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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고딩맘, 물속에서 울다

스트레스는 수용성이다

by 맛있는 하루

매일 아침, 수영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물을 가르며 나아가는 그 순간의 쾌감은 어떤 말로도 다 표현할 수 없다. 팔과 다리가 만들어내는 리듬, 귓가를 스치는 물소리, 그리고 온몸을 감싸는 차가운 물의 포옹. 이 모든 것이 하루를 시작하는 나만의 의식이 되었다.


아무리 기분 안 좋은 일이 있어도 수영을 하다 보면 어느새 마음이 풀리곤 했다. 물속에서 시간을 보낼수록 마음속 묵직했던 것들이 사라져 있곤 했다. 그래서 나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스트레스는 수용성'이라고 생각해왔다. 물에 잘 녹아 씻겨 내려가는 것처럼 느껴졌으니까.




하지만, 중간고사는 강했다.


신중의 신은 내신이라고 누가 말했나. 모든 고등학교가 다 그렇겠지만 학군지 고등학교의 시험은 쉽지 않다. 아니, 헬 오브 더 헬이다.


고등학교 1학기 두 번의 시험을 말아드신 작은 녀석이 말했다.

"엄마, 나 이제 감 잡았어. 이제, 할 수 있어."

2학기 중간고사 기간.

"채점은 마지막 날 밤에 몰아서 할 거야. 근데 이번에는 느낌이 좋아."


시험이 끝나고 친구들과 저녁 회식, 안양천에서 자전거 라이딩까지 알차게 하신 아드님이 채점을 시작했다.


벅. 벅. 벅. 쫘악. 쫘악.

흐으. 흐으... 흐으.. 어어어어..


무슨 소리지?

아이 방을 살짝 들여다본다.


멀리서 봐도 시험지에 빨간 비가 우수수 내려있는 것이 보인다. 머리를 잡아 뜯고, 말 그대로 머리를 뽑을 듯 쥐어뜯으며 울고 있었다.


그 옆에는 시험 공부했던 연습장이 쫙쫙 찢겨 있었다.


나의 숨이 한숨이 되어 나올까, 눈빛이 서늘해질까 봐, 얼른 안방으로 다시 들어왔다.


벅벅. 쫙쫙.

"엉엉엉.. 바보 새끼. 미친 xx"


심장이 쪼여온다. 부정맥인지 협심증인지 검사 날을 받아놓은 것을 아는지, 심장이 존재감을 드러낸다. 응급약을 하나 먹고 누웠다. 지난번처럼 드라마틱한 효과는 없다. 벌렁벌렁 거렸다가 쪼였다.


다시 재발한 발목 염증까지 존재감을 드러내며, 온몸에 통증이 돌아다닌다. 여기저기 파스를 바르고 붙이고 누웠다.


흐느낌을 배경으로 많은 질문들이 떠오른다.


이렇게 점수에 화내고 속상해할 거면, 좀 더 악착같이 해야 했어야 하는 게 아니었니?

선행을 많이 한 것도, 더 많이 공부를 한 것도 아니고. 내신으로 일희일비, 아니 비(悲)할 것은 아니지 않나.

우리 학교에서 어차피 내신으로 입시를 치르는 아이들은 전교권, 나머지는 수능인데. 아직 내신을 놓는 것은 말이 안 되지만, 수능에 더 집중하는 게 우리의 살길 아니었나.

내일은 엄마가 일어나기 전에, 아니 최소한 엄마가 수영장 다녀오면, 스. 스. 로. 일어나서 열공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건가.




새벽 3시가 되어서야 간신히 흐느낌 소리가 멎었다. 언제 잠든 건지 기억도 나지 않는데 6시도 전에 잠이 깼다. 나는 수험생도 고딩이도 아닌데 왜 3시간도 못자고 눈이 떠지는 건가.


졸립지만, 잠이 안 온다. 더 자고 싶지만 자기 싫다.

어쩔 수 없지. 스트레스는 수용성이니 물에 가서 녹여봐야지.

털레털레 수영장으로 향한다.


"왔어? 이제 추석 연휴라 며칠 못 보겠네."

"..................."


중학교 국어교사였다 퇴직한 젊은 언니가 샤워실에서 나를 반겨주시는데 울컥했다.

"지금이 제일 버거운 때야. 시험 직후에는 힘든 게 당연해."


샤워기 뒤로 보이는 거울에서 눈이 벌개지는 게 보인다.

"그래도 가끔 예쁘잖아. 그거 보고 또 버텨야지 뭐. 지들은 얼마나 힘들겠어. 오늘은 쉬지 말고 수영 뺑뺑이 돌아."


빨간 토끼눈을 하고 웃음이 나왔다.

"뺑뺑이 끝장판 돌고 나올게요."


출처: pexels.com


발목 부상으로 배영은 못하고 허리 디스크로 평영, 접영은 원래 못 하니, 자유형 뺑뺑이 삼십 바퀴다.


엉엉엉. 물속에서 울기도 하며 자유형 열 바퀴.


(하나, 둘, 셋 세고)

중얼중얼. 신중의 신, 내신을 원망도 해보며 다시 열 바퀴.


(하나, 둘, 셋 다시 세고)

종알종알. 응원의 텔레파시도 보내며 다시 열 바퀴로 마무리했다.


물속에 다 퍼부었으니 다시 또 하루를 살아봐야지.

나도, 아이도, 우리는 각자의 레인에서 묵묵히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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