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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IBI Jun 13. 2023

금주 20일째

샐러드를 국밥처럼 먹는 여자

금주 20일째, 술을 끊어내고 달라진 것들 중 가장 큰 변화는 매일 먹는 음식의 종류와 양이다.


난 거의 평생을 면, 국물, 매운맛 성애자로 살아왔다. 그래서 30년 넘게 한 번도 바뀌지 않은 나의 소울푸드 - 물론 엄마가 해주는 모든 음식을 제외하고 - 는 라면이다. 매일 라면만 먹으라고 해도 365일 이상은 버틸 수 있을 만큼 많이 좋아한다. 가장 좋아하는 TV 프로그램이 '비타민'일 정도로 건강 수호자인 엄마가 라면은 웬만하면 먹지 못하게 해서 생긴 집착일 수도 있다. 아주 어릴 때부터 열이 펄펄 끓어오르는 감기 몸살을 며칠 혹독하게 치르고 나면 난 당당하게 엄마에게 라면을 끓여달라고 주문했었다. 이때만큼은 아픈 어린 딸이 너무 불쌍한 엄마는 잔소리 없이 라면을 끓여주셨다. 인간의 기억력이란 너무 신기하다. 열이 많이 가라앉아 정신이 든 아주 캄캄한 밤, 며칠을 아무것도 먹지 못했던 나에게 엄마가 뭐가 제일 먹고 싶냐고 물으셨었고, 난 라면을 말했었다. 그때의 방 안 풍경, 내 앞에 놓여있던 작은 앉은뱅이 상, 그 위에 김이 모락모락 나던 라면, 이때다 싶은 언니가 내 옆에 끼여앉아 라면을 나누어 먹던 일까지... 40년 세월을 보내며 다른 건 기억이 안 나도 30년도 훨씬 넘은 이때의 행복했던 기억은 죽을 때까지 생각날 거 같다. 요즘 유행하는 소확행을 30년도 전에 라면을 통해 느꼈던 셈이다.


그러니 술을 매일 생명수처럼 달고 살 때는 선호하는 안주로 간단하게는 '라면', 복잡하게는 '우동 사리를 추가한 닭볶음탕', '당면 사리를 추가한 곱창전골', '청양고추를 잔뜩 올린 불짬뽕', '매운 육칼국수' 등을 번갈아가며 먹어댔고, 술 마신 다음날 낮에는 해장으로 또 짬뽕, 저녁엔 안주로 라면, 다음날 낮에는 해장으로 얼큰 순댓국 등등... 살이 찔 수밖에 없는 무한 반복의 식단을 고수하고 있었다.


그랬던 내가 금주 20일을 넘어가고 있는 요즘은 샐러드와 닭가슴살 위주의 식사를 하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들은 전부 술안주로 기가 막힌 음식들이기에 술 생각이 날까 봐 의식적으로 피했던 것이 식단 변화의 시작이었으나 이왕 금주를 결심했으니 살도 빼자 싶어서 샐러드와 닭가슴살을 억지로 먹다 보니 좋은 점들이 몸으로 직접적으로 느껴져서 점점 샐러드의 매력에 빠지고 말았다.


한참 다이어트에 관심이 많았던 20대 초반, 다이어트 때문에 정말 억지로 샐러드를 먹었던 예전 나의 프로필명이 '샐러드를 국밥처럼 먹는 여자'였을 정도로 샐러드류의 음식을 싫어했던 나였는데... 이런 변화가 너무 뜻밖이고 재미있는 요즘이다.


샐러드의 장점 중 하나는 - 물론 샐러드를 싫어하는 나에게만 해당되는 장점이겠지만 - 샐러드를 좋아하지 않아서인지 샐러드는 절대 과식을 하게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느 정도 적당히 먹었다 싶으면 저절로 포크를 내려놓게 되는데.. 짬뽕 국물이 아까워서 - 돈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말 그대로 맛있는 짬뽕 국물을 포기할 수가 없는 것 - 이미 식도까지 꽉 차있다는 느낌을 받으면서도 끝내 밥까지 말아먹던, 매끼를 과식하던 내가 뭔가를 '적당히' 먹고부터는 속이 너무 편안해졌고, 아침과 밤의 몸무게가 4kg이 차이 날 정도로 부종이 정말 심한 체질이기에 늘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죽을 맛이었는데 - 아침부터 밤까지 12시간 넘게 같이 놀던 친구가 나의 얼굴 크기 변화를 목도하고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었다 - 요즘은 아침에 일어나는 것도 가뿐해졌다. (물론, 식단보다도 숙취가 전혀 없다는 점이 더 한몫했겠지만)


이렇게 난 금주 20일 만에 무알코올 예찬론자에 더해 샐러드 예찬론자로 진화하는 중이다.


지난 번 나의 글에서 발췌한 이 얘기처럼


중독을 끊어내는 방법은
또 다른 중독으로 넘어가는 일뿐이라는 걸
몸소 느껴봐서 잘 안다.
중독에 취약한 인간으로 타고난 이상
그나마 이에 대한 해결책은
새로운 중독을 좋은 방향의 중독으로
자꾸 이끌고 가야 한다는 것이다.

좋은 중독으로 대체하는 삶으로의 변화는 아직까지는 참 경이롭고 가슴 뛰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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