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킷 21 댓글 공유 작가의 글을 SNS에 공유해보세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건강이 운명이라면 #3

1장. 본성과 양육 (28살 수험 생활 이야기)

by 길바람 Mar 23. 2025

사실 조증은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닐까?

 이깟 토플이 뭐라고, 운이 따라주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며칠 동안, '신이 시험을 방해하는 것이 아닐까?' 싶은 일들이 벌어졌다. 우선은 예정에 없던 이사를 가게 되었다. 살고 있는 집 천장에 물 얼룩이 생기더니, 거실에 물이 떨어졌고 급기야는 내 방까지 얼룩이 침범했다. 룸메이트들이 집주인에게 항의를 했다. 안 그래도 셰어 하우스 사업을 접으려던 집주인은 사과와 함께 남은 일수만큼 월세를 환불해 주겠다고 했다. 뒤늦게 건물주 아저씨까지 찾아와 어느 업체 직원과 천장 부근을 살폈지만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그리고 뻔한 레퍼토리지만 조증이 터졌다. 예전에 만난 의사 선생님이 조증이 터지면 일주일 정도 간다고 했는데 그 일주일은 시험 다 끝나고 이 글을 적고 있는 지금까지 끝나지 않았다고 한다. 시험료는 30만 원이나 되는데 환불받을 수 없는 날짜는 이미 지났다고 한다. 시험장 근처에 세 시간이나 일찍 도착해 놓고 마음이 약해졌다. 힝. 엄마~아아. 하는 식으로 울며 불며 시험을 못 보겠다고 말하자 엄마가 화를 냈다.

"너는 이미 시험을 안 보겠다고 마음을 정해 놓았네. 그럴 거면 내 말을 왜 듣니? 끊고 집에 가!"

"아니 난. 지금 컨디션으로는 너무 형편없는 점수를 받을 것 같으니까. 안 보는 것이 차라리 낫지 않겠냐는 거야."

 엄마가 말을 무어라 한 바가지로 했는데 나는 이 말만 들렸다.

 "나는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하고 한 번 봐 보라는 거지."

 "그러면 엄마는 내가 엄청 낮은 점수를 받더라도 이 시험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

 "그래."

 그리고 나는 '엄마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볼게'하고 조선닷컴 교육센터로 갔다. 어떤 직원은 금속 탐지기로 내 몸을 조사했고, 다른 지역은 여권을 받아 확인한 후 매장의 바코드 인식기처럼 특이하게 생긴 카메라로 내 얼굴을 찍었다. 해외여행을 다녀오는 기분으로 시험을 치렀다. 끝마치는 버튼을 누르자마자 객관식 평가인 리딩과 리스닝 점수가 나왔다. 한 달 전에 치렀던 시험보다 올라 있었다. 직감과는 다르게 올라 버린 점수를 보고 나니 이상한 의구심이 들었다. 5년째 앓고 있는 조증이 정말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맞을까?  실은 존재하지 않는데 괜히 내가 웅크리고 있던 것은 아닐까? 하고 말이다.

 수험생으로서 앞만 보고 달리다가, 주변을 돌아보았다. 나는 스물여덟이었고 부모님과 남자 친구와의 관계는 건강해 보였으며 새로 이사 갈 집도 구했고, 학원 일도 금방 구해질 것 같았다. 괜히 당장 '토플 점수가 없으면 아무도 널 강사로 뽑지 않을 거야'라고 압박하는 나 자신만 평정심을 찾으면, 모든 것이 나쁘지 않게 진행될 것 같았다. 이 압박감과 스트레스가 완화되면 다시 또 도전할 힘이 생길 것 같았다.


가스(gas)가 아니라 게스(gas)

 토플 공부를 하면서 접했던 어려움 중 하나는 발음이었다. 나는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100% 영어 수업을 하는 학원에서 상사로부터 피드백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상사는 교실에서 학생들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설치한 CCTV로 나의 수업 영상을 확인했고 가스를 콩글리쉬인 가스(gas) 발음한 것을 지적했다.

 나는 그 피드백을 받고 스스로 부끄러워져서 어떻게 하면 같은 피드백을 받지 않을 수 있을까 고민을 많이 했다. 한국어로 '게스'라고 말하면 정확한 영어 발음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영어 gas의 모음 소리 [æ] 혀가 올라가고 이빨 근처에서 소리가 나는 '에'와는 다르게 혀가 내려가고 소리가 연구개를 울리며 목구멍으로 다시 삼켜진다. 그리고 원어민인 내 남자 친구는 이런 디테일을 귀신 같이 잡아 냈다. 혀가 내려가야 할 소리를 올려서 발음하면 어색함을 느끼는 것이다. 이를 교정하려면, 영어 발음 훈련을 운동하듯이 해야 한다. '사과, 레몬, 그것 등'과 같은 쉬운 단어들을 모음과 자음 그리고 단어 단위로 발음을 하면서, 하루도 빠짐없이 연습을 해야 한다.

 사춘기 나이 이후에 배운 사람들은 발음 교정이 이렇게 힘들다. 나는 학원 선생님을 꿈꾸고, 영어 공부를 하면서 언어 학습에는 '결정적 시기가 있으며, 사춘기 이전에 이뤄지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다.'라는 결정적 시기 가설을 이후에야 알게 되었다. 그래서 어떤 똑똑한 엄마들은 그래서 영어 유치원을 보내고 어린이 유학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블랙 핑크의 제니 엄마가 제니가 10살 때 뉴질랜드를 보냈다는 말을 듣고, 모두들 이렇게 똑똑하게 살고 있었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아무튼 성인 학습자를 대상으로 영어 발음 훈련을 해주는 프로그램은 한국에 없다고 보아도 되었다. 대신 미국에서도 전문직 종 중 하나인 스피치 테라피스트(영어 원어민들을 대상으로 'R'이나 'SCHWA' 발음처럼 어려운 발음을 교정해 주는 언어 치료사)들이 이와 관련한 공부 자료를 많이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모음과 자음처럼 작은 단위의 학습을 한 후, 문장과 문단 단위를 읽는 연습을 해야 하는데, 기초 학습이 부족한 상태에서 장문을 발화해야 하는 토플 스피킹을 하려고 하니 문장들이 계속 씹혔다. 그때 이런 생각을 잠깐 했다.

 '우리 엄마는 왜 제니 엄마 같은 생각을 못했을까?'

 그러나 나는 또다시 새 출발을 준비해야 하는 스물여덟이었고, 엄마의 과거 교육을 놓고 치기 어린 질문을 할 나이가 아니었다. 이미 남자 친구와 결혼 약속 했을만큼 어른이었다. 엄마를 탓하기 보다는 이젠 내가 제니 엄마처럼 자녀 교육을 현명하게 하도록 해야지라고 다짐해야 할 나이다. 그래서 다이어리에 적어두기로 했다.

 2년 내로 토플 만점! 그리고 아들 딸, 외국어 교육은 사춘기 이전에!



[갑자기 한가해져서, 다음 글을 금방 쓸 수 있을 것 같네요. 4월 2일 수요일까지 다음 글로 찾아 뵙겠습니다!]

 


 

작가의 이전글 건강이 운명이라면 #2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