔을 입속으로 들이부은 조 과장이 3차를 가자며 지갑을 꺼냈다. 3차라니. 지금도 밤 10시가 넘어가는 시간이었다.
"3차 좋지! 노래방, 콜?"
왜, 어째서 회식의 마무리는 항상 노래방인가. 너무나 당연하게 노래방을 외치는 대표님이었다. 다들 피곤하지도 않은지 콜! 을 외치며 주섬주섬 가방을 챙겼다. 난 이대로 집에 가고 싶었다.
가게 밖으로 나와 탁한 숨을 내쉬었다. 이래저래 눈치를 보며 발을 부산스레 움직였다. 기회를 봐 대표님께 인사하고 집으로 갈 심산이었다. 때마침 계산을 마치고 나온 대표님에게로 조심히 다가갔다.
"저, 대표님."
"어, 혜정 씨! 많이 먹었어요? 듣자 하니 혜정 씨 오늘 생일이라면서요."
"네? 아, 네."
"어쩐지 조 과장이 갑작스레 회식하자 더라니. 혜정 씨도 3차 가는 거죠? 조 과장 신경 많이 쓴 것 같던데."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어떻게 무시하고 갈 수 있을까. 음식도 술도 더 이상 안 들어갈 것 같았다. 다들 배가 부른 지 여유롭게 배를 쓰다듬으며 술기운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조 과장이 안보였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그를 찾고 있을 때 하얀 비닐봉지를 짤랑거리며 발걸음도 가볍게 뛰어오고 있는 그가 보였다.
"아이스크림 드실 분!"
다들 입이 텁텁했는지 아이스크림을 반갑게 맞이했다. 나도 속으론 쾌재를 부르며 내 차례가 오길 기다렸다. 봉지가 내 앞으로 왔을 때 난 안을 들여다보며 입을 삐죽였다. 팥맛 아이스크림이 전부였다. 그때 조 과장이 내 앞으로 바닐라맛 콘 아이스크림을 불쑥 내밀었다.
"혜정 씨는 이거."
그러곤 자신은 남은 팥맛 아이스크림을 뜯어 입으로 넣었다. 뭔가 기분이 묘했다. 챙김 받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챙김이 그저 부하직원으로서의 챙김이 아닌듯했다.
노래주점으로 향하는 길. 자연스럽게 두 무리로 나뉘었다. 딱딱한 팥맛 아이스크림을 깨물어먹던 조 과장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물었다.
"혜정 씨, 노래 부르는 거 좋아해요?"
"좋아는 하는데 잘 못 불러요."
"보통 좋아하면 잘 부르던데. 난 좋아해요."
"잘 부르시나 봐요."
"못 부르진 않죠. 이따 들어봐요."
호언장담하는 사람치곤 잘하는 사람 못 봤다. 목소리가 좋은 건 인정하지만 가수가 아닌 이상 저 얼굴에 노래까지 잘 부르기란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의 노래를 들어보기 전까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