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기회가 되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오일 동안 군대에서 있었던 일 중 사람과 말을 주고받은 마지막 이야기.
스무 살 무렵 신체검사까지 내가 가지고 있는 병을 찾지 못해서 나는 현역병으로 군대에 갔다. 군부대까지 가는 내내 잠을 자고 있어서 어느 지역에 있는 무슨 부대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서울 근처 어느 부대였을 것이다.
빡빡 깎은 머리로 나와 엇비슷한 남자들과 열을 맞춰 서있자니 온 세상 모든 게 낯설었다. 그때 당시 형이 따라왔는데 나를 어찌나 불쌍히 보던지, 말 그대로 강가에 내놓은 아이처럼 바라봤다. 나는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몰랐기에 애써 웃어 보였다.
내무반으로 가기 전에 한번 더 신체검사를 받았다. 드넓은 강당 같은 곳이었는데, 이곳에서 입영식, 단어가 잘 기억나지 않지만 군인이 됐다는 기념행사를 했다.
전우, 내무반, 경례하는 법, 불침번 등. 오일 동안 별달리 한 일은 없었다. 간부들이 하는 건 부적합한 병사가 있는지 찾아내는 일. 그들은 입버릇처럼 집에 가고 싶은 사람이 없는지 물었다. 나는 마지막 날, 그러니까 금요일까지 버텼으나 끝내 집에 가겠다고 우리 반 간부에게 말했다.
귀가자. 신병 교육을 받기 직전에 훈련소에서 나가는 사람들을 그렇게 부른다. 귀가자 중 대부분은 재입대를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진실이 너무 늦게 찾아온 셈이었다. 그러나 나의 귀가자 전우가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어떻게 생겼는지, 어디서 왔는지, 이름이 뭔지, 하나도 모른다. 어쩌다 귀가를 하게 됐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뭐라고 말을 주고받긴 했으나 대부분 감정을 토해내는 말일뿐이었다. 두렵다거나, 무섭다거나, 앞으로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겠어서 답답하다라거나, 그런 말을 직접 할 수 없으니 다른 말로 한 셈이다.
그때는 6월이었고, 이름 모를 군부대 건물 바닥에 햇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귀가자 전우는 얼굴이 반쯤 햇빛에 젖은 채 내게 대뜸 그렇게 말했다.
“천만 원을 모았어요. 천만 원을.”
아무 맥락 없이 나온 말이라 당황스러워 뭐라고 답하지 못했지만, 어떤 답을 바라고 한 말이 아닌 듯했다. 귀가자 전우는 고백한 사춘기 여학생처럼 고갤 다소곳이 떨구고 있었다.
그 말을 끝으로 우린 어떤 말도 주고받지 않았다. 우리가 어떻게 헤어졌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기차역까지 가는 차에서 함께 앉았는지도 모르겠다. 기억나는 건, 천만 원을 모았다며 고백하듯 말한 귀가자 전우의 목소리뿐.
기둥 같은 무언가 떠받치고 있다면 삶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그것은 신념일 수도 있고, 사랑일 수도 있고, 보잘것없는 믿음일 수도 있다. 어쩌면 천만 원을 모았다는 사실일지도 모른다. 귀가 조치를 받을 당시 나는 삶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사회가 나에게 ‘부적합’이라는 딱지를 붙인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아마도 나의 전우 또한 그렇게 느끼지 않았을까. 그런 전우를 지켜준 건 천만 원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누구도 빼앗지 못하는 것, 그럴싸한 신념이나 믿음직스러운 사랑이 아닌 천만 원.
그때 그 전우가 어디서 뭘 하며 살고 있는지는 모른다. 그때 당시엔 나를 챙기기도 바빴다. 설령 알 수 있다고 해도 별로 알고 싶진 않다. 누구나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 하나쯤은 갖고 있기 마련이니, 그게 무슨 느낌인지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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