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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복사 Apr 23. 2024

22화. 든든한 지원군


그는 처음부터 확고했다. 먹기만 해라. 요리는 다 커서 해도 늦지 않다. 장을 보러 가거나 음식을 준비하거나 먹은 뒤 정리할 때는 같이 해도, 불만은 불허였다. 지금에 와서는 그 마음이 뭔지 너무 잘 알지만, 그때는 나를 믿지 못하는 건가 싶어 샐쭉했으니 어찌나 어린 마음이던가. 하지만 그가 그렇게 부엌에 금을 그어도, 금이 흐지부지되는 상황은 언제나 있었다. 특히 몇 박 며칠을 가는 배우자의 부부 동반 모임 같은 것. 그럴 때를 대비해, 나는 요리 하나 정도는 배워두고 싶었다.


그 마음이 든 순간부터 모든 음식을 면밀히 관찰했다. 내가 배울만한 요리가 뭐가 있을지에 대해. 명확하고 타당한 근거를 준비한다면 그도 허락할 것 같았다. 여러 차례의 관찰과 분석 끝에 ‘이거다!’ 싶은 확실한 음식을 발견했다. 바로, 오므라이스! 갖가지 재료가 들어가 영양 만점이고, 재료는 상황에 따라 베리에이션이 가능하며, 밥과 재료를 볶은 볶음밥 위로 계란까지 얹으니 단일한 메뉴로 해결하기 금상첨화였다.


나는 며칠이 걸리든 그를 설득할 자신이 있었다. 외동인 경우는 모르겠으나 형제가 여럿인 경우엔, 형제 사이에 부모의 역할이 분담된다. 그리고 그의 역할을 수행하는 자가 나였다. 안전을 챙기고 굶지 않게 식사를 챙기고 아프면 병원과 약을 찾아다 해결했다. 무엇보다 편식쟁이들의 식사가 만만치 않았던 나로서는 비장의 카드가 절실했던 것도 있다. 그의 부재가 영양의 부재가 되는 건, 내 ‘의무’에 어긋나는 일이기도 했고. 그러나 그런 고심과 분석에 비해 허락은 쉽게 떨어졌다. 어쩌면 그도 같은 생각을 했을 수도 있고, 또 어쩌면 내가 정말 준비를 잘했을 수도 있지 않나 싶다.


열두 살이었다. 그때 처음 부엌칼을 사용하는 법을 배웠다. 내 손등 위로 포개지던 엄마의 손. 칼은 이렇게 쥐어야 해. 그래야 네가 안 다쳐. 아직 많이 서투니까, 음식을 익힐 땐 불을 끄거나 확 줄인 뒤에 넣어. 그래도 괜찮아. 넣은 뒤에 다시 불을 켜면 되니까. 가스레인지 사용법도 그때 배웠다. 가르쳐 주면서도 내내 속상해하던 엄마의 목소리도 기억난다. 알려주고 싶지 않았을 마음. 몰라도 될 텐데, 집을 비울 때는 그만한 돈을 쥐어 줄 텐데도 고집을 부리는 내가 안쓰럽기도 하고 기특하기도 했을 거고 아무튼 복잡했을 엄마의 마음.


당연히 강압적인 지원은 아니었다. 아무도 내게 음식을 만들라고 요리하라고 하지 않았다. 내가 돕고 싶었으며 해내어 보여주고 싶었다. 당신이 당신의 시간을 산 데도 괜찮다고. 배곪지 않고 사건·사고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보호자가 필요한 나이여도, 그래도 우리 세 남매가 같이 있을 때만큼은 덜 불안해하기를 바랐다. 가고 싶은 곳에 다녀왔으면 싶었다. 쉬고 싶을 때 쉴 수 있었으면 싶었다. 불가피한 외출에서 조금이나마 짐을 덜어주고 싶었다.


살면서 가장 많이 만든 음식은 단연 오므라이스일 것이다. 그만큼 맛이 들쑥날쑥했던 건 비밀. 손힘이 좋아 밥을 죽처럼 뭉개버리는가 하면, 간하는 걸 깜빡해 밋밋하게 만들기도 하고, 케첩을 너무 많이 넣어 달거나 마지막 계란 오믈렛에 실패해 지옥에서 올라온 오므라이스도 많이 탄생시켰다. 이제는 마지막으로 오므라이스를 만들어 먹은 게 언제인지 기억조차 없다. 살면서 먹을 오므라이스를 그때 다 해 먹은 듯 요즘은 잘 먹지 않는다. 한편으로는 성장기가 끝나고 뼈가 늙어가는 어른에게는 부담스럽고 구미가 당기지 않는 음식이기도 하다. 그보다는 뭐랄까 감자탕 같은 것. 떡볶이나 고추기름 넣은 간장게장밥, 낚지 볶음, 핫후라이드 치킨, 똠양꿍 같은 적당히 맵고 시원하고 짠, 지극히 자극적인 것들에 구미가 당긴다. 오므라이스가 업적이었던 아이는 무럭무럭 잘 자라서 지금도 잘 먹고 잘 만든다. 이제는 반대로 부엌 입장을 응원받는 삶이랄까. 언제나 내 요리에 환호하는 그를 생각하면 못 할 음식도 없다. 늘 더 대단한 음식을 내놓기 위한 고민도 그저 즐거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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