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asse, France
프랑스 프로방스 언덕 위에 자리한, 세계가 향수의 고향이라 부르는 마을.
여행자의 발끝이 플라스 오송(Palce aux Aires) 분수대 옆 자갈길에 닿는 순간,
그라스는 말보다 먼저 향으로 인사를 건넨다.
첫 향은 햇살을 머금은 재스민 밭에서 불어오는 싱그러움.
이어지는 건 5월의 축제에서 피어난 로즈 드 메(Rose de Mai)의 부드러운 꽃내음.
이 향기만으로도 젊은 날 꿈속에서만 그리던 “향기의 도시”가
이제는 손끝과 숨결 속에 살아 있는 현실로 다가온다.
노트르담 드 퓌 생트 소피아(Notre-Dame-du-Puy Cathedral) 주변 골목은
아침마다 향수 공방들이 나지막이 문을 열며 하루를 시작한다.
작은 유리병 안에서 흘러나오는 건 시트러스와 베르가못의 상큼함.
돌담 틈새로 스며드는 네롤리의 포근한 기운과
은방울꽃(muguet)의 맑은 숨결이 바람결에 섞여 여행자의 코끝에 안긴다.
좁은 루 드 래빗(Rue de l’Oratoire)에서는
고대의 돌담 위로 햇살이 부서지고,
그 사이로 은은하게 번지는 오렌지 블로섬의 향기가
마치 오래된 시편처럼 잔잔하게 마음을 적신다.
정오 무렵, 국제 향수 박물관(Musée International de la Parfumerie) 앞 광장은
관광객과 장인들의 발길로 북적이지만,
공기 속엔 언제나 프로방스의 리듬이 흐른다.
카페가 아닌 작은 허브 상점에선 라벤더 꿀 대신
타라곤, 바질, 세이지가 뒤섞인 묘한 허브향이 은은히 번진다.
그 향은 배고픔을 달래는 맛이 아니라,
마음을 차분하게 다스리는 향의 명상 같다.
그라스는 한낮에도 조용히 속삭인다.
“세상은 빠르지만 향기는 언제나 천천히 피어난다.”
오후가 깊어질수록 향은 무게를 더한다.
프라고나르(Fragonard)와 몰리나르(Molinard) 같은 전통 향수 메종의 공방에서는
통에 숙성된 오크와 가죽의 묵직한 노트가 은근히 스며 나오고,
실험실 유리병 안에서 조심스레 섞이는 건
바닐라 대신 통카 빈(Tonka bean)과 벤조인 수지의 깊은 달콤함이다.
햇살이 누그러진 언덕길에 서면,
바람 한 줄기에도 머스크와 아이리스의 파우더리한 잔향이
부드럽게 퍼져, 시간조차 느려지는 듯하다.
해질녘, 라 사르드(Sarade) 언덕 너머로 태양이 기울면
마을은 앰버빛으로 물든다.
골목에서는 향수의 원료가 되는 유향(olibanum)과
미르(myrrhe)의 스파이시한 냄새가 은은히 섞여 나오고,
그라스의 저녁은 마치 한 병의 진귀한 오 드 퍼퓸처럼 농밀해진다.
바람은 꽃과 수지, 풀과 나무를 골고루 감싸
여행자의 마음에 오래 남을 조용한 선율을 남긴다.
그라스는 단순히 향수를 만드는 도시가 아니다.
잊고 지낸 감각을 깨우고,
젊은 날의 꿈을 다시 피워내는 마법 같은 공간이다.
여행자가 가슴에 품어가는 건 장면이 아니라 향기.
돌아서는 길, 루 장 바르(Rue Jean Ossola)의 그림자 속에서
마을은 말한다.
“향기로 너의 옷깃에 한 동안 머문 기억을 남길 것이다.”
그래서 그라스는 빈 시약병 마냥 마음을 비우고,
빈틈을 향기로 채우는 여행의 시작이 된다.
장소정보(구글맵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