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DreamHunter Jul 09. 2024

안녕, 루나

Lunar라는 사모예드 이야기

우리 할아버지는 일제강점기 즈음 미쯔비시 계열 대학에서 유학을 마친 친일파입니다. 그렇다고 민족을 배신하고 국가를 팔아 매국 행위를 한 것은 아니고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유학을 다녀온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만 실제 그런 역사가 있다고 한들 집안에서는 감추려 했을 테니 제가 모를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것보다 더 궁금한 것은 할아버지 자체입니다. 제가 태어나기도 전에 할아버지는 돌아가셨기에 제사상에 오른, 아버지보다 젊은 흑백 사진 한 장이 제가 기억하는 할아버지 모습 전부입니다. 1923년 생이신데 키가 184에 일본 유학파로 큰 개를 데리고 사냥 다니기를 좋아했으며 고향에서 정미소랑 과수원 등을 운영하셨다니 무엇 하나 빠지는 것이 없는 양반입니다. 


이처럼 저랑은 반대 스펙으로, 제가 꿈꾸는 남자 모습이다보니 손자로서 할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랑은 다른 호기심이 피어오릅니다. 어려서 어쩌다 한 번씩 아버지에게 듣게 된 할아버지 이야기 중 오늘은 개랑 얽힌 이야기를 써보겠습니다.


꿩 대신..

우리 할아버지 개사랑은 지역에서 유명했습니다. 독일 선교사가 데리고 온 검은색 셰퍼드를 누군가 훔쳐왔고 그 당시에는 볼 수 없던 그 특이한 개를 살만한 부자를 찾다가 할아버지가 듣고는 거금을 주고 구입했다는 일화나 당시로는 드물게 개를 훈련시키는 것에도 돈을 썼다니 사람들이 손가락질할 정도라고 했습니다. 한국 전쟁이 끝난 지 얼마지 않은 60년대 폐허 속에서 이런 곳에 큰돈을 쓴다니 단순히 고급스러운 취미라고 하기에는 너무 지독한 사치인 것은 맞습니다.


여하튼 그런 할아버지 피를 타고났는지 저 역시 개라면 정신을 못 차립니다. 날 위해 불구덩이라도 뛰어드는 충성심이랑 아무리 천재 보더콜리라 해도 죽을 때까지 내 지능은 넘지 못한다는 안도감은 그 어떤 인간도 따라가지 못합니다. 고양이는 말할 것도 없고요. 더구나 대형견들이 보이는 그 강력한 힘은 나약한 내 육체 컴플렉스를 치유하듯 마음이 뻥 뚫리는 쾌감마저 줍니다.


헤븐, 인스타: heaven_S2


그중 단연 백미는 썰매견이라고 불리는 늑대를 닮은 계열입니다. 허스키, 사모예드, 말마뮤트 놈들은 언제 보아도 가슴이 웅장해집니다. 큰 키, 단정한 입술, 색감이 완벽한 털은 사진으로만 보아도 황홀해집니다. 실제로 보면 미치고요.


호주는 손에 꼽히는 사막입니다. 썰매개가 살 이유도 없고 살아서도 안 되는 기후입니다만 인간들은 자기들 관상 욕심으로 눈 속에서 살아야 하는 그들을 이 사막에 가져다 놓고 팝니다. 우리 할아버지가 그랬듯이 여기도 큰돈을 주고 녀석들을 구매할 사람들이 많습니다. 잘 팔립니다. 썰매개들이 혹독한 호주 여름을 보내기 위해 냉장고를 만들어 파는 Cool room제작사도 있다니까 그만큼 수요가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릴때는 귀여워서 입양했으나 성견이되면 버림받는 테리어 계열

호주 사람들이 동물권에 관심도 많고 개를 대하는 문화도 나름 선진국이라 하지만 그래도 버리는 사람은 있습니다. 그리고 지역마다 큰 구조센터가 있어 저도 오며 가며 관심 있게 보다 자원봉사를 지원하기도 했습니다. 불행히도 몇 가지 조건이 맞지 못해 탈락하기도 했지만 지금도 종종 가보곤 합니다.


어차피 데려올 형편도 못되지만 혹시나 입양을 하려면 어떤 것이 필요한지 어떤 강아지들이 그 안에 있는지 궁금하기 때문입니다.


그곳에는 주로 나이가 많거나 아픈 녀석들이 버려져 있고 품종이라면 털이랑 다리가 짧고 머리가 큰 불테리어 계열이 주를 이룹니다.


가끔 죽은 어미 곁에서 발견되거나 사고를 당한 어린 강아지들도 아주 없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예쁘다고 해서 신청한다고 해서 곧장 입양하지는 못합니다. 개 품종이나 개체 성향을 고려해서 정부 관리사가 정해 놓은 규정을 만족시키는 신청인에게만 허락합니다. 가령,


개를 키워본 경험은 있는지;

집에 마당이 있는지;

집은 소유인지 전세인지;

집에 어린아이가 있는지;

집 환경은 어떤지;

다른 반려 동물은 있는지.  


행색이 유학생스러우면 비자 확인도 하며 직원이 집에 직접 방문하여 위에 사항을 꼼꼼하게 조사하기도 합니다. 이런 조건이 맞지도 않지만 돈벼락이라도 맞아서 큰 집으로 이사 간다 해도 하루 종일 일하며 집에 있을 팔자는 아니니 개 혼자 덩그러니 집에 둘 수도 없는 상황이라서 언감생심으로 그냥 꿈이나 꾸죠. 


내 개를 가지는 꿈. 평생 이루지 못할 개꿈입니다. 


우리 집에 찾아온 루나, 2024

지금 제가 사는 단지 안에는 개를 키우는 집들이 많습니다. 종류도 다양한데, 은퇴한 경주견 "우동"이는 현역 시절에는 번개처럼 빨랐겠지만 이제는 다리가 불편한지 비가 오나 밤이 오나 가족들 정성 어린 보살핌을 받으며 조심조심 산책을 다닙니다. 


중국계 키 큰 아줌마랑 밤산책을 주로하는 까칠한 검은 푸들 녀석은 저만 보면 짖지만 밉지는 않습니다.


정문 옆에 사는 '찰스 스파니엘' 계열인 던칸은 얼마 전에 토이 푸들로 보이는 동생도 생겨서 그집 딸들이랑 단지 안에서 뛰어놀고 장난치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무엇보다 제가 가장 친해지고 싶은 것은 코너 집에 사는 사모예드 "루나"입니다. 


루나 어려서 가끔 마주치면 인사로 한 번씩 만져주고 말았는데 얼마 전에 루나 견주랑 한 참 이야기를 할 기회가 생겼습니다. 썰매개를 좋아하고 사모예드가 너무 멋지다고 하자 루나 엄마는 몇 호에 사냐고 묻더니 당신 아내도 알것 같다며 하시라도 놀러 와서 루나를 보고 가라고 합니다. 산책도 시켜주고 자신들이 여행 가면 부탁도 하겠다니 순간 제 소원이 이루어지는 듯한 축복이 눈앞에서 현실로 이루어집니다. 내 개는 아니지만 사모예드 같은 대형견을 손수 데리고 산책시키는 호주 생활이라니요! 


지금 호주는 겨울에 우기라 산책을 하기에는 아주 지랄이지만 그날 이후 매일같이 제 머릿속에는 루나랑 어디 놀러 가는 생각뿐입니다. 그러다 문자로 루나 엄마에게 언제 시간이 좋냐고 보내니 아무 때나 오라고 해서 아내랑 선물도 챙겨 가지고 루나 집으로 갔습니다.


마침 루나 아빠가 밖에서 담배를 피우다 우릴 보았고 곧장 루나랑 집에 사는 다른 개들도 큰 소리로 짖기 시작하니 루나 엄마랑 아이들도 모두 나왔습니다. 코너 집이라 사람이 다니지 않는 구조인데 누가 왔으니 온 집안이 씨끌벅적할 수밖에요. 


뭘 이런 것을 다 사 왔냐며 내복 바람에 우릴 맞이하는 루나 아빠는 집으로 들어오라는 것이 마치 오래 알고 지낸 친척형 느낌입니다. 루나 보러 왔다고 말을 끝내기도 전에 벌써 산책 준비를 마치고 신이 나서 뛰어나오는 루나가 뒤에서 보입니다. 그렇게 루나를 데리고 평소 내가 좋아하던 근처 개공원으로 갑니다. 개도 없으면서 가끔 개공원에 가서 청승맞게 남의 집 개를 만지작 거리다 오곤 했는데 이제는 나도 데려갈 개가 생겼으니 세상 이렇게 뿌듯할 수가 없습니다.


밤이 어두워 사진은 찍지 못했지만 루나에게 끌려 개공원에 가니 '데킬라'라는 한 살짜리 보더콜리 여아도 있어서 마치 내가 주인인 양 서로를 인사시키고 데킬라 견주랑 자연스럽게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는데 데킬라가 흥분했는지 응가하는 것을 내가 대신 치워주며 세상에서 가장 자상하고 개를 사랑하는 아빠가 되어 봅니다. 데킬라 엄마 역시 이런 내 모습에 칭찬이 끊이지 않습니다. 


서울 못 가본 놈이 서울 이야기는 가장 재미있게 한다더니 말입니다.


그리고 요즘은 대형견 중에서도 사모예드에 관한 것을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루나가 보이는 행동에는 아무래도 너무 극성이라 자칫 사람들에게 오해를 사거나 지금 아니면 고치지 못할 습관이 보여서 짐승 욕구를 조금 줄이고 인간 문명 속에 적응하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우선 루나는 산책을 하루에 두 번 정도 하지만 제대로 된 산책은 할 줄 모릅니다. 산책을 하려면 긴 줄로 루나가 자유롭게 움직이면서 견주랑 호흡을 맞추고 주변에 사람이나 다른 개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행동을 해야 하는데 우리 루나는 그렇지 못합니다. 


호주 모든 사람들이랑 다 통성명하고, 세상 모든 강아지 고양이랑 친구 먹는 것이 루나 목표입니다. 그 과정에서 상대 의견이나 큰 개를 무서워하는 사연 등은 생략됩니다.  


산책도 우선은 가까운 장소에 매일 비슷한 시간에 가야 흥분도 낮추며 일상이 되는데 우리 루나는 4년을 공시준비 하다가 갑자기 홍대 나이트 약속 잡힌 금요일밤 mz처럼, 산책 말만 나오면 매번 1m씩 흥분 점프를 합니다. 누가 보면 태어나서 산책 처음 가는 강아지인데요. 이렇게 흥분이 심한 상태로 나가면 올바른 산책이 될 수 없으니 조금은 가라앉히고 주의를 준 다음에 나가는 것이 맞다는 조언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런 정보를 정리해 루나 엄마에게 전달하자 무척 불편해하는 답변이 옵니다. 사실 아주 예상 못한 것도 아닙니다. 


"Luna - needs shorter lead actually as she is hard to control,  she is running Z shape routes, and I need to worry about strangers, some are afraid of dogs. And Luna will run into bushes getting herself lots of weeds on her fur.  I think the knowledge i get is from difference source. Dog park is good for her but enfield park and strath field south Elliot reserve are not too good , reason is. Muddy and dog bites incident happens a lot! I heard it happen from time to time. We can't control other dog , and Australian love bulldog and pit bulls they are too violent."


루나는 제 멋대로 뛰어다니기에, 긴 줄로는 제어가 어렵고요. 행인 중에 개를 무서워하는 경우, 달려들까 봐 걱정이 되어서요. 그리고 루나는 종종 풀 속으로 들어가는데 털에 온통 잡풀을 달고 온답니다. 그래서 전문가들이 말하는 것이랑 현실은 달라요. 그리고 근처 개공원에는 데리고 가지 마세요. 거긴 진흙 투성이에 가끔 개들끼리 싸움도 있답니다. 알다시피 개는 우리 마음 같지 않아요. 그리고 호주에서 인기 종인 불독도 공원에 많아서 위험하고요.

그건 산책이 아니고 노동이다, 루나야.

지금 루나가 하는 것은 산책이 아니고 그냥 무거운 사람을 끌고 냅다 달리면서 힘겨루하는 노동입니다. 하지만 루나 엄마 마음도 이해는 갑니다. 저야 루나를 보내고 오면 그만이지만 집 안에서 사는 루나가 온통 잡풀에 진흙 차림으로 돌아온다면 저라도 싫겠습니다. 


더구나 루나는 털 구조상 한 번 목욕을 하면 말리는데만 족히 네 시간 이상 걸릴 만큼 촘촘하고 길어서 한 시간 산책하고 다섯 시간 목욕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말이 안 되는 일이죠. 그리고 364일 안전하다가도 얘가 또 흥분해서 어떤 사나운 녀석 심기라도 건드린다면 큰일 입니다. 그 비용에 책임은 누구 몫인가요? 무엇보다,


루나 엄마 교육 철학이 확고한데 옆집 아저씨가 무슨 권한으로 참견하나요.


루나가 만약 인간 언어를 할 수 있다면 엄마를 네가 설득해보라고 하고 싶습니다. 루나처럼 지능이 높은 아이들은 어쩌면 가능하지 않을까하는 말도 안되는 상상이지만요.




고양이나 개는 태어나서 완전 독립까지 3개월 정도가 걸린다고 합니다. 태어나는 동시에 바로 먹이를 찾아 나서는 다른 짐승들에 비하면 상당히 오래 부모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경우입니다. 그 3개월 동안 개는 자기 욕구를 울음이라는 언어를 통해 보호자에게 요구합니다. 결국 그들은 3개월 동안 언어를 습득하는 유아기를 보내기에 기호를 바탕으로 한 단순한 언어 체계를 가지게 됩니다. 기호는 일대일 matching 값을 기본으로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그들 언어관에선 <루나~>랑 <루나야~>는 완전히 다른 것이라 이름 하나도 통일해주지 않는 주인이 변덕스럽습니다.  


반면 인간은 완전 독립을 위해 몇 년을 부모 손에 자라나요? 그 과정에서 부모를 향한 우리 요구는 점점 복잡해져 갑니다. 그 복잡한 요구가 지금 우리가 쓰는 복잡한 언어를 만들었고 이 복잡한 언어는 우리 무의식을 잉태했습니다. 우리가 쓰는 언어는 시니피앙이라는 기표를 사용해서 전후 맥락이나 목소리 톤, 분위기 등을 다 포함합니다. 


그럼 루나처럼 기호로 된 언어 체계를 가진 짐승은 무의식이라는 것도 혼魂이라는 것도 없겠습니다. 보이지 않는 사상은 그들 기호-언어로는 표현할 수가 없으니까요. 결국 개들은 神이라는 대타자도 없기에 죽어서는 천국도 지옥도 가지 않습니다.


그럼 요즘 대세인 AI는 무의식을 가지게 될까요? 최근 AI는 문자만 습득하는 단순한 구조를 넘어 이런 온전한 기표성을 담기 위해 영상을 주입한다고 합니다만 언어가 복잡해진다고 해서 자동으로 무의식을 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태어남을 겪고 그 후에 양육자 손에 자신 운명을 맞기는 극도로 결핍한 경험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무의식이 없는 AI는 그냥 암기력이 무한대인 앵무새일 뿐입니다.  



이야기가 샜습니다. 루나 이야기를 마무리하겠습니다. 루나가 저에게 준 선물은 또 있습니다. 뵈 온 적도 없는 우리 할아버지. 하지만 루나를 통해서 벌써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저랑 희미하게나마 연결되는 기분을 느낍니다. 수 십년 시차를 초월하고 호주라는 대류까지 관통하는, 피를 타고 흐르는, 무엇인가가 있는지 그냥 내 안에서 만들어진 환상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루나, 미안해. 

내가 널 사랑하지만 온전히 소유한 것은 아니니 더 이상은 어찌해볼 도리가 없구나.

그리고 지금 루나 엄마 역시 현실에서 널 가장 사랑하고 아끼는 분이니까 나도 걱정은 안 해.


공원에서 우연히 본 다른 강아지들을 봄에 낑낑 거리며 찻길을 건너가고 싶어 하던 네 모습에서 무엇을 원하는지 고민하다 이 글까지 쓰게 되었구나. 다른 강아지들이랑 놀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는 네 모습이 안타까웠는데 그건 널 소유한 엄마가 원하는 바는 아니기에 더 이상은 내가 들어줄 수 없겠다. 다시 한번 미안하구나. 


하지만 엄마도 인정하면서 루나가 행복할 방법이 있을지 계속 고민해 볼게. 불테리어도 없고 잔디도 거의 없는 깨끗한 공원에서 루나만 뛰어놀 수 있는 환경을 찾아 보마.


그럼 안녕, 루나...


루나, 2024


모두들 사랑하며

시드니에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