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나 Feb 27. 2024

죽는 날까지 한 점만이라도 부끄럼이 없기를

일본 여행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쉽게 씌여진 시' 중)


1943년 일본에서 유학을 했던 윤동주를 따라 2024년 교토에 다녀왔다. 이번 여행을 가게 된 원동력은 윤동주의 시와 삶 전반에 깔린 부끄러움이었다. 그를 따라 여행을 하며 시대적 상황은 다르지만 내 안에 들어 있는 부끄러움을 해결하고 싶었다. 나는 내가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이 살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현실과 타협하며 나쁜 줄 알면서도 하게 되는 행동은 그 후 나를 끝없이 미워하며 괴롭혔다. 약해서 눈을 감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줄이고 싶어 나는 그를 찾았다. 그의 마지막 시 '쉽게 씌여진 시'에서 그는 최초로 자신과 악수를 했다고 했다. 그 악수의 힘에 대해 묻고 싶었다. 그리고 얼마나 더 고통스러워야 나도 나와 악수를 할 수 있는지 알고 싶었다. 설령, 편안한 시대에 사는 나는 평생 할 수 없는 일이라고 그가 답한다 할지라도, 그가 한 답이므로 부끄러움을 가지고 사는 것이 내 천명이라 믿고 살 수 있을 듯했다.


첫날에는 그가 살았던 기숙사를 시작으로 그가 끌려갔던 시모가모 경찰서, 그리고 그가 다녔던 도시샤 대학까지 갔다. 일본인들은 옛 건물을 그대로 사용했다. 덕분에 골목골목을 천천히 걸으며 윤동주의 유학 시절 일상을 조금은 더 상상할 수 있었다. 경찰서는 기숙사와 대학 사이에 있었다. 기숙사에서 잡혀갔던 그날도 그는 학교를 다니며 매일 걸었던 길을 따라갔을 것이다. 죄목은 한글로 시를 쓴 것이었다. 윤동주는 내가 걷고 있는 이 길에서 무슨 생각을 하며 경찰서까지 갔을까. 한국어가 죄가 되던 시절에 있던 시모가모 경찰서는 현재도 그대로 경찰서였다. 건물 앞에서 살짝 무섬증이 들었다. 천천히 걷던 내 발걸음도 괜히 빨라졌다. 내가 윤동주와 같은 시대에 살았더라면 얼마나 겁을 먹고 살았을지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윤동주 실제 필체

기숙사와 도시샤 대학에는 윤동주를 기리는 시비가 있었다. 그의 대표시인 '서시'가 새겨져 있었는데 한글이었다. 일본 한복판에서 그를 만난 느낌이었다. 일본어가 국어일 수밖에 없었던 시절에 우리말로 글을 썼다는 건 자신이 조선인임을 잊지 않고 싶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시비는 그의 생전 필체를 그대로 옮겨 놓은 거라 더 의미가 있었다. 비석 앞에서 손끝으로 글씨를 하나씩 만지며 살펴보았다. 'ㅇ'는 상대적으로 작았고 'ㅡ'는 상대적으로 길었다. 전체적으로 얇으면서도 긴 듯한 글씨체가 그의 단아한 성품을 잘 나타내주는 듯했다. 도시샤 대학에서 시비를 찾기 위해 머뭇거리고 있을 때 지나가던 일본인이 도와주겠다며 말을 걸어왔다. 한국인들이 많이 찾는 곳이라며 함께 가서 사진까지 찍어주셨다. 예상치 못했던 일본인의 친절에 경찰서에서 느꼈던 부정적인 감정이 살짝 누그러들었다. 대학 캠퍼스 안에 윤동주와 정지용의 시비가 있다는 것도 고마웠다. 일본인에 대한 여러 가지 감정이 복합적으로 올라왔다. 일본인 친구가 있었던 윤동주도 유학하며 비슷한 경험을 했을 거라 생각한다.


다음 날은 윤동주가 경찰서로 끌려가기 얼마 전 친구들과 놀러 갔던 우지강으로 갔다. 1943년 그날은 유학을 그만두고 조선으로 돌아가기로 한 그를 위한 송별회 날이었다. 아마가세 구름다리에서 수줍음 많은 그가 친구들 중앙에 서서 사진을 찍은 이유이기도 했을 것이다. 이 사진은 함께 했던 일본인 친구 중 한 명이 사진첩에 넣어 보관하던 것이었다. 평범한 대학생들의 모습이었다. 내가 대학 시절에 친구들과 함께 찍었던 사진과 분위기가 비슷했다. 그들의 삶에 식민지와 전쟁이 끼어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면 편안해 보이는 표정 속 다른 의미를 살피진 못했을 것이다. 나는 다리를 걸으며 일본인과 한국인이 아닌 그저 친구로 편안할 수 있었던 그날이 사진 속 모두에게 의미가 있었길 바랐다.

윤동주 생애 마지막 사진(왼쪽) & 윤동주 따라 찍은 내 사진(오른쪽)

그리고 윤동주가 있던 난간에 손을 얹고 전날 거울 앞에서 연습한 그의 표정을 따라 하며 카메라 앞에 섰다.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표정과 자세를 잡으면 그의 마음을 좀 더 알 수 있을까 싶어서였다. 자세히 봐야 보이는 그의 미소는 흑백 사진이지만 연하디 연한 분홍색 같았다. 나름 비슷하게 포즈를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여행 후 집에 돌아와 다시 두 사진을 비교해 보니 손끝이 달랐다. 표정 연습하느라 그의 오른쪽 팔꿈치가 접혀 있는 것을 신경 쓰지 못하고 나는 팔을 뻗어버린 것이다. 꼼꼼하지 못한 나를 탓하며 괜히 오른쪽 팔을 굽혀보았다. 내 팔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사진에 박제된 시간은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안타까워하는 나를 보며 문득 속에서 질문이 올라왔다. 나는 그를 따라 하며 무엇을 찾고 있었던 걸까.


윤동주는 현실에서 수없이 부끄러워하면서도 시를 썼다. 다시 말해 그의 부끄러움의 끝에는 시가 있었다. 일본을 걸으며 나도 윤동주처럼 내 부끄러움을 글로 따라가 보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부끄러울 때마다 감추지 않고 시로 표현했던 것이 그의 삶의 방법이었다. 나도 쓰다 보면 언젠가는 내 부끄러움의 근원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그때가 오면 사진 속 내 오른쪽 팔의 자세가 그와 다른 것을 핑계 삼아 다시 사진 찍으러 교토를 찾을 것이다. 두 번째 윤동주와의 만남에서는 그저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의 발자취에 내 것을 쌓아보는 여행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여행을 하며, 부끄러웠던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려 애썼다. 노력만으로도 사진 속 윤동주의 표정이 살짝 지어졌다. 그도 이렇게 자신에게 조금씩 손을 내밀었던 건 아닐까.


산책을 좋아했던 윤동주를 따라 나도 일본을 걸었다. 철길을 따라, 강을 따라, 골목을 따라갔다. 윤동주는 현실의 억압과는 별개로 일본인의 소박하고도 깨끗한 삶을 좋아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일본 내에도 윤동주의 시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의 시가 일본 교과서에도 실렸다고 했다. 전쟁이 아니었다면, 식민지 시대가 아니었다면, 우지강 위에서 윤동주의 표정은 좀 더 환할 수 있었을까.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는 날이 내 인생에도 하루쯤 생기길 바라며 윤동주의 마지막 악수를 생각한다. 내 마지막 표정도 그와 같이 연한 핑크빛이면 좋겠다.

이전 09화 출근 대신 땡땡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