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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한산티아고 Sep 27. 2022

나의 부재를 알리지 마라

수술 일정이 잡혔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코로나가 한창이라 코로나에 감염돼서도 안되고, 건강관리도 특별히 신경 써야 했다.

나만 챙기면 되는 것도 아니었다. 집, 회사, 가까이 사시는 부모님까지. 챙겨야 하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하나씩 해야 할 목록들을 적어 나갔다. 

    

큰애는 기숙사 생활을 해서 2주에 한번 나오니 안 나오는 주를 입원 기간으로 잡았다. 일정이 틀어져도 고2쯤 됐으니 혼자 택시 타고 오고 갈수 있겠지.     

문제는 둘째였다. 둘째는 시골 외갓집, 서울 할머니 댁, 서울 이모네 중 당연히 이모네 집을 선택했고, 방학 전이라 담임선생님과 상담을 했는데, 코로나 기간이어서 가정학습을 인정해 주신다 하여 한시름 놓았다. 둘째는 엄마가 장기교육을 가는 줄 알았다. 

    

차마 아이들에게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놀라지 않을까 걱정하지 않을까 생각하며 하루 이틀 미루고 있었다. 그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났다. 내가 벌써 아이들에게 짐이 되는 거 아닌가 생각마저 들었다.     


애들 거취 문제가 해결되니 한결 마음이 편했다. 나머지 집안일들은 나 혼자 처리하면 되는 것들이었다. 다녀와서 청소가 힘드니 가사도우미를 통해 대청소를 받고, 안 보는 책들은 동생네로 보내고, 병원 입원 기간 시 필요한 물품들도 하나씩 장만했다.  

   

수술날이 다가와 아이들에게 말하는 날 최대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말했다.

"애들아, 엄마 머릿속에 혹 같은 게 있대 그거 빼내는 수술해야 해, 아주 쉬운 수술이래. 그거만 빼내면 돼"

"엄마, 그러면 괜찮은 거지? 그거만 빼면 되는 거지? 문제없는 거지?"

"응, 우리나라에서 제일 수술 잘하는 선생님께 받는 거야. TV에도 나오셨대 명의로"     

아이들이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걱정하면서 그날 밤 혼자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그제야 일어날지 모르는 후유증들에 대해 생각이 많아져 무섭게 느껴졌다.    

 

다음은 회사였다. 집이야 내가 조절도 가능하고, 도움을 받을 수도 있고, 애들 거취만 해결되면 큰 문제 될 게 없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회사는 달랐다.   

  

나는 우리 부서에서 가장 큰 사업이 있는 팀의 팀장이었다. 여태껏 단일 건으로 그런 사업을 해본 적 없는 신규 사업이라 어렵고, 진척도 느렸다. 현장업무도 많고, 행정업무도 모르는 거 태반이었다. 어느 정도 가닥도 잡히고, 공사 계약도 되어 진행 중에 있었지만 하도 이슈들이 생겨서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았다.  

   

원망도 했었다. 이 사업 때문이구나.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보겠다고 이리 몸부림치면서 일한 건지 회의가 들었다. 그간 2년간이 후회가 되기도 했었다. 그냥 하라는 대로 시키는 대로 할 것을, 그럼 내 머리가 온전했을까, 아마 내 심장이 터졌겠지. 어쩔 수 없이 받아 들여야 하는 거구나 싶었다.     


주요 업무를 하는 두 명의 팀원들과 현장 점검을 나갔다. 점검이 끝나고 조용히 말했다.

“올해 업무를 12월 초까지, 아니 11월 말까지 완료할 수 있어요? 그래야 될 거 같은데”

느닷없는 업무 일정 논의에 둘 다 멈칫한다. 평상시 나 같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껏 팀원들과 격의 없이 지내왔기 때문에 거침없이 이유를 묻는다. 이유 없이 이럴 사람은 아니었으니.     

“내가 아파서 수술을 해야 돼, 뇌종양이래. 12월 초에 병가를 들어가야 하니 나 있을 때 업무를 마무리하자. 당분간 비밀로 해줘”

“무슨 그런 큰일을 남 얘기하듯 해요?” 당황한 팀원들이 되묻는다.  

   

그때쯤 한참 TV에서 슬기로운 의사 생활이 방영되었나 보다. TV 보니 심각한 줄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 간단한 수술이었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업무는 알아서 할 거라고 건강에만 신경 쓰라고 한다. 고마운 팀원들이었다. 그렇게 업무를 하나씩 마무리해갔다.     


그날 이후 장거리 외부 출장은 팀원들만 다녔다. 그전에 겪었던 몇 번의 증상을 그저 소화를 못해 나타난 구토나 어지러움으로 생각했었는데 뇌종양 초기 증상이었던 것이라 서로가 무섭고, 걱정돼서 티 안 나게 팀원들만 다녔다. 

    

일이 안 풀리거나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생겨 흥분하게 되면 팀원들이 말릴 정도였다. 더 웃고, 더 떠들고 장난도 많이 쳤다. 나는 그렇게 병 앞에서 순한 양이 되어가고 있었다.     


가까이 사는 친정집 리모델링 공사를 남편이 직접 하고 있었다. 교대 근무를 하는 남편은 쉬는 날마다 친정에 가서 리모델링 공사를 하며 안 그래도 피곤한 몸으로 부득불 친정집 공사에 매달렸다.     

“나 편하자고 하는 거야. 몸은 힘들지 몰라도 당신 수술 생각은 안 나니 견딜만해”     


남편에게는 차마 떠올리고 싶지 않은 두려운 미래를 잊기 위해 몰두할 곳이 필요했다. 그걸 알기에 나도 더 이상 말릴 수 없었다. 그렇게 남편은 자신의 몸을 혹사하며 그 시간을 견뎌냈다.     

공사 일정에 맞춰 가구류도 주문하고, 창고에 넣어둔 이불들도 죄다 꺼내 빨아다 드렸다. 겨울로 미뤘던 아버지 백내장 수술도 진행했다. 딸이라도 부모님 가까이 사니 그건 온전히 내 몫이었다.     


업무가 어느 정도 마무리된 시점에 부서장님께 말씀을 드렸다.

업무 진행 상황과 나의 병가 일정, 수술 후 계획까지 말씀드리고, 그간 팀원들의 노고에 대해서도 배려를 부탁드렸다.     


항상 활기 넘치고, 건강함의 상징이었는데, 그런 나는 이제 없어지는 거 같아 서러웠다. 돌아올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매일매일 책상을 정리했다. 표 안 나게 하나씩 물건들을 집으로 가져왔다.     

나는 마치 이순신이라도 된 심정이었다. ‘나의 부재를 알리지 마라, 건강하게 복귀할 테니’라는 말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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