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개복사 Feb 27. 2024

14화. 불효를 넘어선 대역죄


시간은 너무도 익숙해서 마치 무한하게 느껴지지만, 그만큼 유한한 것이 없다. 거칠어진 뼈, 염증에 갉아 먹힌 뼈, 닳은 연골, 침침해지는 눈, 무뎌지는 미각⋯⋯. 되돌릴 수 없는 것 앞에서 무너질 수밖에 없는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에게 이른 노안이 왔을 때도 그랬다.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안경을 맞추고 필요한 때에 꺼내서 쓰면 될 일 같은데, 그렇지 않았다. 그에게 그것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적어도 그 나이대에는. 그래서 그는 괜찮다고 선언했다. 잘 보이던 글자가 안 보이고, 눈을 찡그려도 해결되지 않는데도 안경을 맞추지 않겠다고 버텼다. 볼 수 있다고 외치고 그다음에는 무슨 글자인지 봐달라 하는 게 순서인 시절이었다.


노안. 단어부터가 거북하긴 하다. 당연히 태어난 순간부터 늙어가지마는 너무 명명하는 것 같달까.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몸에 한계점이 생기는 것 자체가, 또한 그것이 자신이 아닌 타인이나 세상이 규정지을 때면 더더욱. 그래도 그냥 둘 수만은 없었다. 내가 늘 곁에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니까. 하루 날을 잡고, 마음을 가다듬은 뒤 그에게 말했다. 돋보기안경을 하나 맞추자. 뭐? 곧바로 날카로운 소리가 귓가에 따갑게 박혔다. 내가 왜! 안 보이잖아, 안 보여서 답답하지 않아? 아니! 읽을 수 있어! 못 읽어서 나한테 부탁하잖아. 그게 힘들었어? 그 정도는 별거 아니잖아! 너무하다, 읽어주기 힘들면 힘들다고 하지! 이제 부탁 안 할게! 원래도 목소리 큰 사람이 진노하니 어찌나 귀가 맵던지. 그러나 몇 마디에 포기할 일이었으면 칼을 빼 들지도 않았다. 나는 그가 안경을 거부하는 순간마다 안경을 맞추자고 권했다. 그러면 그는 또 사자후를 선사했다. 오늘은 또 어떻게 설득해야 할까, 고민하며 퇴근하기를 일주일이 되었을 때,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그의 주변에 검은 오로라가 짙게 일렁이고 있었다. 나 안경 맞췄어. 그 짧은 문장과 함께 온몸에 뾰족하게 박히던 눈빛은, 지금도 생생해서 아픈 기분이다. 그는 안경을 맞추고 일주일 동안이나 나를 노려봤다. 내 마음에 구멍이 있다면, 그건 그때 그가 뚫은 구멍일 것이다. 뭐가 그렇게 서운하고 화가 나서 나를 노려보는지. 그 일주일을 대역죄인의 마음으로 지냈다. 그가 눈빛으로 나를 암살할 때마다 사과를 건네며 너무 멋지다고, 나였어도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거라고 그에게 할 수 있는 최대의 찬사를 보냈다.


시력으로 따지면, 가족 중 내가 제일 안 좋다. 타고난 유전자가 그렇다. 어릴 때는 전자기기와 거리가 있어서 좋았지만, 성인이 되어 사회생활을 하니 냅다 뚝 떨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렇게 안경을 쓰고 지내는 것과 나이 듦으로 돋보기를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때로 돌아간다면, 좀 더 다정하게 그의 마음을 어루만져줄 수 있을까. 그가 얼마나 놀라고 서운했을지를 생각하면 마음이 찌르르 아파온다. 충격에 빠져나오지도 못했는데, 옆에서 계속 안경을 맞추라고 성화였으니. 그래도 그 후에 그의 눈총을 다 받아주었으니 아주 불효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후에 그를 안경원에 데려가 컴퓨터 작업용 안경을 맞춰 드린 부분도 생각하면 ‘불’은 빼고 효라고만 하고 싶지만, 그러기에는 양심이 좀 찔린다. 얼마 전에 나는 안경렌즈를 교체했다. 테는 전에 산 것이 편하기도 하지만 깨끗해서 렌즈만 바꿨다. 그리고 다음 차례로, 이번에야말로 그의 돋보기안경을 새것으로 바꿔드릴 예정이다. 새 돋보기로 바꾸면서 우리 사이의 ‘안경 사건’을 또 떠들 것 같다. 너무 서운했다, 뭘 서운해했냐 하면서. 견딜만하게 유순해진 그의 눈총과 함께.

이전 13화 13화. 걸을 수 있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