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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나 Feb 20. 2024

말 많았던 날

잔소리

나는 말수가 많지 않다. 했던 말을 반복해서 하는 것도 싫어한다. 할 말만 하고 군더더기 없이 살고 싶다. 여태 말이 웬수인 경우가 많았다. 원치 않는 구렁텅이에 빠지는 대부분은 시와 때에 맞지 않는 말로 생긴 오해 때문이었다. 이놈의 사회성은 어떻게 길러지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다. 인간관계를 잘하고 싶어 노력하면 할수록 더 깊은 수렁에 빠졌다.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 예의 바르고 공손한 태도를 보이면 호구가 되기 딱 좋았고 감춰둔 성질머리를 보이면 성격 이상하다고 찍혔다. 열심히 사는 것은 자신 있으나 길 잃은 '열심히'는 허무할 뿐이었다. 위축된 채로 말수를 줄였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는 나는 그랬다...


며칠 전, 학교 일로 확인할 일이 생겨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당시 친구는 바쁜지 통화가 되지 않았고 나는 약간 급한 마음이 들긴 했지만 미루려면 미룰 수 있는 일이었으므로 두어 시간 기다린다 생각하고 문자를 남겼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친구로부터 연락이 왔다. 회의 중인데 살짝 전화를 했다고 했다. 회의 중? 갑자기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 뒤섞여 당황스러움이 몰려왔다. 더듬거리며 할 말만 빨리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기다리던 내 일은 친구 덕분에 적절하게 마무리가 되었다.


깔끔하게 일 처리를 하고 나면 마음이 개운해야 하는데 그날은 그렇지 않았다. 내 일로 회의하고 있는 친구를 곤란하게 만들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때 회사 분위기가 어땠는지 알 수가 없어 더 찝찝했다. 퇴근 후 친구와 다시 통화를 하며 낮에 곤란하진 않았는지를 물었다. 친구는 괜찮았다며 나도 급한 듯해 살짝 전화한 거라고 했다. 친구의 괜찮다는 대답에 미안함과 고마움이 두 배로 올라왔다. 그리고 곱해진 두 마음이 원동력이 되어 그때부터 나는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말로 끝없이 직진하기 시작했다.


회사에서 일하다 곤란하면 전화를 받지 마라, 메시지를 남긴 건 여유가 될 때 연락하라는 뜻이었다, 빨리 연락해 줘서 고마운데 그래서 미안했다 등의 잔소리를 쉬지도 않고 던졌다. 내 고삐를 다시 잡아 묶을 때까진 한참 시간이 걸렸다. 친구는 내 말과 말 사이에 괜찮았다는 소리를 넣고 싶어 했지만 나는 들을 생각도 의지도 없었다. 말리는 것을 포기하고 그냥 조용히 듣고 있던 친구는 내 이야기가 마무리되자 조용히 물었다.


"그래서 결론은, 내가 걱정되었단 뜻이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생각해 보니 친구가 한 말이 맞았다. 나는 머쓱해하며 그렇다고 했다. 그러자 친구는 웃으며 상황 조절은 자신이 할 수 있으니 걱정 마라는 말을 덧붙였다. 완전한 KO패였다. 군더더기 하나 없는 친구의 말에 내가 더는 덧붙일 걱정도 잔소리도 없었다. 그제야 웃으며 고마웠다고 말했다. 그래, 잔소리 속에 내가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은 "고맙다"라는 세 글자뿐이었다.


누가 나보고 말수가 적다고 했을까. 얼토당토않은 과묵한 이미지를 누가 내 머릿속에 심어 넣었을까. 나는 군더더기 덕지덕지 붙여가며 세 글자를 만 글자로 만들어 말하는 사람이었다. 전화를 끊고 이불을 두어 번 찼다. 말 많았던 자의 최후였다. 그리고 혼자서 웃었다. 내가 가지고 있던 내 이미지는 현재의 나가 아니라 내가 꿈꾸는 나였다. 시와 때를 맞춰 적절하게 말하는 것은 여전히 내가 풀지 못한 숙제임이 틀림없었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싶다. 아마도 내 안에 없는 모습이라 부러워서 생긴 희망일 것이다. 세상의 모든 잔소리는 옳지만 듣기 싫다. 잔소리가 틀린 것이 아니라 말속에 들어 있는 알맹이를 잘못된 방식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뜻이다. 괜히 말을 부풀려 오해가 덧씌워진 날이었다. '고맙다'라는 핵심만 잘 붙잡고 있었다면 내 말이 그렇게까지 빵빵하게 부풀진 않았을 텐데. 앞으로는 말하기 전에 침을 먼저 삼켜보자. 내 말의 핵심을 되새기는 나만의 의식으로 말이다. 그럼 내 마음이 쓸데없는 소리에 파묻히지 않고 있는 그대로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제대로 표현해서 이불 차는 날을 조금은 줄이고 싶다. 내 마음이 곧 말이 될 때까지 친구가 고생이 많겠다. 미안하지만 아직 멀었으니 좀 더 고생해라.


대문 이미지 출처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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