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숨 장편소설 『한 명』(현대문학, 2021)을 읽고
김숨 작가는 1974년 울산 출생, 1997년 『대전일보』, 1998년 『문학동네』 등단. 소설집 『투견』 『침대』 『간과 쓸개』 『국수』, 장편소설 『백치들』 『철』 『나의 아름다운 죄인들』 『물』 『바느질하는 여자』 『L의 운동화』. 〈현대문학상〉 〈대산문학상〉 〈이상문학상〉 등 수상. - 작가소개에서
30년 가까이 함께 한 모임에서 일본으로 여행을 가자고 한다. 나는 여행에서 빠지기로 했다. 일본은 내게 그런 곳이다. 돈 들여서까지 가고 싶지는 않은. 오래전, 조정래 작가님의 아리랑을 읽고 나서 일본 기피는 더 심해졌다. 마침, 여행 계획을 이야기할 때 나는 김숨 작가의 『한 명』을 읽고 있었기에.
이 책은 EBS 윤고은의 북카페에서 염승숙 작가님이 소설을 읽고 소개해 주는 코너에서 들었다. 올 2월 말에 삼일절을 앞두고였다. 작가가 시대정신과 의무감을 느끼고 쓴 책, 독자의 의무로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라고 소개하는 이 책은 한 장 한 장 다음 장을 넘기기 두려워 시간이 무척 오래 걸려 읽은 책이다.
한강 작가의 노벨상 쾌거는 또 한 명의 노벨상을 바라게 한다. 한강 작가의 작품이 “인간의 고통과 치유”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김숨 작가 또한 그와 결이 맞는 묵직한 책들을 써내고 있다. 김숨 작가는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실상을 고발하는 이 책 이외에도 고려인 150년의 역사를 4년간의 집필 과정을 통해 펴낸 『떠도는 땅』으로 “인간 존엄의 역사를 문학으로 복원해 온 그가 한국문학장(場)에 뜨거운 숨을 불어넣고 있다”라는 평가를 더욱 굳혔다.
『한 명』은 316명의 위안부 피해자의 생생한 증언을 바탕으로 한 소설이다. ‘증언 문학’이 갖는 힘이 있으며, 작가가 구축한 세계가 얽혀서 소설은 완성된다.
주인공인 그녀는 열세 살에 강가에서 다슬기를 잡다가 만주로 끌려가 위안부가 되었다. 그녀가 만주 위안소에서 7년 동안 보고, 듣고, 겪은 이 땅의 소녀들 이야기는 그들의 삶과 죽음, 역사를 면밀하게 보여준다. 이야기는 일본군 위안부가 모두 돌아가시고, 한 명만 생존해 있다는 설정으로부터 시작된다.
1930년부터 1945년까지 20만 명에 달하는 여성이 일본군 위안부로 동원되었고, 그중 2만 명만이 살아 돌아왔으며, 그중 238명만이 피해자로 등록했다. 등록한 그들의 핍박받는 삶을 들여다볼 때, 스스로 나설 수 없었다. 책 속의 그녀는 그토록 처절한 아픔을 안고 70년 넘게 지난한 생을 이어가고 있다. 숨 한번 크게 쉬는 것이 두렵고, 자신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이 두렵다. 한 명이 죽으면 사라질, 70여 년을 잊지 않으려고 복기했던 역사를 끝내 알리고 죽고 싶다는 생각으로 집을 나서는 결말은 아직도 끝나지 않는 고통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그녀는 조카가 세입자로 되어 있는 재개발 예정지 15번지 양옥집에서 5년째 살고 있다. TV 뉴스에서 생존해 있는 단 한 명의 위안부 할머니에 대한 소식을 듣는다. 그 한 명이 생명이 위독한 상황이라고. 그녀는 수없이 되뇐다. ‘여기 한 명 더 있다. 나도 피해자다.’
『한 명』을 읽으며 서사를 따라 읽기 힘들었다. 글자로 마주하는 내력이 너무 무섭고 두려웠다. 열세 살 여자아이가 겪어 내야만 할 세상이 너무도 참담했다. 할머니가 된 그녀가 과거를 회상하는 부문과 현재를 엮어가며 진행된다. 그녀의 몸부림쳐지는 삶의 순간들이 숨 막히게 다가온다.
“소녀들이 정신대로, 위안소로 보내지는 동안 소년들은 탄광으로, 제철소로, 군수공장으로, 비행장으로, 철도 공사장으로 징집되어 갔다.”(p87)
할머니가 된 그녀의 기억은 몸서리쳐지는 부분이 대부분이다. 현실과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가 마치 질 수 없다는 듯 과거도 현재도 참혹하기는 마찬가지다. 전쟁이 끝나고도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은 녹록지 않다. 전쟁이 끝난 후, 몇 달 만에 겨우 찾아간 고향 집에서도 반겨주는 사람이 없다.
“살아서 돌아왔지만, 호적을 살리지 못해서 그녀는 여전히 죽은 사람이었다. 그녀의 호적을 살리기 위해 서두르는 형제지간 하나 없고, 그게 얼른 되는 일도 아니어서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p170)
재개발 예정지인 15번지는 한 집 한 집 비어 간다. 그녀가 늙어가고 영혼이 사그라드는 현상과 비슷하게 읽힌다. 한 명 남은 사람의 목숨이 저물어가고 있는 것처럼. 15번지. 사람이 한 명도 살지 않는 골목길에서 우는 여자도 보이고 어린아이도 보인다. 그들은 그녀의 어린 시절이고, 그녀의 젊은 날이기도 하다. 그녀의 엄마이기도 한 환영은 아닐지 생각하게 된다.
그녀는 구십을 넘겼고, 정신이 오락가락하기도 한다. 한 명 밖에 남지 않은 위안부들의 실상이 가늘고 희미하게 옅어지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그녀는 뉴스를 보고 있다. 한 명에 대한 소식이 듣고 싶다. 가슴을 후벼 파는 듯한 시적 묘사들이 막막하고 울컥해서 눈물이 올랐던 순간들이 많았다.
“그녀는 한 명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여기 한 명이 더 있다는 걸 세상에 알려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p236)
재개발 예정지였다가 재개발이 무산된 15번지는 사람들이 살지 않게 된다. 93세까지 살아온 그녀의 삶이 허물어지고 있는 것과 비슷한 운명이다. 그녀의 세계가 허물어지고 있는 모습으로 치환된다.
「작가의 말」에서
“위안부는 피해 당사자들에게는 물론, 한국 여성의 역사에 있어서도 가장 끔찍하고 황당한, 또한 치욕스러운 트라우마일 것이다.”(p286)
그녀가 기억하는 위안부의 실상은 죽지 못해서 살아가는 여성들이 폭행과 인간이하의 취급을 받는 모멸과 황당함과 그 어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아픔과 죽음까지 상상 이상의 세계가 펼쳐진다. 인간의 존엄이 존재하지 않는 텅 빈 세계가. 엄밀히 존재하는 역사가 묻히고, 숨겨지고 있는 현실을 파헤친 작가의 행보에 고개가 숙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