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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나나의 패배

나의 작은 미신

by Story J Feb 14.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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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연주 전.

연주홀로 가기 전에 벌써 좀 지쳤다. 퇴근을 일찍 한 남편에게 '요보, 나 가기 전에 뭐 좀 먹게 해 줘. 그냥 간단히 오니기리만 좀 만들어 줘' 했다.

남편은 알았다며 10분 뒤에 이렇게나 예쁘고 정갈하게 오니기리, 계란말이, 미역국을 차려주었다.

그러나 보는 순간 조용히 식겁.

예상 밖 미역국의 등장.

브런치 글 이미지 1


미역국이란 무엇인가..

시험 보기 전에 먹으면 미끄러져 떨어진다는 그것이 아닌가.

응.. 이건 먹지 않는 게 좋겠어. 그러나 여기서 이걸 먹지 않겠다는 말을 하면 또 말이 길어질 수 있으니, 그냥 조용히 먹는 듯 마는 듯 그렇게 손대지 않는 게 좋겠어.

최대한 조용히 식사를 마쳤고, 그날 연주를 끝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남편이 묻는다. 아까 계란이랑 오니기리는 먹은 흔적이 있던데, 미역국은 아예 안 먹었냐고. 응. 미역국은 미끄러운 거라서 연주 전에 먹으면 손이 미끄러질까 봐 먹지 않아. 우리는 그래. 한국살암은 그럴 수 있어. 그러니 요보가 이해해.

남편은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며, '아유 시리어스, 오마이 가쉬, 커몬 요보, 왓츠롱위드미역', 뭐 이런 류의 미국 추임새를 넣으며 미친 듯이 웃었다.


다음 날, 이웃집 마이클과 로라와 오랜만에 식사를 함께 했다. 우리는 자주 두 집이 함께 모여 저녁을 먹는다. 모여 있는 네 사람 중 유일한 미국사람인 마이클과 홍콩에서 온 로라. 이렇게 잘 맞는 콤비를 본 적이 없는 소중하고 유쾌한 친구이자 이웃이다.   


남편이 신이 나서 나의 팽미역국 사건을 이야기했다. 마이클이 말했다. 몇십 년 전 첫아기를 가졌을 때, 절대로 바나나를 먹지 않는 로라를 보고 너무 웃었다고 한다. 홍콩에서는 엄마가 바나나를 먹으면 뱃속 아기가 미끄러져 떨어진다고 믿는단다. 거기서 제일 크게 터진 게 아마 나였지 싶다.


바나나가 무슨 죄.. 바나나 로라에게 의문의 1패.

브런치 글 이미지 2

남편은 손 미끄러질까 봐 미역국을 안 먹은 내가, 애 떨어질까 봐 바나나를 안 먹은 로라의 얘기에 그렇게까지 터지는 걸 이해하지 못했다. 그가 이해하지 못하는 걸 보고, 나는 나의 미역국 거부에 그렇게 미친 듯이 웃던 그를 오히려 이해했다.


이 정도의 미신은 하나님도 용서하시려니.

그저, 내가 이 일을 이만큼 중요하게 여긴다는 작은 표시 같은 거다. 이런 미신을 지키는 것도 어떤 '정성'의 범주에 있었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남편이 얼마나 웃든 간에, 나는 앞으로도 중요한 일을 목전에 두고 굳이 미역국을 먹지는 않을 거다.

마이클이 얼마나 웃었든 간에, 로라도 세 아이를 낳는 동안 한 번도 바나나를 먹지 않았을 것이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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