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아야겠구나
휙~ 철퍼덕~
애들이 먹다 남긴 로제 떡볶이 그릇이 나선형을 그리며 부엌 쪽으로 떨어졌다.
순간 얼음이 된 아이들과 나는 멍하니 남편을 바라봤다.
“그렇게 먹을 거면 배달시키지 마, 왜 이렇게 버릇이 없어?”
남편은 꽥 소리를 지르더는 문을 꽝 닫고 나가버린다.
아이들은 별 대수롭지 않은 일로 티격태격하다가 막 일어서려던 참이었다. 먹는 거 앞에 두고 싸우지 말라고 지적했는데도 별 반응이 없자 남편이 폭발했다. 아빠의 그런 모습이 낯선 두 아이는 잔뜩 긴장해 그릇을 주섬주섬 치우려 움직였다.
“괜찮아, 엄마가 할게. 이따 아빠 들어오시면 잘못했다고 해”
놀란 아이들을 달래고 그릇을 치우면서 내 머릿속은 하애졌다.
서울 큰 병원으로 갈 때 필요한 진료의뢰서를 받아온 참이었다.
남편은 어찌할 줄을 모르고 있었다.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어 몸부림치고 있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괴로워하며, 이 모든 게 자신의 잘못 때문이라고 자책하고 있었다. 가여운 사람.
“애들은 아무것도 모르는데 놀라게 하지 마. 당신이 이러면 나는 어떡해? 나 여기서 그냥 포기할까? 이만큼 산거 다 당신 덕분이고, 우리 애들 건강하고 예쁘게 잘 크고 있어. 이만하면 잘 살아왔다고 생각해. 내 병은 당신 잘못 아니야”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거 같다고 놀렸던 남편의 무너질 것 같은 모습에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더 정신 차리고 이겨내서 우리 가정을 지켜야겠다고 생각했다. 마냥 울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아~ 아이들보다 저 사람이 더 걱정되는구나. 내가 없으면 저 사람 무너지겠구나. 저 사람 성격상 아이들은 보란 듯이 잘 키우겠지만 본인은 껍데기만 살아가겠구나. 내가 살아야겠구나.
“이런 모습 보니 당신이 제일 걱정돼, 애들이야 당신이 잘 키우겠지. 걱정 마, 죽을 병은 아닐 거니까”
내가 의외로 담담히 나오니 그제서야 안심이 된 듯해 보였다.
그날 폭풍 검색하여 뇌종양 관련 카페를 찾았고, 병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했다.
남편 회사에서 지원해 주는 의료 서비스와 각 병원 앱으로 최대 빠른 일자로 예약을 했다.
건강검진이 오진 일 수 있을까 한 가닥 희망을 품었고, 큰 병원 명의일지라도 똑같은 진단을 내리지 않을 거 같아 나에게 맞는 명의를 찾고자 3개 병원 이상을 다녀보기로 했다. 정말 운이 좋게도 가고자 했던 병원 중 3개 병원을 이틀에 걸쳐 예약할 수 있었다. 이렇게 1박 2일의 병원 투어를 시작했다.
남편과 아이들은 서로 어색한 사과를 했고, 아이들은 별스럽게 대청소를 시킨다는 농담을 해가며 일상을 되찾고, 남편도 할 수 있는 일에 몰두하며 안정을 찾으려 노력했다. 정말 아무렇지 않은 척 앞으로의 일에만 집중했다. 나도 최대한 담담하게 지냈다.
이른 새벽 KTX를 타고 도착한 병원은 명성답게 예약시간보다 1시간을 더 기다렸다. 이렇게나 아픈 사람들이 많나 보다. 긴장감에 서로 내색은 못하고 다른 이야기로만 시간을 채웠다. 드디어 점심도 거르신 교수님을 만났다.
가져간 MRI 조영촬영 CD를 보시고는 뇌 수막종의 뇌종양이라 양성일 확률이 높지만, 크기는 3cm 넘어 개두술을 해야 하고, 운동신경 쪽이라 수술 후 오른쪽 팔 마비가 올 수도 있으며, 수술하기는 어렵지 않다 하셨다. 수술시간은 대략 8시간 정도라고 하셨다.
지금도 머리가 아프다 하니
“그건 뇌종양과 상관없고, 병명을 알아서 신경 써서 아픈 거네” 라며 웃으셨다.
혹시나 더 오래 있다간 자세히 보니 어려운 수술이네 할까 봐 도망치듯 진료실을 나와 서로 마주 보고 웃었다.
“어렵지 않은 수술이래. 생명에는 지장이 없대”
건강검진 이후 정말 처음으로 웃어봤다. 긴장감이 어느 정도 풀리는 듯했다.
두 번째 병원도 역시 마찬가지로 인산인해였다.
친절하기로 유명하신 교수님은 아주 자세히 뇌 수막종 뇌종양에 대해 엄청 자세히 설명을 해주셨다. 첫 교수님과 거의 동일하게 진단과 수술 방법을 말씀하셨다.
서울에 친언니도 살았지만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상태라 세 번째 병원 근처에 숙소를 잡았다.
병원 코앞에서 잤지만 그 전날 너무 긴장해서 늦게까지 못 잔 탓에 밥도 못 먹고 빠듯하게 병원에 도착했다. CD 복사를 하려고 기다리는데 어느 간호사분이 내 이름을 외치고 다니셨다. 만나자마자 왜 이렇게 늦었냐며 화를 내고는 교수님이 응급 수술 있어서 들어가셔야 하고, 양성일 확률이 많으니 다른 교수님께 진료를 받으라는 거였다.
그렇게 뵙게 된 교수님은 좀 시큰둥했다. 뇌 수막종 같다고 수술하려면 날짜 잡고 가고, 아니면 6개월 더 지켜보라고 하셨다.
막연하게 두려움이 일어던 게 다 가신 건 아니지만 이제 내 병명은 확인됐고, 수술 가능하며, 쉽지도 않지만 어렵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 그나마 맘이 편안해졌다. 내가 살아야 할 명확한 이유가 있으니까 그 사실에 집중해 보기로 했다.
“나 첫 번째 교수님께 수술받을래. 그분이 젤 자신감 있어 보여. 믿고 맡길 수 있을 거 같아”
“그러자. 네가 편해야 수술도 잘 되는 거니까. 내가 병간호 확실하게 해줄게. 이참에 좀 쉰다고 생각해” 맞잡은 남편의 손은 참 따뜻했다.
나를 살리고, 우리 가족을 살릴 최고의 주치의를 정했다. 그걸 견뎌낼 용기 있는 나만 있으면 된다고 다짐하며 기차에 몸을 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