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에 추위를 피해 따뜻한 나라로 여행을 떠나는 사람이 많다. 이들은 우리나라 날씨에 맞게 패딩을 입고 공항까지 간 다음 겨울옷은 보관하고 여행지에 적합한 옷으로 갈아입고 비행기를 타는 사람이 많다. 물론, 여행지에 도착해 옷을 갈아입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여행을 떠나는 사람은 여행지에 적합하게 옷을 입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추위나 더위로 여행은커녕 생존조차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퇴직자의 퇴직은 직장이라는 오랜 여행지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직장인은 출근하면 직장이라는 여행지에 맞는 옷을 입는다. 퇴근하면 가정에 접합한 옷으로 갈아입는 것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은 피곤하고 귀찮다는 이유로 직장에 재직하는 동안 직장에만 적합한 옷을 계속 입었다. 다행히 이해심이 많은 가족으로 인해 별다른 문제없이 긴 세월을 보낼 수 있었을지 모르나 퇴직하는 순간에는 더는 직장에 적합한 옷을 입어서는 안 된다.
옷을 갈아입을 때는 직장에서 묻은 먼지를 털어내야 한다. 직장에서만 사용하던 지랄 리더십, 후배 갈구기, 일방적인 지시, 상대 말은 듣지 않고 자기 말만 하기, 모든 것은 술로 해결하기, 시간이 나면 가족보다 동료 혹은 지인과 술 마시면서 시간 보내기, 스트레스받을 때마다 술 마시면서 뒷담화 하기 등은 퇴직 후에는 절대 사용하면 안 되는 먼지들이다.
퇴직자는 퇴직하는 순간 퇴직 후 삶에 필요한 역량을 스스로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직장인과 퇴직자라는 정체성의 차이는 매우 크다. 퇴직 준비를 잘한 사람은 제주도로 여행하는 것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퇴직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계절이 완전히 다른 나라로 떠날 준비를 해야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퇴직자가 퇴직 후 삶을 위해 가장 먼저 점검해야 하는 것이 가족과의 관계이다. 퇴직자가 가장 먼저 그리고 중요하게 여기는 퇴직 준비가 노후자금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퇴직자가 노후자금을 자기 의사나 의지대로 사용할 수 있는 기간은 건강할 때까지 만이다. 건강이 나빠지면 돈이 있더라도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못하면 생존에도 영향을 받을 수 있다.
필자의 어머니는 스스로 원하셔서 시골집에 혼자 계셨다. 근처에 누나가 살고 있어 수시로 어머니를 돌봤지만, 어머니가 하루 세 번 먹는 약까지는 볼보기가 어려웠다. 초기 치매였던 어머니는 당신이 약을 먹었는지 기억하지 못해 약을 과다하게 먹으면서 큰일 날 뻔했다. 다행히 며칠 고생하고 넘어갔지만, 그다음부터는 약을 드리지 않았다. 이런 상황은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이다.
또한, 노후자금을 퇴직자가 고스란히 자신들을 위해 사용할 수 있다는 보장도 없다. 앞에서 소개했던 글처럼 자녀가 이런저런 이유로 사정하고 협박하면 부모는 노후자금을 자녀에게 주면서 노후 계획이 틀어질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자신들의 운명은 자녀에게 맡길 수밖에 없다. 이처럼 퇴직자에게 가장 중요한 존재는 ‘가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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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했다’라는 뜻에는 역할의 변화도 담겨있다. 사람은 누구나 몇 가지 역할을 한다. 사교의 폭이 좁은 학생은 자녀, 학생, 손주나 친구 등으로 역할이 한정되지만, 직장인은 관계의 폭이 넓을수록 역할도 다양해진다. 가족은 직장인이 다양한 역할을 하는 것도 ‘가족을 위한 목적’이라고 여겨 가장 혹은 부모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더라도 이해를 했다. 하지만 퇴직 후에는 이해의 정도가 달라진다.
퇴직자가 퇴직 후에도 직장인과 같은 행동을 하게 되면 가족은 퇴직자의 정체성에 대해 혼동을 하게 된다. ‘직장인이었던 시절의 수입도 없으면서, 집에는 온종일 있으면서 가족에게 심부름시키고 집안일도 하지 않는’ 가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여기에 더해 혼자 조용히 시간을 보내지 않고 얼굴을 볼 때마다 트집을 위한 트집을 잡아 잔소리한다면 더는 가까이하기 싫은 진상 고객 취급을 당하게 된다.
가정은 자신이 평생 있어야 할 공간이고, 가족은 평생을 함께해야 할 사람이다. 이런 공간을 어떻게 가꾸느냐에 따라 평생 영향을 받게 된다. 가정이라는 공간을 불편하게 꾸미면 가족뿐만 아니라 자신도 불편해진다. 가족과의 관계도 공간이 영향을 미친다. 만약 자신만의 공간을 따로 마련해 혼자 살겠다고 결심하지 않은 한 가족을 위해, 가정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붓는 것이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노후대책일 수도 있다.
지인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지인 중에는 평생 함께하고 싶은 사람도 있지만, 가벼운 유흥을 위해 만나는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과 함께 하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가족 혹은 평생 함께해야 하는 사람과 같이 할 시간은 줄어든다. 또한, 유흥을 위해 만나면 어쩔 수 없이 술을 먹게 되고, 이것이 건강을 해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힘든 시간보다는 편안한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한다. 운동보다는 유튜브나 TV와 함께 하는 시간이 많은 이유도 운동은 힘들지만, 유튜브나 TV 시청은 힘도 들지 않고, 순간순간 재미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시간이 길어질수록 몸과 마음은 황폐해질 가능성도 있다. 농부가 밭에 씨를 뿌린 다음 관심을 두지 않으면 풀이 자라 새싹이 자라지 못하게 하는데 잡초를 처리하기 위해서는 수시로 관심을 기울이고 잡초를 제거하기 위해 공을 들여야 제대로 된 결심을 가질 수 있다. 가정 혹은 소중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는 큰 노력을 해야 한다. 이런 노력이 없으면 말년에 자신을 돌볼 사람도 없기 때문에 쓸쓸한 노후를 보내야 한다.
고독은 퇴직자의 가장 큰 적이다. 하지만 고독감을 느끼기 전까지 ‘나는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다’라는 막연한 믿음으로 인해 소중한 사람을 지키려는 노력을 게을리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에게는 그에 합당한 노력을 해야 상대도 ‘저 사람이 나를 소중하게 생각하는구나’라고 인식하면서 서로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조선 시대가 아니다. 예전에야 다른 사람의 눈이 무서워 억지로 부모를 모셔야 했지만, 지금은 ‘퇴직한 부모를 모여야 한다’라고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인 시대이다. 따라서 자녀를 효자로 만들기 위해서는 부모가 자녀에게 판을 깔아야 한다. 부모가 화목한 가정을 위해 자녀를 아끼고 사랑하며, 부모 모두가 가사에도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면 자녀는 부모가 힘들어지면 함께 살지는 못해도 쓸쓸하게 두지는 않을 것이다.
퇴직자가 퇴직 전이나 퇴직 후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내가 퇴직 후 가족과 함께 잘 지낼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을 하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다는 결론이 나면 ‘무엇을 변화해야 가족 혹은 지인과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에 대한 답을 찾아야 한다. 이런 노력이 모일 때 남은 삶의 질도 높아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