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보아도 정말 그럴싸했다.
큰 명품 가방을 메고 고급스러운 정장을 입은 모습, 60평이 넘는 고급 빌라에 깔끔하게 정돈된 집안, 당당한 걸음걸이와 자신감 넘치는 씩씩한 말투까지. 가끔 위스키 같은 선물을 보내주기도 했는데, 이런 것들이 특별한 인상을 남기기에 충분했다. 그분은 과거에 명동에서 가장 큰 사무실을 차려 사채업을 했다고 하며, 이제 나이가 들어 다른 일을 해보려고 잠시 쉬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도 하루에 50통 넘게 걸려오는 전화 통화 내용을 옆에서 잠깐 듣다 보면, 뭔가 아쉬운 게 많아서 그런지 잠깐이라도 만나자고 하는 사람들이 하루에도 몇 명씩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느 날 그분이 불쑥 이런 말을 꺼냈다고 한다. 커피숍을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사람들을 만나는 게 모양새가 좋지 않으니, 강남역 근처 삼성역에 사무실을 하나 얻어야겠다고 하면서 잠시 돈을 융통해 달라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지인은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던 그분의 부탁이라, 이제 뭔가 큰일을 시작하려나 보다 생각하고 부랴부랴 가지고 있던 돈을 스스럼없이 통장으로 보내주었다.
그런데 철석같이 믿고 있던 이분에게 이렇게 돈을 보내주었건만, 정작 본인은 사무실도 얻지 않으면서 돈을 돌려주겠다고 하는 날짜를 오늘내일 미루더라는 것이다.
재촉을 하면 그때마다 “아직 돈이 덜 들어왔다, 은행 서류심사가 늦어져서 그러는데 다음 주면 곧 해결될 것 같다”라고 하면서.
어느 순간 지인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돈을 떼일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부랴부랴 등기부 등본을 떼어보고 주소지 관리사무실에도 찾아가서 확인해 보니, 아뿔싸! 몇 달 전 살고 있던 월세 방을 빼서 이미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버렸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제야 평소 이분의 말이나 행동을 통해 충분히 알아차릴 수 있었던 가식적인 거짓말들이 머리를 스쳐가는 것이었다.
여기저기 수소문 끝에 뒤늦게 알아차린 사실은, 그분이 자기 가족의 돈까지 모두 끌어모아 여러 채의 상가에 전 재산을 투자했지만, 일이 잘못되어 파산하고 신용카드도 사용하지 못하는 상태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의 이름으로 된 재산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정말 알거지나 마찬가지인 신세였다. 할 수 있는 일이란 이런 식으로 그럴듯한 구실을 대며 그때그때 용돈을 뜯어내는 생활뿐이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그를 통해 한몫 잡아야겠다는 욕심이 앞서, 제법 잘 사는 것처럼 보이는 그를 믿고 있었다. 유통업을 오래 했다고 하니 주위에 아는 사람도 많고, 돈이 좀 있는 줄 알고 무슨 얘기를 꺼내든 순진하게 하나에서 열까지 곧이곧대로 다 믿어버린 것이다.
보통 사람은 자기 자신을 속이면서까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다. 나중에 불거질 문제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런 행동은 하지 않는다. 그런데 알지도 못하는 어떤 국회의원이나 유명인과 아주 가깝게 지낸다고 하며 함께 찍은 사진을 보여주거나, 사촌 동생이 누구라고 하면서 접근해 친분을 쌓고 돈을 요구하게 되면, 이건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가 된다.
남들 앞에서 잘난 척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사기를 칠 의도나 목적이 없다면 그런 이야기를 할 필요는 단 0.1%도 없다. 장난은 아는 사람에게나 하는 것이고, 만약 농담이었다면 끝에 가서는 사실은 농담이라고 얘기를 하게 된다.
하지만 계속 만나는 사람에게 그렇게 한다면, 상대방을 속일 의도가 분명하다고밖에 볼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