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학나경 Oct 06. 2022

질문하는 YJ

학나경 인터뷰 #17

 

세상이든 사람이든,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바라보는 건 아무나 할 수 없다. 학나경이라는 요소에 매몰된 사람들도, 그런 세상에 신물이 나서 학나경이라는 인터뷰 컨텐츠를 만드는 나도 편향된 사람들이다. YJ는 그런 세상과 사람들을 담담하게 바라보고, 질문한다. 궁금한 것들을 질문하고, 그 답변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과정 속에서 YJ는 삶을 살아갈 의지를 얻고 있다.

로운. 30살에 뭘 해야할지 많이 고민하고 있다던데, 30살이라는 나이에 신경 쓰는 이유가 있는지.

YJ. 원래 나이에 신경을 안 쓰는데, 사주를 봤더니 30살을 기점으로 인생이 크게 바뀐다고 했다. 이 이야기를 듣고나서부터 나에게 좋은 흐름으로 다가올 무언가를 강박적으로 찾게 됐다. 세계여행을 한다던지 퇴사를 한다던지, 아직은 막연하게만 그 나이를 준비하고 있다. 지금 살고 있는 일상도 그 때를 위한 에너지를 모으는 중이다. 구체적인 건 없지만 해외로 나가는 것만 있다. 할 일도 방식도 아직은 모른다. 그렇지만 해외생활을 하고 싶다는 건 일관적이다.

로운. 해외여야만하는 이유가 있는건지?

YJ. 유년 시절과 학창시절을 모두 다 한국에서 보냈지만, 나에게 위안을 준 것들은 서구 문화권에서 온 것들이 많았다. 잠깐이지만 외국에서 지내면서 힘든 점도 물론 많이 느꼈다. 당시엔 ‘이래서 한국인은 그냥 한국에서 사는 게 편하다고 하는구나’ 라는 걸 느꼈지만 그것들은 모두 육체적인 편안함에 해당하는 것들이었다. 배달 음식 시켜 먹는 거나 24시간 편의점에 가는 것 하나도 못 해도 좋으니 해외에서의 느꼈던 자유로움을 다시 느끼고 싶은 것 같다. 일하고 있는 신논현의 풍경과 내가 살았던 곳의 풍경을 비교해보면, 풍경마저도 사람한테 미치는 영향 자체가 너무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해외에서 이방인으로서 사는 삶이 고달플 순 있지만 큰 해방감을 준다고도 생각한다. 그래서 한 살이라도 어릴 때, 내 뇌가 아직 말랑말랑해서 외부 자극에 열려 있을 때 해외에서 더 많은 걸 경험하고 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서 정서적이고 지적인 자원을 많이 쌓고 싶다.

로운. 경험을 많이 하고 싶은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이라고 생각이 드는데.

YJ. 단순히 경험을 많이 하는 게 아니라, 경험을 돌아보고서 남한테 도움이 될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 내가 해외에서 사는 동안 작든 크든 도움이 되어준 사람들이 많았다. 그 시절에 이런 말을 해줬던 언니가 있었지, 그 때 도와준 누나가 있었지 라는 식으로 누군가 힘들 때 옆에 있어준 사람이고 싶다. 범위를 구체적으로 생각한 건 아니지만 작게는 내가 아끼는 사람들부터 넓게는 지역사회의 사람들에게까지 필요하다면 적재 적소에서 도움을 주는 그런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


YJ가 살아온 시간의 대부분은 한국에서 흘렀지만, YJ라는 세계를 꾸린 중요한 규칙은 외국에서 보낸 짧은 시간에서 생겨났다. 탁하지 않은 색들로 시간을 채우기 위해 YJ는 더 넓은 곳에서의 삶을 꿈꾸고 있다. 그 시간 속에서 얻은 것들로 스쳐지나가는 인연에게까지도 도움이 되는 존재로 자라나려 한다.

로운. 누가 물어보지 않더라도 먼저 사람들과 깊이 있게 이야기해보고 싶은 주제가 있다면?

YJ. 어떻게 죽고 싶은지가 궁금하다. 나는 지금의 건강한 육체로 살 날이 더 이상 얼마 안 남았다는 게 너무 끔찍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또 현실로 다가오는 기후위기 등 인류가 손 쓸 수 없는 재앙이 닥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도 최근에는 좀 크게 느껴져서, 어떻게 죽어야 할까 빈번하게 고민하게 된다.

로운. 어떻게 살지가 아니라 어떻게 죽을지를 고민하는 이유가 있는지.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질문을 할 수도 있는데 어떻게 죽을지를 준비하는 건 좀 다르지 않은가. 죽음을 준비한다고 해서 해결이 되는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도 죽음의 방법을 궁금해하는 이유가 궁금하다.

YJ. 어떻게 살지를 고민하는 게 더 무게감이 크다. 기대 수명까지의 내 삶을 채워야하니까 부담스럽고 너무 길게 느껴진다. 죽음을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진다.

인생이 예를 들어 80살까지 산다고 가정을 하면 앞으로 50년이나 살아야하는데, 이 50년이라는 세월이 너무 무겁게 느껴진다. 그 세월의 무게들이 나한텐 부담스럽다. 사람은 어차피 죽을 운명인데, 왜 이렇게까지 복잡하고 힘들게 살아야 되나 싶다. 극단적이긴 한데 이런 사고가 나한텐 효과적인 온오프 장치다. 그렇다고 현실의 진짜 고민들을 안한다는 건 아니다. 다만 내가 언제 죽을지도 모르고, 죽은 후에 잊혀진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하다보면 나한테 중요한 것이 되게 달라진다.

20대 초반까지만 해도 누군가를 만나서 뭘 하고 뭘 먹든 현재에 집중하는 게 아니라 ‘나중에 이보다 더 좋은 걸 경험하려면 난 뭘 해야 할까’ 하면서 계속 미래만 생각하곤 했다. 이게 반복되다가 문득 내 삶에 집중을 못하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 이후부터, 나한테 미래가 없을 수 있다는 가정을 하게 됐다. 농담처럼 들리겠지만 난 만약을 위해서 안락사에 쓸 돈을 어느 정도 남겨둬야겠다는 생각을 항상 머리 한 켠에 담아두고 있다. 인생에 즐거운 것들이 많지만, 살아있어서 느끼는 피로감도 크다. 젊고 가능성이 무한한 지금의 나도 가끔 피로감을 좀 느끼는데, 나이 들면서 삶의 기대감 사그라드는 걸 어떻게 견뎌낼 수 있을까 싶다. 사실 그 자신이 없어서 미래를 그리는 게 더 싫다. 살다보면 ‘앞으로 나는 내가 원했던 사람의 모습에 더 가까워질 수 있을 거야’라는 기대를 하게 될텐데 내가 봐온 사람들의 모습은 그런 기대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리고 그런 삶들이 일반적인 삶이라고 칭해지고 있었다. 나는 저렇게라도 계속 살고 싶을까라고 되뇌이다보면, 그럴 바에야 그냥 모아둔 돈으로 진짜 내가 가보고 싶었던 곳들 다 둘러보고 깔끔하게 존엄하게 죽는 게 낫다고 생각을 했다.

고등학교 때 불안할 때 습관처럼 만지작거리던 구슬이 있는데, 지금의 나에겐 이 생각이 그런 존재다. 너무 큰 고민이 있거나 불안할 때 어떻게 죽을지 생각을 한다. 이렇게 항상 죽음이 곁에 있다고 가정을 하면 오히려 더 씩씩하게 살 수 있는 것 같다. 무섭지가 않다, 어떤 것도.


로운. YJ는 어떻게 죽고 싶은가.

YJ. 맨날 얘기하는 건데, 즉사. 고통 없이 가는 것. 가장 좋은 건 자다가 죽는 건데, 나이가 많아서 자연사하는 식이다. 그 전에 죽음을 선택한다면 스위스를 갈 것 같다. 마지막 순간을 앞두고도 주저하지 않으려면 무슨 삶을 살아야할까. 아쉬움 없이 살아야할 것 같다.

삶의 무게는 버겁다. 자의든 타의든 당장이라도 멈춰질 수 있는 것이 삶이라는 걸 떠올리면, 많은 고민들이 무의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부담스럽고 무거운 고민들이 YJ를 잠식하려할 때, YJ는 습관처럼 삶과 인간의 허무함을 떠올린다. 때때로 그 허무함 속에서 YJ는 삶을 살아갈 용기를 얻는다.

로운. 사전 인터뷰에서 학나경 외의 요소도 중요하지만, 학나경이란 요소도 스스로의 자아를 형성하는데 굉장히 중요한 요소로 여긴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본 YJ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드러나 있는 것과 드러나지 않은 것을 공평하게 바라보는 사람 같다.

YJ. 편견이 없다고는 말 못하겠다. 다만 어떤 요소가 더 중요하다에 대한 가치 판단이 없다. 학나경과 그 외의 요소들이 나는 다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학교를 물어보더라도 좋은 학교를 나왔는지가 궁금한 게 아니라 그 시간이 개인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을지 데이터를 얻기 위한 것이다. 학풍이든 그 곳에 들어가기까지 해야했던 선택이나 고민들이 그 사람의 세계에 다 연결되어 있다고 믿다 보니 질문을 많이 한다. 그렇게 한 사람에 대한 데이터베이스를 쌓는다.

로운. 편견이 있을 법한 부분에는 편견이 없는 것 같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YJ는 어느 부분에서 편견을 갖고 있는지.

YJ. 좀 어려운데, 불안정한 내면을 컨트롤 못하고 주위 사람들에게 극단적인 방식으로 표출할 것 같은 사람들을 무서워한다. 같이 있으면 불안정한 감정을 느끼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을 못 견뎌한다.

그리고 폐쇄적인 사람들을 싫어한다. 단적인 예로 우리나라는 성적인 부분에 있어서 당위성이 작용하는 영역이 보수적이라고 보는데, 동성애처럼 민감한 주제에 대한 본인 취향을 밝히는 건 몰라도 진짜 더럽다는 워딩을 아무렇지 않게 꺼내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본인에게 익숙하지 않다보니 완전한 편안함을 느끼기는 힘들고, 거부감이 있을 수는 있다. 그렇지만 공개적으로 아무렇지 않게 역겹다고 표현하는 사람들에 대한 편견은 있는 것 같다. 그런 사람들은 속으로 엄청 거리를 확 둔다

로운. 생각보다 많더라. 나와 타인이 생각하는 것은 둘 중 하나가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건데, 공개적으로 가치 판단을 드러내는 건 다른 얘기 같다.

YJ. 내가 되고 싶은 부모의 모습이 그랬다. 영화나 드라마에서처럼 자기 딸이 갑자기 임신했다고 말을 했을 때 놀란 티를 안 내는 엄마. 나는 그런 엄마가 되고 싶었다. 이야길 듣자마자 호들갑 떨면서  ‘네가 그랬으면 안 되지’라고 질책하는 엄마가 아니라, 이 아이가 그랬을 만한 상황이 있을 거라고 믿고, 그 순간 스스로의 행동을 정돈할 수 있는 엄마가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 세계에만 갇힌 사람을 만나면 ‘세상에 대한 애정이나 관심이 없는 게 아닐까’ 싶다. 그런 사람들은 대화를 해보다가 대답이 닫혀있다 싶으면 그때부터 선상에서 제외시킨다. 스몰 톡 정도는 하더라도 내 얘기는 죽어도 안할 사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에겐 각자의 판단 기준이 있다. 기준들은 각자의 세계에서 나름의 이유들로 생겨난 기준들이기에, 기준에 근거한 선택들은 존중받아야 한다. 가끔 우리는 타인의 세상과 선택을 존중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마주칠 때가 있다.

로운. 음악에서 정말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했는데. 자아에 음악이 영향을 끼치게 되는 방법이 궁금하다. 어떤 무드가 YJ라는 사람의 분위기를 형성하는 그런 방식으로 영향을 준걸까, 아니면 가사들에서 삶의 방식을 배운걸까.

YJ. 나는 음악을 들을 때, 비하인드 스토리부터 그 가수들의 인생까지 다 파는 스타일이다.

음악을 본격적으로 듣게 된 게 중학교 1학년 즈음인데, 그때 좋아했던 팝 가수들의 노래만 좋아한 게 아니라 그 사람들의 인터뷰나 영상이나 기사까지 찾아보고 그랬다. 그렇게 그 가수의 인생이나 가치관, 사고 방식을 탐독했다. 나는 음악을 들을 때 가사를 중요시하는 스타일이라서 힙합도 되게 좋아했는데, 좋아했던 트랙들은 때마다 다르긴 했지만 항상 꽂히는 구절이 있었다. 그 구절들을 곱씹으면서 어렸을 때 힘든 상황들을 이겨냈던 것 같다.

로운. 그 구절들이 이제 그 가수의 인생 인생과 결부되는 것들이니까 그 가수의 세계를 궁금해했을 것 같다.

YJ. 맞다. 내가 꽂히는 가사를 쓴 가수의 심정이 확 와 닿을 때가 있는데, 그 순간에 그 곡을 좋아하게 된다. 원래 여행을 가면 헤드폰이나 에어팟을 계속 끼고 있는데 최근에 제주도 갔을 때 하루는 귀가 아파서 아무것도 안 끼고 택시를 탔다. 택시 라디오에서 피오나 애플이라는 가수가 커버한 크로스드 유니벌스라는 비틀즈 노래가 흘러나왔다. [Jai guru deva, om, Nothing's gonna change my world] 라는 훅이 나오는 때였는데, 그 순간 가사가 너무 내 마음에 와닿았다. 그래서 언젠가 타투를 한다면 꼭 저 구절부터 새겨야겠다 싶을 정도로 꽂혔다. 찾아보니 존 레논이 인도로 영적 여행을 떠났다가 만난 구루한테 얻은 배움을 노래로 만든 거라더라. 그렇게 존 레논이 얻었다는 깨달음이 그 문장을 통해서 바로 느껴졌다. 이런 이야기들을 알게 되면 그 곡이 훨씬 좋아지고 듣는 경험이 풍부해져서, 노래를 좋아하게 되면 그 가수를 찾아보게 됐다. 어떤 가사가 와 닿으면 이 사람은 어떻게 이런 가사를 쓰게 됐을지 꼭 찾아보고 읽어보고, 공감되면 훨씬 좋아지고, 이게 반복되는 것 같다.

로운. 학나경 요소를 제외하고 자기 자신을 소개한다면,.

YJ. 하교하는 초등학생. 하교 후 산책하는 초등학생은 집까지 오로지 직진만 하지 않고, 길가에 나있는 풀도 보고 담장 너머 강아지도 몰래 훔쳐보지 않나. 그러다가 가끔 길을 잃어 당황하긴 하지만, 호기심을 참지 못해 이리저리 기웃대는 초등학생이 인생을 대하는 내 모습과 많이 닮았다.


YJ는 호기심을 참지 못해 이리저리 기웃대는 초등학생에 빗대어 자신을 표현했다. 이리저리 기웃대는 그의 발걸음이 방황인지 유랑인지는 스스로만 알 것이다. 그를 둘러싼 존재들을 담담하게 바라보고, 질문이라는 특별한 방법으로 자신의 사랑을 전하는 YJ의 시간은 더 풍부하고 넓은 경험들로 채워지길 기다리고 있다.

작성자 손로운

이전 18화 모순을 좁혀가는 권재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