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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복사 Feb 20. 2024

13화. 걸을 수 있음


나는 그냥 걷는다. 비가 오면 우산을 쓰고, 미세먼지가 나쁘면 KF94 마스크를 쓰고, 더우면 그늘을 최대한 끼고, 눈길에는 오르막을 포기하고 평지를, 마음이 가라앉으면 천천히, 힘을 낼 수 있는 날은 있는 힘껏 뛴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과 지면에 발바닥을 제대로 딛는 것에 집중하면 힘든 것도 잊고 2시간이고 3시간이고 걸을 수 있다. 걷는 건 그렇게 좋고 안 좋고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숨을 쉬고 물을 마시는 것과 같이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 되었다.


사람들이 걷기가 좋다고 말할 때, 그렇구나 하고 말았다. 걷기야 사실 언제든 하고 있지 않나, 싶기도 했다. 이족보행의 동물이니까. 발바닥이 얼얼할 때나 오래 걸었나 싶었다, 단순하게. 그러니까 그가 다치기 전까지. 그의 허리가 사고로 조각조각 나기 전까지. 그가 못 걷는 동안, 나도 함께였다. 그에게는 집에서도 상주 보호자가 필요했다. 누군가는 그와 같이 하루를 보내야 했다. 하루 중 쉬는 시간은 장을 보러 나갈 때였다. 바깥 공기와 사람들과 코로나와 미세먼지. 그때 마음을 달랬던 건, 겨울 움파 냄새였다. 파의 냄새를 맡을 때면 곧 봄이 올 것 같았다. 어떤 끝과 시작, 그리고 기회가 닿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은 하나의 별자리가 된 그 짧은 순간에 힘을 얻고 돌아가면 좀 더 잘해야지 다짐할 수 있기도 했다.


긴 시간 뒤에 그가 걷기 연습을 할 때도, 옆에는 내가 함께였다. 가끔은 걔나 쟤가 함께일 때도 있었지만. 집에서도 입고 지내야 해서 옷 속에 보조기를 차고 밖을 걷던 첫날, 그는 30분도 채 되지 않아 집으로 돌아왔다. 1박 2일로 바위산도 타는 그였다. 그날도 마음이 참 무거웠는데. 이제 다시 걸을 수 있겠구나 싶지 않고, 어떡하나 그 생각만 들었다. 아파하는 그 옆에서 그의 속도에 맞춰 걸으면서, 내가 걷는 길이 밤길인지 끝나지 않는 어둠인지 모르겠어서 그 마음을 숨기는 데도 애를 먹었다. 그래도 그는 고통에 몰입하지 않고 계속 힘을 냈다. 부족한 간호에도 힘을 내주었다. 각자의 일과를 마치고 저녁에 나가서 걷는 시간은 느리지만 조금씩 늘어났다.


오늘은 여기가 좀 아프다. 우리 오늘은 이만 들어갈까? 오늘은 이쪽으로 걸을까? 어제보단 조금 걸을 만하다. 시간이 지나면, 정말 괜찮아질까? 생각보다 어렵네. 걷는 게 이렇게 힘들 줄이야. 사실, 무서워. 이렇게 다칠 거라고는 정말 몰랐는데. 언제쯤 뛸 수 있을까. 산을 탔다는 게 믿어지지 않아. 근육이 다 빠져서 무릎이 아파. 내일은 좀 더 이르게 나올 수 있을까? 힘들어서. 이만하면 오늘도 충분히 걸은 것 같아. 고마워, 같이 걸어줘서. 힘들게 해서 미안해. 하나도 잘해준 게 없는데도 매일 그에게 고맙다는 말과 미안하다는 말을 들었다. 그가 먹고 싶어 하던 것 중 단 하나라도 제대로 주었는지 답할 수 없는데. 그의 고향에서 음식을 공수하지 못한 게 평생 마음에 돌로 남아있을 것도 그는 미안하다고 할까.


못 걷던 그가 다시 걷고 뛰고, 이전처럼 횡단보도 앞에서 옥신각신하는 일상으로 돌아왔다. 언제 올까 싶던 미래가 현재가 되었다. 빨간불이잖아. 여기 사거리 신호로 보면, 건너도 괜찮아. 봐봐, 다들 건너잖아. 아니, 아무리 그래도 빨간불이잖아. 불 바뀌고 건너자, 제발. 안!전!제!일! 그렇게 말 안 해도 알아, 나도. 말을 좀 들어주었으면 싶을 때는 머리가 지끈거리지만, 만담처럼 매일 여기저기서 소란스럽게 보내는 시간은 뭐라 해도 감사하고 소중하다. 그와 다시 각자의 일상을 보내고 있지만, 가끔은 함께 나와 걷는다. 빨리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고 천천히 걷기도 한다. 그의 호탕한 웃음과 건강한 발걸음 소리가 주변을 덮는 순간은 언제나 기다리는 시간이다. 이제의 내 바람은 그런 시간이 내게 끝없이 계속되었으면 하는 것. 그가 더는 아프지 않은 채로 건강하게 곁에 있어주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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