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길을 걸을 때 주변 구경을 잘한다. 걸음이 아주 느린 편이라 그런지 주변이 눈에 잘 들어오는 것 같다. 여행 중에도 어김없이 발동되는 이 특기 덕에 예기치 못하게 즐거운 장면을 종종 목격한다.
사우스뱅크에서 이동하기 위해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가던 중 노란 꽃다발을 들고 앉아있는 뽀글 머리 소년이 눈에 띄었다. 소년의 얼굴이 기대와 설렘으로 가득했다.
‘여자친구한테 줄 건가 보다! 귀엽네.’
길을 잘 못 들어서 돌아가는 길에 뽀글 머리 소년을 다시 마주쳤다. 이번엔 꽃다발을 들고 엘리베이터 앞에 서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내린다. 그중 한 소녀가 웃으며 소년에게 다가갔다. 여자친구인 것 같았다.
소년은 세상을 다 가진 듯 활짝 웃으며 수줍게 소녀에게 꽃다발을 내민다. 여자친구가 꽃다발을 받아 들고는 소년을 꼭 안아줬다. 어찌나 풋풋하고 귀엽던지! 주책맞게 계속 미소가 번진다. 나도 저럴 때가 있었는데 풋풋하다. 마치 첫사랑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느낌이었다.
걸음이 느리면 목적지에 늦게 도착할 수는 있다. 그렇지만 덕분에 다른 사람들은 볼 수 없는 장면들을 보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나의 걸음걸이가 좋다. 삶을 살아가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느리게 사는 삶의 장점도 많다. 더 많이 경험하고, 더 깊게 느낄 수 있다. 오늘 내 걸음의 여유 덕분에 사랑스러운 호주를 마주한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