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 고난이 없으면 나이 들어 할 이야기가 없다는 말에 이젠 동의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게도 몇 가지 어려운 일이 있었다.
#1
이십 대 초반이었다. 당시는 학생들에게 과외가 전면 금지되었던 시기였으므로 변변한 아르바이트를 찾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방학이 되었으나, 아르바이트 일거리를 찾지 못해, 해 저문 저녁에 지친 어머니, 아버지의 얼굴을 맞는 게 몹시도 마음 불편했었다. 바로 그때, 먼 곳에서 고압선 철탑 공사가 있는데, 함께 갈 테냐는 친구가 있어 흔쾌히 남원까지 따라 내려가게 되었다.
곧 힘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란 것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요령이 있어야 했다. 적지 않은 기간을 두고 하는 일이었으므로 더욱 그랬어야 했다. 며칠간 일당 낮은 허드렛일만 맡아하는 게 지루했었는데, 마침내 제대로 된 일에 배속되었다 싶어 기쁘게 여겼다. 있는 힘을 다해 고압선을 둘러메고, 이 계곡에서 저 계곡으로 끌고 가야 하는 호되게 고된 일이었다. 젊은 힘을 보여 주기 위해 무진 애를 쓰고 또 애를 썼다. 얼마나 혼쭐이 났던지 바로 그날 저녁, 중병(重病)의 노인처럼 나는 주체할 수 없이 부들거리는 수저로 몇 번이나 국물을 흘리는 식사를 해야 했다. 손바닥에 물집이 잡히고 손가락 마디 속마다 꼬물거리는 왕개미라도 든 것처럼 아리고 아픈 채로 끙끙 앓다가 잠들어 꿈조차 험난하기 이를 데 없었다. 잠을 잔 것 같지도 않았는데, 새벽을 깨뜨리는 십장(什長)의 기상을 외치는 소리는 참으로 난폭하기 짝이 없게 느껴졌다. 떠지지 않는 눈을 떠야 했고, 지난밤보다 오히려 더욱 화끈거리는 손마디와 손바닥의 고통이 견딜 수 없이 괴로웠다. 그런 손으로 부실한 아침 식사를 했는가 싶었는데 다시 새로운 일이 주어 졌다. 이번엔 여러 가닥의 굵게 꼬인 철선을 드라이버로 비집고, 그 사이에 또한 전선을 덧꼬아 넣는 일이었다. 순전히 악력(握力)을 사용해야 하는 고된 노동이었다. 손바닥이 뜨겁고 손가락 마디마다 고통이 뭉쳐 있는 채로 그 일을 해내야 했던 그날이 내겐 지옥과도 같던 날이었다. 더욱 기막힌 것은 그런 속에서 인심 좋은 식당의 중국 음식을 먹고 식중독에 걸린 일이었다. 무려 3일간이나 입원한 끝에 겨우 퇴원할 수 있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었다. 몇 푼 벌어보겠다던 나의 아르바이트는 이제는, 모자란 가불(假拂) 병원비를 채우기 위해 아직 성치 않은 몸으로 며칠 더 일해야만 했었다. 그 전으로도 그 이후로도 그때처럼 힘겨운 육체노동은 기억나지 않는다. 결국 고된 노동과 새까맣게 탄 얼굴, 식중독으로 바싹 야윈 몸으로, 3주간의 군사 훈련을 받기 위해 다시 어머니께 돌아와야 했다. 아무 소득도 없이 고단하기만 한 아르바이트 학생은, 핼쓱하니 야윈 영혼으로 다시 삼복더위의 밭일로 기진하여 돌아오시는 어머니를 뵙는 것이 참으로 괴로웠었다.
#2
천붕(天崩)이라 했던가. 아버지를 느닷없이 잃던 그날. 나는 폐허의 가슴으로 절망을 절감했다. 그런 일을 직접 겪어내는 슬픔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지 겪어 본 사람들만 안다더니 과연 그 말이 사실이었다. 여지껏 적잖이 문상(問喪)을 다녀오면서도 나는 과연 사람을 잃는다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잘 알지 못했음을 비로소 시인할 수 있게 되었다. 막내 녀석의 말대로 그것은 하늘의 일이라지만, 그런 일은 중추 통각 신경과 전혀 연관도 없이 진정으로 견딜 수 없이 마음 아프게 하는 일이었다. 세상에서 그것보다 더 큰 상실은 정령 많지 않을 것이다. 그 후로부터 비로소 누가 상을 당했다는 부고(訃告)를 들을 때마다, 돌아가신 지 오래인 아버지가 이따금 싸르르 아프곤 한다. 타지(他地)에서 근무하느라 아버지를 자주 찾아뵙지 못해서 그랬을 터다. 마지막 장남 노릇이라는 아버지의 임종을 제대로 뵈었던들 이렇게까지 죄스럽기야 했을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나는 더 이상 인생의 일로 아프고 싶지 않다. 연로하여 돌아가신 분의 상주를 위로하느라 사람들은 종종 호상(好喪)이니 뭐니 하지만, 어느 상주에게건 호상이란 없다는 것이 아버지를 잃고 난 후의 내 지론이다.
#3
안산에서 근무할 때의 일이었다. 내가 자기의 11년 전 담임이었다며, 제자라며 교무실로 전화가 걸려 와 있다는 것이었다. 전화를 연결하여 받았다. 녀석은 교원대학교 3학년으로 교생 참관 실습 시기인데, 내 교실로 실습을 나오고 싶다는 것이었다. 갑자기 당황스러워, 서울에도 또 대학교 주변에도 참관 실습할 수 있는 학교가 많을 텐데, 멀고 교통도 불편한 여기까지 굳이 왜 오려느냐고 물었지만, 실은 정중한 거절이었다는 걸 녀석도 모를 리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녀석은 4학년 때 나를 만나, 화가로서의 꿈을 접고 새로 선생님이 되고자 꿈을 키워 여기까지 왔다며 수화기를 놓지 않았다. 녀석의 꿈까지 바꿔 놓았다니 다시 다른 말로 거절할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결국 제자를 위해 나는 교실 뒤편에 아동용 의자 하나를 마련해 놓았고, 제자는 새하얀 양장 차림으로 의자 위에 다소곳이 앉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수업이라면 남들 어려워하는 공개수업까지 도맡을 만큼 언제나 자신만만이었건만, 도대체 수업이 안 되었다. 준비한 수업이 자꾸만 엉키었고 나는 수업 시간 내내 횡설수설이었다. 그런 가운데 제자가 연신 볼펜을 끄적거리고 있는 것이 눈에 거슬렸다. 그래서 그런지 나의 발문은 더욱 꼬이기만 했다. 지금 녀석이 기대하는 대로 이 발문은 적절한 발문일까? 아이들의 반응에 내가 잘 대처하고 있는 것일까? 그동안 내 수업은 교실에 누가 들어왔든 일체 눈길도 주지 않는 수업이었다. 교장 선생님, 연구부장 선생님의 방문 수업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내가 지금 눈치꾸러기가 되어 마구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안 그래도 커다란 녀석의 눈망울이 또릿거릴 때마다 신경이 쓰이는 것이었다. 결국 계획한 아무것도 온전히 수행하지 못한 채, 수업은 방향을 잃고 표류하고 말았다. 모든 일정이 끝나고 나서 나는 세상의 그 어느 순간보다도 미안하고 초라하고 또 괴로운 마음으로 제자를 배웅했다. 충격으로 며칠간 나는 제시간에 퇴근하지 못하곤 했었다. 불도 안 켠 교실에서 늦게까지 홀로 앉아 그날을 생각하며 자괴감에 빠지곤 했었다.
단언하건대 그동안은 내 연구수업이나 공개수업은 오히려 즐거움이었다. 동료 교사가 교실을 그득 메워도 하나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교실 공간이 부족해, 복도 쪽 창문까지 열어 놓고 학부모들이 발돋움으로 교실을 들여다보면 오히려 더 신나던 공개수업이었다. 대통령을 모시고 수업을 했던들 이렇게 당황스러웠을까? 은사님을 모시고 수업했던들, 아버님과 어머님을 모시고 수업했던들 이렇게 쩔쩔맸을까? 그날의 당혹감을 나는 결코 잊을 수가 없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사람이 누구인가를 그때에야 비로소 깨달았다.
그날 이후로 나는 새로운 소원 하나를 품고 지내는 중이다. 내 교직 생활이 끝나는 날까지 내 교실에 선생님이 되려는 또 다른 제자가 절대로 찾아들지 않기를….
엄마
태초에
엄마란 글자가 없었더라도
우리는 엄마를
엄마라 읽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웅크리고 앉은 둥근 모습이나
아이를 감싸 안은 그림자만으로도
엄마는 엄마가 아닌 다른 무엇일 수가 없으리라
어린아이 눈에 엄마가 뵈지 않는 저녁
아이는 어둠 속에서
수도 없이 엄마를 읽고 또 읽었으리라
잘못되어 불구덩이 속에서 엄마
한 줌 재로 소멸된 뒤
소멸 속에서 더욱 또렷이 읽히는
엄마
태초에
엄마란 글자가 없었더라도
누구나 태초부터
없던 그 글자를
'엄마' 하고 읽을 수 있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