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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명 Aug 26. 2024

어느 사회 초년생의 이야기

입사부터 퇴사까지

필자는 올해로 스물넷, 인생이라는 길 위에서 방황하고 있는 대한민국 보통의 청년이다.

방황하던 순간들 속 사랑하는 것들도 많았고, 행복했던 순간들도, 동시에 슬프고 좌절했던 시간들 역시 가득했다. 오랫동안 다시 글쓰기가 어렵다는 것을 핑계로 펜을 놓았지만, 세상에 꺼내놓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다시 한번 펜을 들어보게 되었다.


고민 없이 행복하기만 한 사람이 어디 있으랴, 100인 100색, 100명의 사람이 있으면 100가지 이상의 고민이 있기 마련이다. 평소에 말도 생각도 많은 사람의 이야기, 누군가에게는 공감을, 누군가에게는 위로를, 혹은 누군가에게는 소소한 재미를 줄 수 있기를 바라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필자는 고등학교 2학년 재학 당시까지 우수한 성적을 유지하며 지망하던 대학에 진학하여 전공과목을 공부하고, 후에는 전공을 살려 일을 할 수 있으리라는 핑크빛 단 꿈을 꾸고 있었다.

모든 대한민국 수험생들과 같이 입시에 대한 스트레스는 당연히 있었으나 지망하는 대학과 학과에 갈 수 있으리라는 사실을 별달리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수술과 입원, 질병으로 인해 수능 응시조차 좌절된 이후, 막연하게 꿈꿔왔던 미래와는 송두리째 달라진 길을 마주하게 되었다.


수능 응시를 포기한 후 당장 성취감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일한 만큼 노동의 대가로 얻는 돈 뿐이었으므로 미친 듯이 알바를 해서 단 3년 동안 알바경력 10년 분량의 알바를 하는 기함을 토했고, 성인이 된 후에는 막무가내 독립을 해서 자취생활을 해보기도 했었다.


온실 속 화초처럼 자라왔다는 꼬리표가 싫어 온갖 알바를 다 해봤는데, 주방 알바부터 시작해서 콜센터, 학원 강사, 과외, 고깃집, 카페에 상하차까지 알바는 안 해 본 것이 없다고 자부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하루에 알바를 서너 개씩 하던 와중 대학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지망하던 대학과 학과와는 거리가 멀었으나 서울 소재 대학의 경영학과로 진학했고, 학교 생활 와중에도 생활비를 위해 알바는 지속적으로 하곤 했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대학 생활은 고등학교 당시 막연히 그리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과가 적성에 안 맞아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여 컴퓨터를 잘 다룬다는 알량한 자신감으로 당시 대세였던 컴퓨터 공학과로 전과하였으나, 여전히 내 인생은 내가 그리던 것과는 많이 다르게 흘러갔다.


그러던 와중, 운 좋게도 무역회사에 취직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겨 이전에 해보고 싶었던 일인 무역 쪽 일을 해보고자 자퇴를 감행했다. 고민하고 또 고민하여 결심하고 실행한 자퇴였으나, 사회 초년생의 삶 역시 녹록지는 않았다.


앞으로 풀어갈 이야기들이 많지만, 그 처음은 녹록지 많은 않았던 사회초년생의 이야기로 시작해볼까 한다.


대학 졸업도 전에 입사한 회사이니 사내에서 가장 막내의 나이인 것은 당연지사.

회사생활 경력은 없을뿐더러 사무직 일을 첫 경험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퇴 후 입사라는 길을 택한 것은 오롯이 나의 선택이었다.


공인 어학시험 점수가 좋은 편이었고, 이전에 아버지의 해외발령으로 인해 미국에 거주했던 경험이 있어 영어실력으로 입사를 하게 되었으나, 이력서를 작성하고 면접을 보는 과정은 쉽지만은 않았다. 취업준비, 통칭 취준 중인 대부분의 청년들이라면 공감하겠지만, 이력서를 작성하기 위한 스펙을 만드는 것도 쉽지 않지만 이력서를 작성하며 상당한 좌절을 맛보게 된다.


여태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하는 편임에도 막상 수치와 스펙만으로 판단되는 이력서에 적자니 손은 갈 곳을 잃었고, 빼곡하게 작성해야 하는 이력서의 칸들이 내 인생을 재단하는 것만 같았다. 우여곡절 끝에 소위 말하는 '자소설'을 완성하여 제출했고, 한국어로 보는 1차 면접과 영어로 본 2차 면접까지 어찌어찌 합격했다.

합격의 기쁨은 찰나, 입사한 곳은 무역회사였고, 그중에서도 수출입 업무를 담당했기에 다양한 국가의 사람들과 일했고, 빗발치는 거래처의 전화와 각종 서류업무, 스케줄 관리 등 회사에 다니는 동안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전부 처음 접하는 업무였고, 실무에서 사용하는 프로그램과 서류 양식 역시 학교에서 배우던 것들과는 매우 달랐기에 매일이 긴장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늘어가는 실력과 인정받는 기분, 통장에 매달 찍히는 월급은 찰나일지라도 행복감을 주었고, 이제 어엿한 직장인이라며 어깨를 추어올려주는 부모님과 친구들 앞에서 당당할 수 있어 직장생활이 그래도 적성에 맞는다고 생각했다.


필자가 근무했던 회사에서는 최우선 순위가 영어로 원활한 의사소통이 가능할 것이었기에 대부분의 업무가 영어로 이루어짐과 동시에 한국 거래처들과는 출고 일정 관리와 대금 계산 등 엑셀 업무가 주를 이루었다. 초반에는 사무 프로그램 사용에 나름 능숙한 편이었음에도 금액대가 커지니 엑셀 수식을 거는 일도 무서웠고, 메일 작성 역시 한참의 검토를 한 후에야 발송하곤 했다.


하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 아니겠는가, 어느 정도 일이 익숙해지자 업무 처리 시간도 엄청나게 단축되었고, 일이 없는 날은 신입답게 열정적인 모습을 보이고 싶어 괜히 엑셀 파일을 켜서 불꽃 타이핑을 하기도 하곤 했었다.


닥눈삼(닥치고 눈치껏 삼 개월)이라는 말처럼 삼 개월이 지날 즈음부터 매일 새벽 일어나 준비하고 출근해 업무를 처리하는 일상에 익숙해졌고, 사내에서는 운 좋게도 좋은 타 팀 상사분들과 동기를 만나 적응은 어렵지 않았으나, 역시 사회생활은 순조롭게만 흘러가지는 않는 것이었다.


필자는 계획을 세우는 것을 좋아하고 타의로 계획에 차질이 생기는 것을 매우 싫어하는데,(정확히는 상황이 내 통제하에 있지 않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하는 성향이 있다),초반까지 필자의 계획은 적어도 대리까지는 입사한 회사에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회사에 적응할 무렵 직속상사와 사사건건 트러블에 휩싸이게 된다.


필자의 첫 직장의 직속 상사는 퇴사한 지금까지도 치를 떨며 싫어하고 늘 술자리 안주가 될 정도로 필자가 살면서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다. 업무 스타일과 추구하는 방향성이 다른 것도 한몫했지만, 직속상사의 지나친 간섭과 업무 외의 지적, 피드백 없는 단순한 괴롭힘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견디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다양한 알바를 하면서 수많은 진상들을 만났고, 임금체불은 맞서 싸웠으며, 늘 의무를 다 하고 보장받아 마땅한 권리를 쟁취하는 데 한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러나 매일같이 얼굴 보고 이야기해야 하는 직속 상사와의 트러블은 시간이 지나갈수록 사람을 좀먹는 무엇이었다.


발송하는 거의 모든 이메일, 심지어는 신년인사까지도 지적할 뿐만 아니라, 이메일 작성 시에는 한 이메일을 다시 써오라며 네다섯 번을 되돌려 보내는 것이 일상이었다. 고쳐야 할 부분이 있어 가르쳐주는 상사였다면 그 가르침이 기꺼웠겠지만 처음과 문단 순서만 바꿔가도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에 결국은 같은 내용으로 발송하게 되는 이메일들에 지쳐가기 시작했고, 일할 의욕은 점점 사라지게 되었다.


매일 발송하는 이메일만 그랬으랴, 사내 양식으로 작성해 간 보고서는 양식이 맞지 않는다며 되돌려 보내고, 엑셀 수식을 사용하면 부정확하다며 수기로 표를 작성해 오라고 하거나, 필자가 야근해 가며 이뤄낸 성과를 본인의 공으로 돌려 보고하는 일 역시 빈도가 점점 잦아졌다.


거래처에서 담당자였던 필자의 칭찬을 하거나 필자를 찾는 일이 생기면 그날은 이유 없이 하루종일 혼이 나는 날이었고, 경쟁사에서 스카우트 요청이 왔을 때 거절했음에도 불구하고 스카우트가 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한동안 욕을 먹어야 했었다. 그 직속상사의 이야기를 하자면 지면이 부족할 정도로 정말 매일같이 교묘하게 괴롭히고 업무적으로 의미 없는 간섭과 옷차림에 대한 지적까지 이어지자 업무 의욕은 바닥을 쳤고, 자존감까지 떨어지게 되었다.


놀랍게도 필자의 직속상사 역시 해당 회사가 첫 회사로 근속연수는 7년 정도로 적지 않았으나 사내에서 사회생활 못 하기로 악명이 높은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에게 매번 사회생활은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는 훈수와 갖은 지적을 들으니 자존감은 바닥을 치고, 연차조차 승인을 해주지 않아 쉴 시간은 전혀 없어 밖에서 술자리를 가질 때마다 눈물바람하는 날이 늘어갔다.


얼굴빛이 점점 안 좋아지며 꾸역꾸역 회사를 다니던 와중 어느 순간부터 교통사고라도 나서 회사를 가지 않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게 되었고, 매일 출근과 퇴근을 울면서 하는 것이 익숙해지게 되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어디라도 아파서 회사를 안 갈 수 있길 바라고, 엉엉 울며 출근해서 일하고 퇴근하는 길에는 제발 사고라도 나서 내일 출근하지 않을 수 있기를, 내일이 오지 않기를 바라며 잠에 들곤 했었다.


여느 날과 동일하게 피드백 없는 지적을 듣던 와중 화장실에 갔다가 순간적으로 실신하게 되고, 실신한 날을 기점으로 퇴사를 마음먹게 되었다. 스트레스로 인해 순간적으로 쓰러져 같은 건물 사람에게 발견되어 구급차까지 불렀던 와중 예의상 할 법한 걱정의 말조차 하지 않고 다음날 출근 가능하냐고 묻는 직속상사를 보고, 더 이상 이 회사에서 버틸 수 없겠다는 확신이 들었고, 나를 버려야만 회사생활이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바로 사직 의사를 밝히게 된다.


당연하게도 퇴사 과정 역시 순조롭지 않았으나, 수많은 면담을 반복하고 모든 회유를 거절한 후에 결국 1년 3개월간의 회사생활의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그동안 수많은 알바와 회사생활로 모아둔 돈도 적지 않게 있었고, 필자의 주변인 중 퇴사를 만류하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을 정도로 마음고생이 심해 결국 갖은 신체적 질병까지 얻게 되어 퇴사를 감행했지만, 퇴사할 때까지도 필자는 자책이 심했었다.


이런 상사가 다른 회사에는 없으리라는 보장은 전혀 없고, 내 업무 능력이 탁월하다 해도 상사에 의해 묻힐 수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은 데다가 반복되는 직속상사의 가스라이팅으로 업무능력에 대한 확신 역시 떨어진 상태였기에 버티지 못한 나를 끊임없이 자책하고 고민했었다.


다만, 운 좋게도 나를 인정해 주고 응원해 주는 다른 팀 상사들과 동료들이 있었기에 업무능력에 대한 고민은 더 이상 하지 않기로 했고, 나를 다시 잃고 싶지는 않았기에 더 이상의 자책 없이 마침표를 찍은 필자 본인에게 칭찬을 해주는 것으로 마무리하기로 하였다.


쉽지 않은 취업 준비 과정에 뒤이어 사회생활 역시 그 누구에게도 수월하지 않음을 안다. 

다들 버티며 살아간다는 말은 가끔은 지나칠정도로 가혹하게 들린다고 생각하기에 만약 버티고 적응하고 있는 당신이라면 존경의 박수와 작은 응원을, 본인을 위해 그만두기를 결심한 사람이라면 심심한 위로와 함께 응원의 마음을 전한다.


각각의 힘듦이 모인 모두의 피곤을 나르는 퇴근길 지하철에 몸을 실은 모든 사람들에게 오늘 하루도 고생했다고, 당신의 내일이 더 나은 내일이기를 진심으로 바란다고 이야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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