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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확실성, 버거움, 그리고 다시

작은 파도에 갇혀 네가 큰 바다임을 잊지 말아라.

by 도현

내가 바랬던 대로 하루를 살아가는 것에 감사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응어리지듯 무언가가 해소되지 않았다. 휴식인가? 불확실성인가? 버거움인가? 사실 당최 모르겠다. 공기가 차가워져서 그런가.

요가를 전업으로 삼을 생각은 애당초 없었다. 내가 꿈꾸는 공간을 만드는 것은 30대 후반에 접어들고 나서였기 때문에 그렇게 급하지도 않았다. 나는 선생님으로 수업을 가르치는 것도 물론 뜻깊지만 내가 수련자로 매트 위에 서있는 순간이 가장 행복하다. (*굳이 비율로 따지자면 수련자 7: 안내자 3) 하루에 사람들 앞에서 몇 타임씩 가르치는 것은 체력적으로나 마음적으로나 에너지가 쉽게 빠지기 때문이다. 그 시간만큼 마주하는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모든 걸 쏟기 때문이다. 나는 회복력도 느린 터라 요가강사가 주가 되는 삶은 원치 않는다.


요가강사의 페이는 자신의 능력 것이다. 프리랜서와 맞지 않는 나에게는 "불확실성"이라는 느낌이 강했으며 미래에 성공할지라도 수개월, 몇 년간 하루살이로 생계를 유지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 나는 선명하지 않은 듯 그림자로 드리워진 미래에 무서움을 크게 느끼는 사람이다. 추가로 나는 10년, 20년. 30년 후의 어떤 요가지도자가 되어있을지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았다. 내가 가진 특별화된 점이 무엇일까. 나만이 할 수 있는 요가 명상 클래스는 무엇일까. 사람들이 계속 나를 찾게 하는 마법이 어떤 걸까. 어렵고 어려웠다. 최선을 다 해 하루들을 살아가면 그것들이 모여 굳은 땅을 뚫고 세상에 나온 씨앗이 될 텐데. 나는 맹목적인 기다림은 견디기 힘든 성향이니 어쩔 수 있나.


회원님들께 항상 우리는 '이미 지나버린 과거에 연연하지 마세요, 다가올 미래에 걱정하지 마세요, 현재에 내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메시지를 드리지만 정작 내가 그렇지 못하는 것에 슬픔을 느낀다. 사실 나 자신에게 필요한 말이어서 스스로 되뇌는 듯 계속 입 밖으로 꺼내나 싶다.


10, 11월은 버거움이라는 감정이 휘몰아쳤다. 결론은 다행히 폭풍이 와도 그 안에서 춤을 추듯 흐름대로 내 몸을 맡겼다. 버거움. 나는 아직 완성하지 못하는 요가 아사나들이 꽤 있다. 요가 디피카 책이 두꺼울 정도로 아사나들도 정말 많고 그날 컨디션에 따라 수련의 형태가 좌지우지된다. 우리 몸의 형태가 다 다르듯이 사람들 마다도 아사나가 찾아오는 시기도 다르다. 나를 괴롭혔던 건 "머리서기"이다. 요가 선생님인데 머리서기를 못하면 안 될 것 같았다. 몇 번이고 굴러도 구르는 것이 무서웠고 머리서기의 힘이 내 몸에 체화되지 않는다. 누군가 잡아줘야지 조금 안정적임을 느끼고 손을 떼버리면 나는 계속 허공 위에서 휘청이다가 또 구른다. 요가원에 가서 수련을 할 때에도 머리서기를 완성하지 못해 발을 끙끙 차는 모습이 너무나 부끄러웠다. 최악이었던 것은 부끄러움이 지나쳐서 이제 옆 사람들에게 안 보이고 싶어 머리서기를 할 때는 그냥 쉬어버렸다.

이런 행동은 옳지 않음을 알기에 마음을 비우고 '언젠간 되겠지, 몇 년 안에는 될 거야 뭐, 안되면 어쩔 수 없고' 라며 가벼운 결심을 다졌다. 나는 아직도 구르고 있는 중이며 균형이 잡힐 때는 몇 초정도 유지하고 있다. 이 정도 발전한 나 자신도 대견하다고 생각한다. 요가를 사랑하고 즐겨야 하지만 어떨 때는 나를 힘들게 하고 매트 위에서 주저하는 모습을 만나곤 한다. 다시 일어서는 용기. 요가가 전해주는 삶의 태도가 아닐까. 매트 위에서의 가르침으로 삶의 고난과 역경이 찾아와도 흔들리지 않고 나를 다시 찾는 것. 잠시 쉬어도 좋으니 다시 발걸음을 내딛는 것.


작은 파도에 갇혀 네가 큰 바다임을 잊지 말아라. 옆에는 크고 작은 바위가, 방파제들이, 모래들이 있다. 파도가 찾아올 때마다 바위들이 앞서 막아주고 깎일 테니. 걱정 마라 거센 파도가 오면 우리보다 튼튼한 방파제들이 줄지어 맞서 싸워줄 것이다. 울적한 날에는 모래들이 너의 발가락 위에서 간지럽게 춤을 출 테니.


24. 10. 10 冬 차가움, 쓸쓸함, 고독, 암흑, 처량함. 누군가는 부정적인 뉘앙스라는 느낌이 들 수도 있죠. 그것은 경험되고 학습된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문법이 있고, 그 문법에 따라 사물과 현상이 모두 ‘분절‘ 돼요. 분절된다는 것은 원래 나뉘어 있지 않은 것을 언어로 나눈다는 뜻이고. 언어를 사용하는 순간, 실재하지 않는 것이 마치 실재하는 것처럼 여겨져요. 감정들도. 내게 느껴지는 감각들도. 우리는 그렇게 실재하지 않는 것을 사실이라고 또 믿고요. 어떤 명확한 언어를 사용할 때 우리는 마치 사실에 관해 말하는 것 같지만, 실은 언어에 의해 제한되거나 생성된 관념을 말할 뿐인 거죠. 겨울에 태어나 이 함축된 의미를 절실히 받아들일 수 있는 겨울 가장 사랑합니다.



24. 10. 17 이 날 저녁 빈야사 수련은 집에 돌아와 일기에 끄적였다. 선생님이 안아주시는데 그 간의 감정들이 터져 눈물을 흘렸다. 울음을 참으려고 노력해도 잘 안되어 푹 안겨 그냥 쏟아낸 것 같다. 선생님도 그런 시기가 있었다고 괜찮다고 토닥여주심에 위로를 받고 그다음 날도 아침 수련을 이어갔다.


24. 10. 18 사랑도, 아픔도, 욕심도, 서러움도 글에 담고 싶지 않은 감정들의 무게까지도 빗물에 다 씻겨 흘려보내려고 한다.


24. 11. 24 차분하게, 묵묵히 요가의 길을 걸어가는 것 다치치 않고 오래오래 수련하자. 싫증이 나고 제자리걸음의 순간을 마주할지라도, 그저 요가원에 가서 매트를 깔고 숨을 가다듬기 그리고 항상 내 옆을 지켜주는 분들께 소중한 마음을 가지기.



발걸음이 향하는 곳으로 용기를 찾아 하염없이 떠났다.


인생이 언제나 꽃이 피어 있는 순간으로 가득할 순 없다. 내 꽃잎들은 기다렸다는 듯 하나둘 떨어져 간다.

얼마나 더 행복한 미래를 맞이하기 위한 반복된 아픔 속에 살아가는 것인가.


방 한켠의 조명을 켜고, 소란한 마음을 잠시나마 달래본다. 앞으로 나아가려 애쓰지만,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맴돌고 있는 기분이다. 이 길이 맞을까? 확신할 순 없지만, 그래도 나아간다. 결국 나를 어디론가 데려다 줄 테니.


중요한 건, 내가 손에 움켜쥔 것들을 놓치지 않는 것이다. 알아차리고, 이 순간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느끼는 것. 내 안에 존재하고 있는 것을 지켜나가자.

그것들이 빠져나가지 않게 보드랍게 감싸주자.


사실 우리의 인생은 순수한 모험이다.

끝이 정해지지 않은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한 걸음씩 나아간다. 예상치 못한 일들이 찾아와도 괜찮다. 유연함을 지키는 것. 그저 흐름에 몸을 맡기고, 삶을 밀고 당기며 조율해 가면 된다.


결국, 우리는 각자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감독이니.

이제, 나만의 시나리오를 써 내려가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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