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이게 어른의 썸인가(2)

어쩌면 마지막 플러팅(3)

by 류아민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단순 미러볼 효과만이 아니었다. 지그시 감은 눈과 살짝 오른 취기로 붉어진 뺨, 가사말을 따라 움직이는 도톰한 입술, 노래를 뽐내는듯한 손동작, 그 모든 게 나를 현혹시켰다.


그의 감미로운 노래가 끝나자마자 발수갈채가 이어졌다. 그에게 눈을 뗄 수 없었던 건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나 보다.


"와, 과장님 가수신데요? 음색 미쳤다!"

"그러니까요. 그 어려운 이수 노래를 힘 하나 안 들이고 부르시네요. 다시 봤어요."


칭찬일색이었다. 나에게도 칭찬을 바라는듯한 그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무슨 자존심인지 나까지 그 칭찬의 파도에 동참하고 싶지 않았다.


"혜정 씨는 노래 안 해요? 우린 한 번씩 다 불렀는데."


대표님이 마이크를 내밀면서 말했다.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집중됐다. 아, 불편해라.


"옛날 노래밖에 몰라서..."


빠르면서도 퍼포먼스에 치중된 요즘 노래는 잘 모른다. 그나마 아는 노래도 서정적이면서도 감성적인 노래라 잘 부를 자신이 없었다. 그러다 사무실 옆자리 나이가 지긋하신 선생님이 노래를 입력하며 말했다.


"혜정 씨 이 노래 잘 부르더라. 일하면서 흥얼거리는 거 들었는데 의외였어."


의외일 거까지야. 무의식적으로 흥얼거렸던 걸 들은 모양이다. 윽고 간주가 흘러나왔고, 내 손에는 마이크가 쥐어졌다. 이 노래는 수도 없이 불렀다. 중저음의 내 음색에 잘 맞기도 했고 스트레스를 풀고 싶을 때 목청껏 내지르기에 적합한 노래였다. 그래도 다른 사람들 앞에서 부르는 건 처음이라 긴장됐다.


힘이 잔뜩 들어간 어깨를 아래로 꾹 당기고 고개를 살짝 들어 곧 나올 고음을 준비했다. 술기운 때문인지 목이 잠겨 평소처럼 목이 나오지 않았다. 고개를 살짝 꺾어 억지로 목소리를 내는 순간, 조 과장과 눈이 마주쳤다. 멍한 듯한 그의 눈동자와 살짝 벌어진 입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멍한 눈은 날 향해있었다. 그의 눈을 피하고 싶지 않았다. 노래가 끝날 때까지 그를 응시했다. 그도 내 눈을 피하지 않았다. 마치 그 공간에 나와 그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숨이 조금 가빠졌다. 심장도 불쾌하게 쿵쾅거렸다. 아, 갇힌 공간이라 취기가 더 빨리 퍼지는구나. 그래서 그런가 보다. 찰나 그와 어른의 연애를 상상했던 걸 보면 말이다.


노래가 끝나자 각자 하던 행동을 멈추고 박수를 쳤다. 내 노래에 그리 집중하고 있던 것 같지는 않지만 노래 잘한다며 다들 사탕발림이었다. 그래도 칭찬을 들으니 괜히 으쓱해졌다.


그렇게 한 시간 반정도 지났을까. 하나둘 하품을 하기 시작했다. 술도 어느 정도 먹었고 신나게 가무도 즐겼으니 피곤할만하다.


"이제 갈까요? 보자, 헥? 벌써 12시네? 다들 어떻게 가요?"


버스나 지하철은 끊겼을 시간이었다. 어쩔 수 없이 택시를 타야 했다. 대학생 때 말곤 택시를 타본 적이 없다. 조금만 서두르면 버스나 지하철을 탈 수 있는데 택시라니, 내 사전엔 없는 단어였다. 하지만 오늘은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다른 분들은 남편이 데리러 오거나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라 걸어간다고 했다. 나만 갈길이 멀구나. 부를 사람 없는 나만 서럽지 뭐.


남은 육포를 질겅질겅 씹으며 한숨을 푹 내쉬자 누군가 나의 손목을 살짝 당기며 귓속말을 했다.


"데려다줄까?"


조 과장이었다. 눈이 조금 풀려있긴 했지만 초점은 정확히 내 눈을 보고 있었다. 집도 반대인 사람이 무슨. 내 머릿속 울림과는 다르게 내 입은 아주 솔직했다.


"그럴까요?"


고마운 마음을 담아 그의 재킷을 들어 입혀줬다. 그도 자연스럽게 나의 챙김에 응했다.


쌀쌀해진 밤온도에 발을 동동 굴렀다. 조 과장은 언제 또 편의점을 다녀왔는지 숙취해소제를 각자의 손에 쥐어줬다.


"아무튼 우리 조 과장 센스가 아주!"

"그러니까요. 제가 시집만 안 갔어도 조 과장님 한번 꼬셔보는 건데! 아우 아까워라."

"어머, 유부녀가 못하는 말이 없어!"

"아하하!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런 너스레는 타고나는 거겠지? 가식적인 건 싫지만 조 과장의 너스레는 배우고 싶었다.


하나둘 각자의 짝이 나타나 데려가고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대표도 대리기사의 전화에 인사를 하고 주차장으로 달려갔다. 조 과장의 차는 육회집 옆 골목에 주차되어있어 왔던 길을 되돌아 걸어야 했다. 00시 20분, 인적이 드문 시각에 난 조 과장과 함께였다.


"노래, 잘 부르시더라고요. 놀랐어요."


어색한 공기에 내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혜정 씨도 잘하던데요. 못한다고 하더니 거짓말하고."

"못하는 거죠, 과장님에 비해서는."


낯간지러운 칭찬이 오갔다. 오랜만에 남자와 밤거리를 걸으니 기분이 몰캉해졌다. 뭐랄까, 조금 더 솔직해도 될 것 같은 그런 기분이었다.


"과장님은 연애 안 하세요?"

"음, 기회가 없네."

"너무 일만 해서 그런 거 아니고요?"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지금은 바쁘니까."

"그럼 회사 안에서 찾으면 되겠네요."


절대, 절대 나를 염두에 두고 한말은 아니었다. 일 때문에 바빠서 못한다고 하니 당연하게 회사 안에서 찾으라는 말이 나온 거였다. 그러자 조 과장이 살풋 웃으며 기지개를 켰다.


"아으, 전 사내연애 안 합니다. 공과 사는 구분해야죠."


조 과장의 말에 묘한 서운함이 밀려왔다. 그럼 지금껏 나에게 한 행동은 뭐란 말인가. 그저 상사가 아픈 손가락인 부하직원에게 따뜻한 손길 한번 내밀어준 건가. 난 또 그 손길에 멍청하게 혼자 착각해 설렜던 건가. 이 순간만큼은 창피하기보다 화가 났다.


"아. 그러시구나."


화가 났다는 걸 굳이 표현하고 싶었다. 본인에게는 그런 챙김이 자연스러운 행동일지 몰라도 나에겐 착각을 일으키는 행동이었다. 이성적인 마음이 아니라면 그런 살갑고 사랑스러운 배려는 안 했으면 좋겠다.


차가 주차되어 있는 골목에 도착하자 대리기사로 보이는 사람이 조 과장을 보고 꾸벅 인사를 했다. 조 과장도 그에게 인사를 하고는 차키를 건넸다. 그리고 당연히 앞에 탈 줄 알았던 그는 뒤좌석에 올라탔다. 순간 당황해 눈알만 굴리고 서있자 조 과장이 창문 사이로 얼굴을 내밀고는 말했다.


"뭐해요, 안 타고."

".... 제가 앞에 타요?"


검지로 나 자신을 가리키며 묻자, 그는 찬바람에 까슬해진 얼굴을 쓸어내리며 중얼거렸다. 그의 중얼거림이 내 귀에는 정확히 들렸다.


"아, 귀여워."


그러니까 저런 말! 사귈 것도 아니면서 함부로 내뱉는 설레는 말!


난 눈치를 보다 조수석 문고리를 잡았다. 그러자 조 과장이 조수석 창문으로 손을 저으며 말했다.


"뒤에 타요. 할 말 있으니까."


잠시 뜸 들이던 난, 못 이기는 척 뒷좌석에 올랐다. 대리기사는 주소를 확인 후 차를 출발시켰다.


"기사님, 노래 틀어도 될까요?"

"네. 괜찮습니다."


조 과장은 대리기사에게 양해를 구하고 노래를 틀었다. 잔잔한 발라드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찬바람에 한껏 움츠러들었던 몸이 따뜻한 내부온도와 속삭이는듯한 노랫소리에 조금씩 녹기시작했다. 그러면서 졸음이 몰려왔다.


"생일엔 가족과 보내야 되는 거 아니에요?"

"뭐, 딱히 생일 챙기는 집안이 아니라서요."

"그럼 보통 생일 때는 뭐해요."

"아무것도 안 해요. 그냥 맛있는 거 시켜 먹어요."

"그렇구나."

"네."


더 이상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그저 서로 다른 방향을 보며 무거운 숨을 내쉬었다.


"저, 손님. 말씀하신 곳까지 다 왔는데 어디서 세워드릴까요."


깜박 잠이 들었나 보다. 창밖으로 익숙한 풍경이 보였다.


"두 블록 더 가서 건널목 앞에 세워주세요."


내릴 준비를 하고 있으니 조 과장도 잠이 들었던 모양인지 낮게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집 앞까지 가지 왜."

"괜찮아요."

"아냐. 시간도 너무 늦었고 집 앞까지 가요."

"그래요, 그럼."


집 앞까지 가면 나야 편하지 뭐. 기사님께 길을 안내하고 다시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잠깐 잤다고 술이 깬 것 같았다.


아파트 단지를 끼고 한 바퀴 크게 돌았다. 사실 건널목만 건너서 뒷길로 가면 내가 사는 동이 바로 나왔는데 왠지 내리기 싫었다. 내 마음과 다르게 금세 집 앞에 도착했다. 감사인사를 하고 차에서 내리니 조 과장도 급하게 따라내렸다.


"안 내리셔도 돼요."


조 과장은 말없이 자신의 주머니에서 꿀물을 꺼내더니 내손에 올려놨다. 그리고 그 손을 꼭 잡았다.


"손 차갑네."

"... 원래 손이 차요."

"잡고 있을걸."

"사내연애 안 한다면서요."

"응. 안 해요."

"그럼 이러지 마세요. 착각해서 혼자 설레기 싫어요."

"설렜어요?"


다년간 사회생활을 하면서 알게 된 내 술버릇이 있다. 그건 술을 먹으면 과하게 솔직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감정에도 숨김없이 솔직해진다.


"네. 그러니까 이러지 마세요. 앞으로 따로 챙겨주지도 마시고 웃는 게 예쁘네 귀엽네, 이딴 말 하지도 마세요."

"... 내일 뭐해요? 주말인데."

"그건 왜요?"

"우리 집 갈래요?"

"... 하, 어이가 없어서. 밤이 길어서 그래요? 이러시고 앞으로 제 얼굴 어떻게 보려고 그러세요?"


화가 났다. 술주정은 아닌 것 같은데 전혀 대화가 되질 않았다. 조 과장의 손을 뿌리치고 뒤로 물러섰다.


"됐고, 그냥 가세요. 못 들은 걸로 할게요."

"다음 달부터 새로 오픈하는 지점으로 옮기게 됐어요. 그럼, 사내연애는 아닌데."


갑작스러운 말이었다. 새 지점을 연다는 소리는 있었지만 조 과장이 그쪽으로 간다는 소리는 처음 들었다. 그나저나 사내연애가 아니라면? 확실한 대답이 필요했다.


"그래서요?"


조 과장은 팔을 앞뒤로 천천히 흔들더니 마치 자석처럼 내 손을 탁, 부여잡으며 말했다.


"연애하자고, 다음 달부터. 오늘은, 혜정 씨 생일이었기도 하고 축하해주고 싶어서. 그래서, 우리 집 안 갈래요?"


연애하면 하는 거지 다음 달부터는 뭐야, 연애 예고제야? 그리고 자기가 이준호야 뭐야? 진짜 어이가 없네.


투덜투덜, 머릿속에서 떠들어대는 불만사항과는 다르게 솔직의 한도가 넘은 내 몸은 다시 차에 올랐다.


"기사님,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처음 보낸 주소로 가주시면 됩니다."

"네. 출발하겠습니다."


또다시 차 안은 침묵에 휩싸였다. 다만, 한 가지 다른 게 있다면 내 손 위에 그의 손이 얹어져 있다는 것이었다. 이대로 그의 집으로 가게 되는 걸까. 이 선택을 후회할 날이 오진 않을까. 내일 눈뜨면 서로를 어떤 눈으로 바라보게 될까. 에라, 될 대로 되라지.


순간의 감정에 휘둘리면서 사는 게 진짜 어른의 연애가 아닐까. 그렇다면 이제는 도망가지 않고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지금 이 순간에 느끼는 감정에 충실해져야겠다. 충분히 느끼고 감내하고 즐기면서. 내가 생각하는 어른의 연애란 이런 거니까.



- 그렇다면, 고백해 줘요. 완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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