뱃줄 달고 미국 여행
남편이 뱃줄을 달고 살아온 지가 근 5년이 가까워 온다. 하인두암 수술을 받은 남편은 입으로 음식을 섭취하기가 어려워 위에 튜브를 삽입하여 뱃줄로 경관식 영양공급을 하며 살고 있다.
암이라는 무서운 터널은 빠져나오고 있지만 뱃줄을 달고 산다는 것은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다. 이렇게 견디고 있는 남편의 의지도 대단하지만 이를 준비하는 보호자도 항상 긴장 상태에 있다.
보호자인 나는 남편의 뱃줄식사를 위해 여러 가지 준비를 꼼꼼히 해야 한다. 그나마 영양을 고루 갖춘 유동식을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이 유동식을 높은 곳에 매달아 뱃속으로 흘러 들어가게 해야 하는 데, 집 밖에서는 그 조건을 찾기가 쉽지 않다. 또 오염방지를 위한 소독도 필수이다. 그러니 집 바깥에서 식사를 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고 집을 떠나 멀리 간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어쩔 수 없이 외식해야 할 때, 우리 식구는 남편이 편히 식사할 수 있는 장소 물색에 온 신경을 썼다. 개별 룸이 있는 식당이 최선이지만 그런 곳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식당에 들어서면 우리 가족은 그곳이 경관식을 매달 수 있는 환경인지를 제일 먼저 살펴본다. 온 가족이 식당을 두리번거려 종업원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든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데 요즈음 식당들은 인테리어를 깔끔하게 하느라고 벽에 옷걸이나 그림을 건 곳이 별로 없다. 도저히 경관식을 걸 장소가 마땅치 않으면 집에 돌아올 때까지 남편 혼자 배를 곪고 앉아있어야 했다. 참으로 딱한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남편은 위루술을 한 초기에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식사를 하지 않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집 밖에서도 뱃줄 식사를 하게 되었다. 밖에서 식사해야 할 때면 나는 남편의 식사주머니에 경관식과 연결 줄, 물, 주사기, 물통, 소독제, S자고리(이것은 경관식을 메달 때 매우 유용하게 쓰인다) 등 뱃줄 식사에 필요한 도구들을 빠짐없이 챙긴다. 이 중 하나라도 빠지면 배를 굶어야 하는 불상사가 생기므로 준비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 나는 머릿속으로 경관식을 메다는 것부터 차례로 도상훈련을 하며 준비에 임한다. 그럼에도 어떨 때는 무언가 하나씩이 빠져 진땀을 흘리기도 한다.
미국에 사는 아들내외가 우리 부부의 미국 방문을 자꾸 권해왔다. 아들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지 8년이 지났다. 그동안 아들은 박사학위를 받았고 취업하였으며 결혼하여 자기 가정을 꾸렸다.
처음에는 아들이 공부 중일 때 방문하여 아들의 전열을 흐트러뜨리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여 미국 방문을 자제하였다. 그 후 남편이 희귀 암에 걸려 4년 너머의 세월을 사투를 벌였고, 코로나 팬데믹까지 겹쳐 여행하기가 쉽지 않았다. 정년퇴직을 눈앞에 두고 있던 나는 퇴직 후 미국으로 가서 아들내외의 신혼살림을 보고 싶은 희망을 품었다. 그러나 남편이 생사의 기로에 처하게 되자 나의 가고 싶은 곳들, 하고 싶은 일들의 의미가 퇴색되고 말았다. 아들 집을 방문한다는 것도 요원한 일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올해 들어 남편이 기운을 좀 차렸는지 가을쯤 아들에게 한번 다녀오자고 하였다. 나는 반색을 하였다. 미국에, 그것도 아들이 살고 있는 곳에 한번 가보고 싶다는 소망이 고개를 들고 왕성히 일어났다.
그래서 올 초부터 가까운 곳으로 예행연습을 해보기로 하였다. 먼저 친구들과 쿠슈로 온천여행을 갔다. 남편은 뱃줄식사로 버티며 3박 4일의 일정을 무사히 마쳤다. 그렇게 좋아하던 일본 사케도 마시지 못하고 온천에도 들어가지 못했지만, 남편은 친구들에게 누를 끼치지 않고 여행에 동참할 수 있었다.
그 여행이 자신감을 갖게 했는지 남편은 그다음 달, 친구들과 쿠슈로 골프여행을 떠났다. 남편이 쿠슈에 있는 동안 나와 딸, 언니들이 쿠슈로 가서 나가사키 지역의 성지순례를 남편과 같이 하였다. 그러니 남편은 한 열흘 정도 집을 떠나 있게 된 셈이었다. 남편은 그동안 살이 좀 빠지긴 했지만, 그럭저럭 견뎌주었다. 돌아와서도 드러눕지 않았다.
열흘의 외출에서 역시 가장 큰 어려움은 남편의 식사 준비였다. 한 끼의 경관식이는 500킬로칼로리의 열량을 내도록 구성되어 있는데 무게도 500그램이었다. 하루에 세끼를 먹으려면 1.5킬로그램의 경관식이 필요했다. 만일 열흘을 여행한다고 하면 15킬로그램의 유동식이 있어야 한다. 그것뿐만 아니라 연결줄도 있어야 하고 거기에 딸린 도구들도 늘어놓으면 한참이다. 그러니 여행 가방의 대부분이 남편 식사로 채워졌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예정된 가을이 다가왔다. 우리 부부가 아들이 있는 마운틴 뷰에 도착하면 뉴욕의 딸과 사위도 그리로 와서 우리 여행에 동참하기로 하였다. 온 가족이 다 모일 생각을 하니 미리부터 마음이 설레었다.
여행 기간은 총 한 달로 잡았다. 아들은 우리 부부를 위해 미국 서부의 <그랜드 서클 투어>와 요세미티국립공원에 호텔을 예약해 놓았다고 하였다. 딸 내외가 렌터카를 하여 샌프란시스코 근처의 가이드를 하겠다고 자처하고 나섰다. 그리고 나파밸리에서 사흘간 가족 유니언행사를 가질 계획임을 알려왔다. 더 보탤 것도 없는 훌륭한 계획으로 보였다. 거기다 나는 세쿼이아 국립공원에 가서 울창한 자이언트 세쿼이아의 위용을 보고 싶었고 해변으로 난 1번 도로를 달려 페블비치까지 가보고 싶었다. 나의 이런 희망을 전하자 아들은 “WHY NOT?”이라며 모든 것이 가능할 듯 선선히 대답하여 더욱 나를 설레게 했다(나중에 가서 보니 쉬운 일정은 아니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여행은 실제 여행보다 여행계획을 세울 때가 더 행복한 법이다. 나는 오랜만에 엔도르핀이 샘솟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우리 앞에는 가장 큰 난제가 놓여있었다. 그것은 남편의 식량을 미국으로 가져가는 일이었다. 경관식의 구입은 의사의 처방전이 필요하므로 미국 현지에서 구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보내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그런데 그 양이 엄청났다. 앞에서 계산하였듯이 하루에 1,500그램의 유동식을 섭취한다면 한 달이면 무려 45킬로그램의 유동식이 필요했다. 한 상자에 거의 8킬로그램씩의 유동식을 넣는다면 한 달간의 식량으로 여섯 상자의 유동식이 필요했다. 짐으로 가져갈 수 없는 무게였다.
그래서 우편으로 보내기로 하였다. 그런데 신원미상의 액체를 미국으로 보내려고 하자 우체국에서 제동을 걸었다. 테러 사건이나 마약 사건으로 인해 미국 우정국이 배송물품에 굉장히 엄격하다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미국까지의 거리가 있어 비행기 내에서 뱃줄 식사를 한 두 번은 해야 했다. 역시 기내에 액체 유동식과 물을 가지고 들어갈 수가 없는 상황이 문제였다. 항공사에 문의했더니 공항 부서 여러 곳을 한참을 뺑뺑이를 돌리며 난감해했다. 자기들도 이런 경우는 처음 본다고 하였다.
우리는 의사의 소견서를 받았다. 그 소견서를 경관식 상자마다 넣어 미국으로 보냈다. 운송료가 거의 100만 원이 들었다.
짐을 보내고 일주일쯤 지나자 아들 집으로 경관식이 배달되었다는 연락이 왔다.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제 제일 중요한 관문은 넘어섰다. 남편의 식사가 갔으니 이제 미국까지 갈 수 있게 된 셈이었다.
나는 영화 <미나리>에 나오는 할머니(윤여정분)처럼 까만 봉지에 한국 음식을 이것저것 잔뜩 챙겨가고 싶었다. 그런 내 마음을 눈치챘는지 아들딸이 음식을 넣어오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였다. 미국에 한국 음식이 없는 게 없는 데다가 괜히 이상한 가루음식을 넣었다가 마약으로 오해받으면 귀찮은 일이 생긴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래도 참기름과 시골 고춧가루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 없어 이것들을 몰래 짐 속에 넣었다. 그런데 출발 전날 남편의 최종 검열에 걸리고 말았다. 숨긴 식품을 내려놓으면서 남편의 검열이 미국 세관보다 더 준엄하다고 툴툴거렸다.
이런 우여곡절을 거쳐 위루술 환자와 함께 가는 미국여행 준비가 끝났다. 여행을 무사히 마칠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