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이 다 되어가는 남, 여 한 무리가 100미터 저 쪽에서 걸어오고 있다. 심장이 쿵 쿵 울린다. 36년 만에 만나는 초임 때 제자들이다. 열한 살 아이들은 이제 마흔일곱 살이 되었다. 벚꽃나무 아래에서 찍은 빛바랜 사진 속의 그 아이들은 어른이 되었어도 여전히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반겼다.
1983년 3월, 읍에서 버스를 타고 비포장도로로 한 시간을 넘게 달려가야 만날 수 있는 6학급의 작은 산골 학교가 나의 초임 발령지다. 스물네 살의 선생님이 열한 살의 천사들을 처음 만났다.
3월 초에는 꽃샘추위가 매서워 교실에 난로를 피워야 했고 교무실에서 나누어 주는 땔감은 부족했다. 우리들은 쉬는 시간마다 교실 뒤편 나지막한 산언덕으로 올라갔다. 전쟁터의 군인들처럼 용맹하게 덤불을 헤치며 올라가서 전리품으로 나뭇가지를 한아름씩 안고 내려온다. 마음과 몸이 그지없이 따뜻했던 겨울이다.
속 잎 피어나고 초록이 짙어지며 봄이 무르익으면 학교 벚꽃 동산에 꽃이 흐드러지게 핀다. 그 옆에 낡은 기와지붕으로 덮인 허름한 사택이 내가 사는 곳이다. 간밤에 바람이라도 불고 간 아침이면 나는 바빠진다. 신발과 솥뚜껑 위에 수북이 쌓여 있는 벚꽃 잎을 털고 쓸어낸다. 그런 날은 꿈을 꾸면 연분홍색일 거라고 생각하며 잠이 들었다. 봄비가 나머지 꽃잎들마저 떨어뜨리고 나면 짧았던 봄날은 속절없이 가버린다.
여름. 벼이삭들이 강한 햇볕을 받아 통통하게 살이 찐다. 산들바람에 농약 냄새가 살짝 실려 오는 논길을 따라 우리는 노래를 부르며 수영하러 간다. 옥수수 밭과 콩 밭을 지나 초록빛 한여름 속을 가로지르면 냇물이 오아시스처럼 나타난다. 아이들은 올망졸망한 바위 위로 올라가 연꽃 위에 앉은 개구리들처럼 폼을 잡은 후 물속으로 풍덩풍덩 뛰어든다. 요리조리 더위를 피하다 보면 어느새 여름은 저만치에 꽁무니를 빼고 달아난다.
가을. 운동장가에 병정처럼 줄지어 서 있는 플라타너스 잎이 갈색으로 물들고 산등성이마다 하얀 구절초와 보랏빛 쑥부쟁이가 꽃덤불을 이루면 들판이나 마을에도 코스모스 연분홍 꽃들이 들불처럼 번져간다. 가을운동회가 열리며 한바탕 축제가 벌어지고 이어서 가을 소풍을 기다린다. 서늘한 낙엽송 골짜기를 따라 걷다 보면 하늘은 머리 위로 더 가까워지고 근심 걱정 없는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소리가 시냇물 소리와 섞여 쟁쟁하다.
겨울. 학교 뒷산에서 앞산으로 날아가던 꿩 한 마리가 학교 지붕 위에 울음 한 자락을 떨구어 놓으면 잠시 깨졌던 정적은 더욱 깊어진다.
몽실몽실 피어난 벚꽃나무 가지 밑에 참새떼처럼 쪼르르 앉은 열한 살 꼬맹이들과 그 뒤에 스물네 살의 내가 꽃보다 더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 한 장은 하얀 눈이 산천을 포근히 뒤덮듯 내 인생을 온기로 채워주기에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