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30대의 피날레

어쩌면 마지막 플러팅(1)

by 류아민

몇 번의 연애가 있었다. 봄날의 벚꽃처럼 짧게 피었다가 금방 져버린 사랑도 있었고 화끈한 여름처럼 뜨겁게 타올랐다가 새카맣게 타버린 사랑도 있었다. 쓸쓸한 가을날 뭉근한 가마솥처럼 따뜻하게 다가왔다가 손끝부터 차가워진 늦가을의 어느 날 같은 외사랑도 있었다. 사랑을 포기했다. 감정이 휘몰아치는 게 힘들었다. 휘몰아치는 감정에 나만 아픈 것 같아 괴로웠다. 힘없이 바닥에 떨어져 아무렇게나 밟힌 낙엽 같아진 나 자신이 견딜 수 없었다. 그렇게 사랑을 믿지 못하는 30대가 되었다.


연애와 사랑을 포기한 30대에게 가장 중요한 건 경제력이었다. 하지만 불합리하거나 투명하지 못한 건 꼭 짚고 넘어가야 했던 나는 늘 상사에게 미움을 받아 등 떠밀리듯 퇴사를 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지.' 맞는 말이었다. 그렇게 입사와 퇴사를 반복하다 한 스타트업에서 올린 구인공고를 보게 되었다.


'함께 만들어가는 회사, 노력하는 만큼 대우받는 회사, 사람중심의 회사' 타이틀은 나쁘지 않았다. 입사조건도 맞았다. 고민은 잠시, 이력서를 작성하고 입사지원을 했다. 다음날 면접을 보러 오라는 전화가 왔다. 느낌이 좋았다.


오랜만에 면접의상을 꺼내 입었다. 그사이 몸집이 더 불었는지 등과 어깨를 구부리면 곧 찢어질 듯 타이트했다. 그래도 들어가는 게 어디냐. 단추 하나를 겨우겨우 잠그고 어느 정도 숨을 쉬면 될지 연습했다. 숨을 쉬면 안 될 것도 같았다. 나갈 준비를 마치고 거울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이번 회사는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내 목소리를 내도 되는 곳일까. 아니, 이번에는 내 목소리를 내지 말아야지. 그냥 순응해야지. 절이 싫어도 갈 곳 없는 중은 참아야지. 그래야지.


회사는 번화가 중심에 있었다. 벽면에 부착된 면접안내도를 따라가니 면접대기실이 보였다. 조심히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앞서온 면접자들이 이름표를 가슴에 달고 앉아있었다. 가볍게 인사를 하고 이름표를 찾아 앉았다. 면접은 언제 봐도 긴장되고 떨렸다.


잠시 뒤 면접실 문이 열리고 하얗게 상기된 표정의 면접자가 나왔다. 곧이어 호명된 내 이름. 난 구겨진 블라우스를 정리하고 심호흡을 크게 한 후 들어갔다.


"안녕하십니까, 지원자 유혜정입니다."


일자로 배치된 책상에는 두 명의 면접관이 앉아있었고, 그중의 한 명과 눈이 마주쳤다. 선하고 동글동글한 인상의 젊은 남자였다.


"앉으세요."


다시 한번 숨을 길게 내쉬고 면접장 중앙에 당당히 위치한 철제 의자에 앉았다. 긴장감에 숨이 일정하게 쉬어지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살짝 재킷의 단추를 풀어 숨을 몰아쉬었다.


십여 분간 면접이 진행됐다. 예상했던 질문들이었고 연습한 대로 대답을 이어나갔다. 동글동글한 인상의 면접관이 볼펜으로 책상을 톡톡톡 치더니 고개를 갸우뚱하며 질문을 했다.


"본인의 단점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조금 당황했다. 자기소개서는 의례 그렇듯 장점이 부각되도록 적었다. 신중한 성격, 정확하면서도 빠른 일처리, 목표지향적인 성향. 이것의 뒷면이 단점 아닐까? 난 솔직해야 할지 취업에 필요한 대답을 해야 할지 고민하다 그냥 계산하지 않고 솔직하기로 했다.


"곧은 성격이 단점입니다. 누군가는 이걸 고집이라고 하기도 하지만 저는 업무에 있어서의 확신과 책임감이라고 생각합니다."


대답을 들은 면접관은 경력을 한참 들여다보더니 이력서를 닫으며 재차 질문했다.


"제일 오래 다닌 곳이 2년도 안되던데, 그만둔 이유를 말해줄 수 있을까요?"


역시나 경력이 문제였다. 1년 5개월이 가장 오래된 경력이었다. 이것도 상사 없이 사원들로만 운영된 작은 외주업체여서 그나마 오래 다닐 수 있었다. 이곳도 낙하산 이슈로 사장과 갈등이 생겨 그만둔 거였다. 이번에도 솔직하게 대답하고 싶었다. 하지만 상사와 트러블이 있었다고 말하면 과연 날 좋게 볼까.


대답을 망설이자 면접관은 손깍지를 끼며 다시 물었다.


"만약, 상사와 의견충돌이 발생하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답하지 않아도 답을 아는듯했다. 면접실엔 정적이 돌았다. 두 면접관은 날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고, 난 시선을 아래로 내린 채 조용히 숨을 들이마셨다.


"상사의 의견이 옳다고 생각하면 당연히 따르겠습니다. 하지만, 제 의견이 나쁘지 않다는 확신이 들면 근거를 제시해 설득하겠습니다."


솔직한 답변이었다. 늘 그래왔다. 의견충돌이 생기면 그에 대한 근거자료를 찾아 설득하려 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말은 '상사가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세요.'였다. 주인의식을 갖길 바란다면서 주체성을 뺏는 게 싫었다.


면접관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평가점수판을 덮었다. 뭘 의미하는 걸까. 너무 솔직한 답변이었나? 여기도 아닌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결과가 나오지도 않았는데 결과를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면접관은 마지막이라는 걸 알리는 듯 궁금한 거 있으면 질문하라고 했다. 난 잠시 고민하다 아까부터 질문대신 턱을 괴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관찰하듯 쳐다만 보고 있던 면접관에게 질문했다.


"대표님은 이 회사를 어떤 회사로 만들고 싶으신지 궁금합니다."


대표라고 소개받진 않았지만 젊은 면접관이 그분에게 '대표님'이라고 소곤거렸던 게 들렸었다. 그분은 이마에 주름을 크게 잡으며 말했다.


"제가 대표라고 소개했었나요? 흠, 입사하면 자세히 말해주겠지만, 난 꿈이 원대합니다. 작게 시작했지만 직원들과 함께 크게 키울 겁니다."


확신에 찬 눈빛이었다. 그 눈빛을 보자 이상하게도 마음이 안정됐다. 떨렸던 심장이 제자리를 찾는 듯 일정한 박자로 뛰기 시작했다. 기회가 된다면 이 회사에서 자유롭게 나의 가능성을 시험해보고 싶었다.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음, 더 할 말 있어요?"


둥글둥글한 인상의 면접관이 푸근한 미소 지으며 말했다. 무슨 용기였는지 난 주먹을 꽉 쥐며 외쳤다.


"이 회사에서 꼭 일하고 싶습니다. 대표님의 꿈에 보탬이 되겠습니다."


나의 외침에 두 면접관이 호탕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결과 있기를 바란다는 짧은 인사말로 면접은 끝났다. 면접결과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나왔다. 합격. 기분 좋은 소식이었다. 이곳에서야말로 누구의 간섭도 통제도 받지 않고 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나의 희망사항일 뿐이었다.


"소개하겠습니다. 여러분들과 함께하게 된 조원재 과장입니다. 여러분들의 자기소개는 면접 때 잘 들었습니다. 제 소개를 간단하게 하자면, 철저한 계획형이고 성과주의입니다. 대표님은 성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전 성과가 중요합니다. 월요일마다 주간회의를 할 거고 그때마다 성과확인이 있을 겁니다."


이 일이 성과가 중요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과장은 성과에 목을 맨 사람 같았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조 과장은 외부미팅에 주력을 쏟아야 하는 대표님이 직원과 성과관리를 위해 특별히 스카우트해 온 사람이었다.


본격적인 업무를 시작한 지 3개월째 되던 날이었다.


"혜정 씨, 파일 정리해서 저 좀 보죠."


드디어 올 것이 왔다. 난 그동안의 성과를 정리해 과장실로 들어갔다. 마음이 무거웠다. 노력한다고 했지만 다른 직원들에 비해 성과가 현저히 낮았다.


"앉으세요."


과장은 자신의 앞에 있는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난 책상에 정리해 온 파일을 올리고 앉았다. 두근두근, 무슨 말을 하실까. 성과가 왜 이 모양이냐고 하면 난 어떻게 대답해야 하지? 난 정말 최선을 다했지만 그게 성과로 이어지진 못했다.


"혜정 씨."

"네."


과장은 파일 뒤적거리며 짧은 한숨을 쉬었다. 아침부터 잔소리 들으면 기운이 빠져서 일하기 힘든데,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기술은 아직 익히지 못했다.


"일하는 거 어때요?"

"힘들지만 할만합니다."


일하는 거 어떻냐는 말은 흔히들 하는 아이스브레이킹 같은 거였다. 개인상담을 하고 그에 맞는 성향을 분석해 알맞은 일자리를 찾아주는 게 내 역할이고 일이었지만 개인상담을 하다 보면 취직보다는 심리치료를 받아야 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특히 내가 주로 배정받는 30대는 더 그랬다.


"다른 직원들보다 혜정 씨 성과가 낮아요."

"네, 알고 있습니다."


일찍부터 귀가 틔인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다른 직원들은 이제 막 사회에 나온 사람들이나 경력직들을 배정받았기에 취업까지 연결시키는 경우가 꽤 많았다. 하지만 난 아니었다. 사회생활이 힘들어 뛰쳐나온 사람들, 반대로 사회경험이 전혀 없는 사람들, 경력단절 여성들, 육아 중이라 제한이 많은 여성들, 대기업을 목표로 취업을 준비하다 허송세월을 보낸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녹록지 않았다. 내가 아무리 최선을 다한다고 한들 성과가 나올 수 있는 조건들이 아니었다.


"하지만, 내담자들의 만족도가 높은 건 혜정 씨 쪽이네요."

"네?"

"혜정 씨가 하는 상담스타일이 취업을 위한 상담이라기보다는 마음을 달래주는 상담인 것 같아요. 물론, 그걸 알고 혜정 씨를 뽑은 거지만."

"아..."

"성과가 나온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순 없겠지만, 성과 부담 갖지 말고 일해요. 혜정 씨가 하는 상담, 힘이 되고 용기를 주는 것 같아서 좋아요."

"아, 감사합니다."


의외의 말이었다. 혼이 날 줄 알았다. 전략을 바꾸라고 채찍질할 줄 알았다. 만약 그러면 어떤 말로 반박할지 준비도 해놨다. 하지만, 되려 칭찬을 받았다. 내 상담이 상대방에게 힘이 되고 용기를 준다니, 내 방식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받은 것 같았다.


"그런데."


그런데? 조 과장의 입술 근육이 옆으로 길게 늘어났다. 아, 채찍질 전에 주는 당근이었나?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구나. 괜히 좋아했네.


"내담자들한테는 그렇게 다정하면서 나한테는 왜 그래요. 표정 좀 풀고 이야기합시다."


아... 또 표정지적이었다. 어디서 일하든 늘 같은 지적이었다. 이건 명백히 내가 고쳐야 하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내담자들한테는 진심으로 걱정되고 안타까워서 나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 외에는 어떠한 감정소모도 하기 싫었다. 그러다 보니 난 늘 무표정이었다. 무표정에서 풍기는 분위기를 나도 알고 있었지만 의식적으로 표정을 만들어내기엔 에너지가 부족했다. 뭐, 딱히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노력해 보겠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게 다였다. 늘 노력은 하니까. 면담이 끝난 것 같아 일어서려는데 조 과장이 잠시 손을 펴보라는 듯 손을 까닥였다. 난 별 의심 없이 손을 내밀었고 손바닥 위에는 고급스럽게 포장된 작은 초콜릿 하나가 놓였다.


"아침 첫 상담 좀 힘들었죠? 먹고 힘내요."

"하."


뜻밖의 선물에 나도 모르게 탄식이 나왔다. 오늘 상담은 유난히 힘들었다. 상담사 자질을 테스트해 보려는 내담자에게 불쾌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내담자의 성향과 니즈를 파악해야 했기에 하루의 에너지를 한 번에 다 쓴 느낌이었다. 난 그 자리에서 바로 초콜릿을 까 입안에 넣고 방긋 웃었다.


"이렇게요?"

"그래요. 그렇게 웃어요. 웃으니까 훨씬 예쁘네."


그렇게 말하며 따라 웃는 조 과장의 미소가 더 예뻤다. 잡티 하나 없는 뽀얀 얼굴에 긴 속눈썹에서 풍기는 훈훈한 외모가 사람에 질려가던 나의 열정에 또다시 불씨를 지폈다. 그 어떤 격려보다 강렬했다.


면담을 마치고 자리로 돌아와 작은 손거울에 얼굴을 비춰봤다. 볼에는 옅은 홍조가 피어있었다. 이쯤 되면 인정해야 할 것 같았다.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나도 잘생긴 얼굴에는 약했다.


퇴근하기 1시간 전. 사무실이 문이 벌컥 열리며 대표님이 들어오셨다. 오늘 들어온다는 말이 없었는데 어쩐 일일까.


"다들 일찍 정리하고 가시죠. 조 과장이 오늘 회식하자고 하던데, 다들 오케이 된 겁니까?"


갑작스러운 회식 제안에 어안이 벙벙했다. 그때 과장실 문이 열리며 아예 가방까지 챙겨 나온 조 과장이 호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오늘 기분이 좋아서요. 제가 한턱 쏠 테니 다들 갑시다!"

"조 과장이 이런 사람이 아닌데, 좋아요! 다들 정리해요."


대표님의 지시가 떨어지자마자 다른 직원들은 쏜살같이 자리를 정리하고 컴퓨터를 껐다. 나도 살짝 눈치를 보다 가방을 챙겨서 일어섰다.


"제가 육회 진짜 맛있게 잘하는 곳 아는데 차 타고 좀 가야 되거든요? 다들 육회 좋아하세요?"


조 과장이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육회? 없어서 못 먹지. 육회라는 말에 다들 환호성을 내질렀고, 나도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 차에 두 명 타고, 조 과장 차에 한 명 타면 되겠다. 조 과장이랑 혜정 씨랑 같이 타고 와요. 동갑인데 좀 친해지고."


대표님의 장난기 어린 말에 조 과장이 웃으며 나를 쳐다봤다. 그랬다. 조 과장은 나와 동갑이었다. 어쩌면 동갑이라서 다른 직원들보다 가까워지는데 시간이 걸린 것 같다. 내가 멋쩍어하며 대답을 망설이자 조 과장은 책상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먼저 내려가서 차 빼놓을 테니까 내려와요."


솔직히 말하자면 그때가 처음이었다. 아버지가 아닌 다른 남자가 운전하는 차에 타보는 것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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