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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복사 Feb 06. 2024

11화. 어떤 어른

누구에게나 법적으로 두 명의 할머니가 있다. 그러니까 내게도 그런 셈인데, 할머니 한 분은 뵐 기회조차 없었다. 사진조차 남아있지 않아서 우리는 한마음으로 한 번씩 각자의 엄마와 할머니를 그려보곤 한다. 그러니 지금부터 내가 얘기할 할머니는 다른 할머니다. 몹시 나쁜 어른인 할머니. 할머니는 언제나 그랬다. 그를 괴롭혔고 나를 괴롭혔고 우리 모두를 괴롭혔다. 종래에 자기 자신을 괴롭힌 것도 할머니다운 끝이라고 느껴질 만큼. 한겨울에 씻는데 보일러를 끄는 할머니, 명절에 내려간다고 멀미했는데도 속이 씻겨갈 것 같은 물김치를 내어주지 않는 할머니, 고기는 뚜껑 덮어두고 못 먹게 하는 할머니, 청소시키려고 우리가 갈 때를 맞춰 집을 지저분하게 두는 할머니, 명절마다 만두와 송편을 우리 손으로 빚어 먹는 할머니, 손맛이 없어 맛없는 요리만 하는 할머니, 자신도 못 먹는 음식을 우리에게 줌으로써 처리하는 할머니. 그리고 할머니는 그를 끝까지 끝없이 미워했다. 정작 그는 내게 할머니를 미워하지 말라고 가르쳤는데 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고추장은 그렇게 등장했다. 회생도 불가능한 음식들 때문에. 그는 답이 없는 고추장이 떠오를 때면, 한숨과 함께 이렇게 말하곤 했다. 그건 고추장이 아니야. 너희들이 고추장이 그런 맛이라고 오해할까 봐 슬프다. 언젠가 진짜 고추장이 뭔지 알려줄게. 하여간 그건 정말, 고추장이 아니야. 그렇게만이라도 알고 있어. 대체 ‘진짜 고추장’이라는 게 뭐길래 저렇게 깊은 한숨을 내쉬는가. 내 성적표를 압도적으로 이기는 긴 숨 앞에서 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할머니의 고추장은 정말 괴로웠다. 하지만, 마트에서 사 먹는 고추장으로도 나는 맛있었다. 그의 한탄이 반복될수록 군침이 도는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어리둥절함보다 진짜의 맛에 대한 기대감으로. 그러니 나름의 ‘존버’라고 할 수 있겠다. 실제로 그가 고추장을 만든 건 오래되지 않았다. 속박에서 벗어났던 어느 날, 그는 내 생일을 명분으로 고추장을 만들어주었다. 그 속도는 뭐랄까, 엄청났다. 눈꺼풀을 한 번 깜빡였더니, 고추장이야! 맛있겠지! 하고 외침이 들려온 정도랄까? 믿는 건 자유지만, 아무튼 그랬다. 그의 마음을 그 누가 헤아릴 수 있겠는가. 맛있는 것만 먹여도 모자란데, 맛도 영양도 없는 걸 먹여야 했던 마음을.

 

처음 한 숟갈 맛봤던 고추장은 충격적이었다. 맛이 없었다. 당연하다. 갓 만든 고추장에서 흔히 아는 그 매코롬하고 단 맛이 날 리가. 시간이 지난 뒤에서야 나는 눈물 젖은 고추장 파티를 열었다. 그제서야 그가 왜 고추장 앞에 ‘진짜’를 붙였는지 알 수 있었다. 정말 정말 맛있었다. 고추장이 생각보다 카메라에 잘 담기지 않아서 서럽기까지 했다. 사진도 찍고 보정도 해보고 영상으로도 무수하게 남겼다. 그것은 ‘진짜’ 고추장이니까. 소중한 고추장을 정성껏 배부르게 먹는 동안은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무엇보다 어떤 어른에 대해서. 사람을 마구잡이로 할퀴고 상처 입히는 어른과 그런 어른조차 사람으로 대우했던 어른에 대해서.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는, 100세 시대에 아직 햇병아리인 나는 모르겠다. 내가 아는 것은, 그럼에도 꿋꿋하게 우리가 보내온 그 시간을 품기까지 내가 노력해 온 무수한 것들, 그것을 가능하게 한 ‘진짜 고추장’과 마음들뿐이다. 이 이야기는 이렇게 끝난다. 최초의 고추장을 지나 몇 번째의 고추장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먹는 고추장에는 홍시가 들어가 끝내준다. 앙상한 몸매를 자랑하는 나의 형제가 적극적으로 챙겨 먹고 나아가 퍼먹을 정도다. 내일은 오랜만에 떡볶이를 만들어 먹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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