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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복사 Jan 23. 2024

9화. 읽기의 영역


제보를 하나 받았다. 그의 핸드폰이 묘하게 느리다는 내용이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의 스마트 부분 총책임자로서 바로 조사에 착수했다. 놀랍게도 제보 내용은 사실이었는데, 저장 공간에 들어가 확인해 보니 오디오북이 10GB를 훌쩍 넘겨 있었다. 세상에! 언제 그렇게 책을 읽고 있었는지. 오디오북 용량이 대략 300~500MB인 걸 고려하면, 평균 약 3권을 상시 읽고 있었다는 얘기다. 책을 어떻게 들으며 읽을 수 있냐고 화를 내던 그가 아직도 선한데, 놀라울 따름이다.


오디오북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다. 우선 시작부터 짚고 넘어가자. 표면적인 이유는 그에게 이르게 찾아온 노안이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의 시력은 언제나 뛰어났으므로. 대대로 내려온 좋은 유전자가 분명 시력에서도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일찍 노안이 오면서 그에게 말도 안 되게 ‘돋보기’가 필요해졌다. 그러면서 찾아온 불편에 독서가 있었는데, 너무도 충격적인 사실에 그는 책과 냅다 헤어지기로 결심한다. 곁에서 보기에 안 되겠다 싶어서 전자책과 오디오북에 대해 알려주었지만, 그는 책과 절연하는 것으로 슬픔을 달래버렸다.


그래서 그대로 두었다. 아무리 좋고 편하다 해도, 그가 불편하고 어색해하면 강권하지 않는 게 내 철칙이었다. 궁금해할 때나 제대로 배우고 싶으면 몰라도, 즐거움 하나 없이 그런 식으로는 싫었다. 그러나 오디오북은 너무도 예외였다. 왜냐하면, 사고가 났다. 좌식은 무슨 침대와 하나 되어 누워 지내야만 했다. 누구라도 평소 하던 모든 걸 일순간에 잃으면 제정신으로 있기 힘들 것이다. 같은 사고를 당했던 사연들에서도 몸만큼 정신이 힘들었다고 앞다투어 증언하고 있었다. 더욱이 바위산을 타던 그에게 실내 활동이 위로될 리가 없다. 특히나 누워서 지내야만 한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새로운 것이 필요했다. 아프고 불편해도 뭔가 새로운 것을 배우고 그럼으로써 오는 것들에 집중하면서 고통과 우울감에서 멀어질 수 있는 것이. 오디오북이라는 존재는 그렇게 하나의 수단으로 각인됐다. 책을 읽고 싶어 했으니, 될 것 같기도 했다. 아무것도 못 하고, 안 하는 것보다는 뭐라도 하는 게 나을 거였다. 부탁하지 않아도 자유의지로 할 수 있는 점이 가장 중요했다. 당장 모든 어플을 다운받았다. 전자도서관, 윌라, 밀리의 서재, 오디오클립. 실제로 이용해 보며 무엇이 그가 습득하기 편하고, 장기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지에 집중했다. 다양한 종류의 도서와 음성, 속도 조절, 간단한 어플 구동 방식 그리고 오류가 잦은 정도까지였던 것 같다. 처음에는 당연히 귀찮아했다. 어색해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내 적응하면서 그에게 오디오북은 날개가 되어 새로운 세상을 연결해 주었다. 오디오북은 그뿐이 아니라 내게도 더 넓은 세상으로 이어주었다. 그간 내가 얼마나 세상을 좁게 보고 있었는지에 대해, 어리석게도 이제서야 자각한 것이다. 오디오북 콘텐츠는 정말 많고, 그만큼 쉽게 이용할 수 있었다. 물론, 아직 멀었다는 생각은 든다. 그래도 나처럼 한 명씩 더 인지하고 이용하고 목소리를 내다보면, 조금이라도 더 나아지지 않을까. 오디오북이 없었다면, 그 긴 시간을 그렇게 건강하게 보낼 수 없었을 것이다. 무사히 나은 후에도 그는 블루투스 이어폰을 귀에 꽂고 취향에 맞는 책을 취향에 맞는 목소리로 듣는다. 단언컨대 우리 집 독서왕이다. 나는 요즘 수어를 배우고 있다. 한 동작씩 짧지만 확실하게 습득 중이다. 수어로 대화할 있는 날을 꿈꾸면서. 이렇게 우리의 세상은 조금씩 모르던 세계로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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