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냇물이 돌돌돌 흐르고 바위 옆 버들강아지와 미나리 싹이 돋는 3월 중순쯤에는 가정방문을 한다. 가정방문에 대한 아이들의 생각은 기대감과 부담감, 설렘으로 나눌 수 있다. 좀 산다는 집 아이들은 집에 선생님이 방문했으면 좋겠고 집이 좀 가난하거나 누추해서 보여주기 부끄럽다는 생각을 하는 아이들은 부담감으로 받아들인다. 또 한 부류는 아무 생각 없이 선생님이 자기 동네에 온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설레는 아이들이다.
오전 수업을 마치고 내가 앞에 서고 아이들이 내 뒤를 졸졸 따르는 학익진 대형으로 동네에 들어선다. 이 아이들은 자기 집에 와도 좋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는 아이들이다. 골목길을 걸어가며 동네의 이모저모를 친절하게 알려 준다. 이 집에는 누가 살고 저 집에는 몇 명이 사는지, 개집 앞에서 졸고 있는 개 이름이며 저 집 송아지가 언제 태어났다는 등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한도 끝도 없이 돌아가면서 늘어놓는다. 나는 연신 ‘아 그래?’ 하며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을 따라간다. 처음에 내 뒤를 따라오던 아이들이 어느새 내 앞에 서서 나를 인도하는 대형으로 바뀌어 버렸다.
한참을 걷다 보니 이상한 기류가 느껴졌다. 돌담 너머와 담이 끝나는 길 끝에 눈에 익숙하지 않은 얼굴들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이었다. 얼굴들은 우리 일행이 가고 있는 앞쪽으로 한 발 앞서서 움직였다. 까무잡잡한 얼굴과 민첩한 동작들이 인디언 부족들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화살통은 없었지만 타인을 경계하는 듯한 눈빛과 호기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보아 무엇인가 중대한 임무를 띠고 움직이는 것은 분명했다.
인디언들은 자신의 담임 선생님이 다른 동네를 방문하기 때문에 무료하기도 하고 자신들의 존재감을 보여주고 싶은 다른 반 아이들이다. 우리 반 부끄럼쟁이 상수도 거기에 끼어 있다. 자기들 스스로 특수한 임무를 만들어 수행하고 있는 중이다. 특수 임무는 나의 동선을 체크하여 다음 방문하는 집 아이에게 연락을 한다거나 내가 자신들이 예상했던 집이 아닌 다른 집으로 들어갈 경우 신속하게 작전을 다시 짜는 일이다. 또한 나의 현재 위치와 방문하는 집에 도착할 시간을 예측해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오늘의 가정방문을 원활하게 이끌고 있었다.
첫 번째 방문하는 집은 민수네 집이다. 인디언들은 벌써 민수네 돌담을 에워쌌다. 반듯한 기와집과 넓은 마당이며 살림살이가 제법 잘 사는 티가 난다. 민수 어머니는 내가 마당에 들어서자마자 아침부터 신경 써서 준비했을 것 같은 푸짐한 다과상을 들고 환한 미소로 나를 반긴다. 마루에 앉기도 전에 민수 어머니는 음식부터 강력하게 권한다. 진녹색 쑥절편 한 개를 꿀꺽 삼킨다. 아이들이 내 표정을 보고 침을 삼키면 어쩌나 하고 걱정하는 순간 다행히도 민수 어머니가 쑥절편 한 쟁반을 푸짐하게 차려 아이들에게도 내주었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끝나고 일어서려고 할 때 담 넘어 인디언들은 이미 사라지고 없다. 다음 집에 나의 방문을 알리러 간 것이리라.
다음 집은 순호네 집이다. 순호네 집은 민수네 집에 비하여 초라하게 느껴졌다. 순호 어머니가 청량음료와 비스킷 한 접시가 담겨 있는 쟁반을 내오신다. 아이들에게도 비스킷 몇 조각씩 나누어 주신다. 나도 마음 놓고 음료를 마셨다. 순호는 우리 반에서 공부를 제일 잘하는 아이다. 순호 어머니는 순호가 자기 집의 자랑이라며 기분 좋아했다. 그러다 가늘게 한숨을 쉬며 아버지가 안 계셔서 그게 늘 미안하고 안쓰럽다고도 하셨다. 순호 이야기보다 순호 어머니의 고달픈 인생 이야기를 더 많이 들었다. 순호에게 더 신경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대문을 나섰다.
순태네 집 앞에 도착하자 순태가 고개를 숙이고 함석 대문 앞에 서 있다. 인디언들이 한 발 앞에 가서 선생님이 들이닥친다고 기별을 했을 것이다. 순태네 집엔 아무도 없었다. 순태가 애지중지한다는 하얀색 털이 눈부신 진돗개 당근이가 개집 앞에서 낯선 사람들의 인기척에 놀라 큰 소리로 짖으며 날뛰고 있다. 동네 개들이 덩달아 짖어대는 바람에 한동안 개소리로 난리통이 벌어졌다. 아버지가 아파서 어머니가 모시고 아침에 읍내 병원에 갔다며 큰소리로 말해 주었다. 문 앞에서 집 안을 한 번 휙 둘러보고 나와야 했다. 아침에 바빴는지 수돗가며 마루 위에는 물건들이 지저분하게 널려 있었다.
“순태야 다음에 선생님이 놀러 올게.”
미진이네 집으로 가면서 옆에 있는 친구들이 눈치 못 채게 순태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순태의 양쪽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내 손을 잡은 순태의 작은 손에 힘이 들어간다. 순태를 잡은 손을 경쾌하게 흔들며 다음 집으로 향했다.
미진이네 집에 도착했다. 밭에서 방금 돌아온 듯 미진이 어머니가 싸리 울타리 옆 수돗가에서 허둥지둥 옷의 흙먼지를 털며 일어섰다.
“아이고 선생님이 왔는데 집이 이리 누추해서 어짭니까?”
“아이고 미진 어머니, 밭에서 일하다 오시게 해서 너무 죄송해요.”
이런저런 미진이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다가 인사를 하고 나왔다. 뒤에서 미진이 어머니가 다급한 목소리로 나를 불러 세웠다.
“선생님 이거 쪽파라예. 가지고 가서 된장국 끓여 드이소.”
쪽파를 신문지에 돌돌 말아 나에게 건넨다. 진한 흙냄새와 쪽파 향이 물씬 풍긴다.
“아이고 민지 어머니, 이러시면 안 됩니다.”
극구 사양을 해도 막무가내로 신문 뭉치를 나에게 들이민다.
“선생님 이거 제가 들고 다닐께예.”
순태가 나의 짐꾼 역할을 자처하고 나선다.
봄날의 짧은 해가 어느덧 산 그림자를 길게 늘여놓았다. 계획했던 가정 방문을 마치고 학교 사택으로 돌아가는 길, 바람이 불 때마다 솔솔 쪽파 향이 난다. 발걸음이 무거워지며 갑자기 배고픔이 밀려왔다. '오늘 저녁은 쪽파 된장찌개를 보글보글 끓여 먹고 내일은 아이들과 튼실한 쪽파 잎으로 파피리를 만들어야겠다.'
학교 뒷산에 진달래꽃이 만발하여 햇살도 바람도 온통 분홍빛으로 넘실댄다.
“뚜-뚜- 뚜뚜-뚜- 뚜-뚜뚜뚜- 뚜-뚜뚜-.”
초록색 파피리 소리와 아이들 웃음소리에 늦은 봄날의 공기가 출렁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