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00km 전국일주 여행기
여수로 출발했다. 22년 9월이었다. 퇴사를 기다리며 여수에 갔다. 그때만 생각하면 피식 웃음이 났다. 동갑내기 친구 그리고 몇 살 위 형과 술자리를 함께했다. 게스트하우스에서 낭만포차까지 이어졌다. 두 명의 꼬드김에 넘어갔다. 술만 들어가면 꽁꽁 숨겨뒀던 놈이 문을 두드린다. 열어주지 않으려 하지만 기어코 문을 부수고야 만다. 녀석 이름은 ‘자신감'이다. “몇 명이서 오셨어요?” 그렇게 난생처음 낭만포차의 꽃이라는 걸 즐겼다. 결과는 실패였지만, 술값이 굳었던 날이었다.
어제보다 바람이 강하게 불었다. 정말 오랜만에 카메라 앞에 섰다. 여행 유튜버처럼 해본다고 11월에는 열심히 이야기했다. 몸이 지치자 말이 없어졌다. 12월에는 풍경 영상만 찍었다. 카메라 앞에서 이야기하는 행위는 여러모로 도움이 됐다. 억양이나 발음을 신경 쓸 수 있고, 무엇보다 자연스러운 문장을 구사했다. 그리고 어떻게 보이는 게 좋을지 확인 가능했다. 나중에 강연을 나간다면 망신은 안 당할 것 같았다(강연을 나간다면 말이다).
겨울은 한기로 추웠지만, 맑은 하늘을 매일 볼 수 있어 좋았다. 아직 대설 경험을 하지 못해 하는 소리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사랑하는 계절은 여름이다. 후덥지근한 날씨에 땀을 많이 흘린다는 이유로 다수는 싫다고 말하겠지만, 씻으면 그만이다. 겨울은 화장실도 춥다. 추위 때문에 똥이 어는지 똥구멍이 아플 때가 많다. 차라리 땀 차는 게 낫다. 남가아랫마을에서 율촌으로 가는 길에 차가 섰다. 운전자는 태워준다 했지만, 사정을 말하고 정중히 거절했다.
이후에도 도움을 한 번 더 받았다. 여수공항을 지나 SK 주유소를 지나던 중 트럭 아저씨가 불렀다. 남파랑길로 가지 않고 위험하게 차도로 걷느냐며 걱정했다. 가고 싶은 길로 가는 중이라고 말했더니 그는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우유 줄까?"라고 말하며 뒷좌석에서 바나나와 함께 건네주었다. "차 조심히 다녀~" 말 한마디 건네고 주유하는 쪽으로 이동했다. 잠깐 걸으니 버스정류장이 나타났다. 정말 잠깐이었는데… 우유는 슬러시로 변했다. 벌컥벌컥 들이켜고 다시 걸었다.
약점이면서도 강점인, 당신만의 특별한 점은 무엇일까요?
세바시 인생질문 1 : 나는 누구인가
특별한 점은 '정'이다. 정이 많아 어려서부터 사람을 좋게 봤다. 작은 친절과 호의에 이유가 있다는 생각을 못했다. 모금활동 하는 단체, 사이비를 지나치지 못하고 이야기를 들어줬다. 웃픈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20대 초반이었다. '도를 믿으십니까?'라는 이야기를 진중히 들었다. 그들은 조상을 미끼로 얘기했다. “조상복이 많으셔요, 조상이 지켜주시는 덕분에 큰 화를 면할 거예요" 할머니가 돌아가신 지 얼마 되지 않을 때였다. 마음이 약해졌다. 그들을 따라가 절하고 복비를 냈다.
“너무 착해서 사기 잘 당하겠어”
”사람 조심해라~”
주변에서 걱정할 정도로 나는 정이 많았다. 아니 순진했다고 해야 하나. 아니 세상을 몰랐다. 지금도 변함없지만 최소한 의심은 하게 됐다. 정 덕분에 사람들과 두루두루 잘 지내고,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인다. 큰 도움은 아니지만 세상이 나아지길 바라며 기부한다. 정은 내게 긍정적인 영향을 줬지만, 정 많은 사람의 세상은 마냥 아름답지 않다.
사람을 좋아했을 뿐인데, 사람을 믿었을 뿐인데, 도와주려다 되레 사기를 당하거나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한다. 이런 경우 정 많은 사람은 이용하기 쉬운 사람이 된다. 정은 나약함이 된다. 그럼, 사람들은 말한다. "그러게 사람 쉽게 믿지 말라 했잖아" "사람한테 정 좀 그만 줘, 너만 힘들다니까" 맞다, 그랬다면 벌어지지 않을 일이었다. 그런데, 정이 많다고 사람을 무조건 믿지 않는다. 마음이 잘 열릴 뿐이지 아무한테나 열지 않는다. 좋은 사람이니까 좋게 본 것뿐이다. 그게 전부다(착한 척, 좋은 척하면서 다가오는 게 나쁘다). 정이 많아서 당했다고 뭐라 하지 말고 위로해 줬으면 좋겠다. 스스로 잘 알 테니까. 그리고 정 많은 사람이 힘냈으면 좋겠다. 나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착한 사람도 존재한다. 분명 여러분 덕에 위로받고 힘내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힘들 때 그들이 여러분을 도와줄 테니 계속해서 주위에 정을 나눠주었으면 좋겠다.
나도 정 많은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을 행하며 살아갈 것이다. 그런 말이 있지 않나, '아직 세상은 살만해'라는 말. 정이 살아있기에, 정을 행하는 이가 있기에 가능하다. 정은 내가 가진 행복 중 하나니까, 나는 정 많은 사람으로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