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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명 Sep 04. 2024

사랑하기에,

사랑과 우울

끝없는 우울과 혐오에 빠질때가 있다. 


그 혐오는 나 자신을 향하기도, 타인을 향하기도 한다. 내가 싫어하는 인간상의 모습을 나 자신에게서 발견하거날, 누군가를 나의 잣대로 판단하는 내 모습을 보는 것이 필자의 자기 혐오의 근간이다. 뿐만 아니라 필자 본인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필자의 모습을 보는 순간 역시 자기 혐오의 일환이다. 

한때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원인을 돌릴 수 없어 가장 빠른 해결책이었던 자책을 하기도 했으며, 타인을 사랑했기에 화살을 타인에게 돌리기보다는 나 자신을 향하게 하는 것을 택했다. 


사랑에 상처받은 순간에는 타인을 질책하고 더 나아가 모든 인간군상을 혐오했으며, 동시에 두려워했다. 혐오는 필자에게 가장 쉬운 자기방어기제였으며, 두려움을 혐오로 포장하여 의연한 척을 하곤 했었다. 


시간이 지나며 무뎌지기도 하지만, 모든 감정의 근간이 되는 사랑이라는 감정에서 어찌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날 미치게 하고 우울에 빠뜨리는 것도 사랑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날 구원하는것 역시 사랑이다. 사랑은 대단히 모호하고 추상적인 감정이지만 되짚어 생각해보면 사랑하는 것들을 나열하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다. 


우울증에 이어 짝꿍처럼 따라오는 여타 질병들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이 아이러니하기 짝이 없는 사랑이라는 감정에 관한 이야기를 잠깐 하고 넘어갈까 한다. 


나는 꿈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의 빛나는 눈을 사랑하고, 친구와 실없는 소리를 하며 웃는 시간을 사랑한다. 엄마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를 사랑하고, 날 사랑하는 사람의 순수한 모습과 표정을, 사랑이 담긴 눈을 사랑한다. 시시껄렁한 농담따먹기 하는 순간을 사랑하고, 좋아하는 사람과 맛있는 음식을 먹는 순간을 사랑하며, 누워서 별보는 순간을, 바다를 보며 파도소리를 듣는 것을 사랑한다. 


겨울에 차가운 바람이 온몸을 감싸는 순간과 코끝이 빨개지도록 추운 날씨에 목도리에 얼굴을 파묻는 것을, 한여름에 아이스크림 하나를 입에 물고 매미 소리를 들으며 산책하는 순간을 사랑한다. 


또,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철없음을 사랑하고, 서로의 눈에 서로만이 오롯이 담기는 순간을 사랑한다. 길 가다 우연히 본 장소와 물건에서 내 생각이 났다며 연락해주는 친구의 애정이 기껍고 사랑스러우며, 내 취향이 범벅된 장소에서 조용히 이야기하는 순간을 사랑한다. 


누군가가 나만을 눈에 담고 나에 대해 이야기해주는 순간을 사랑하고, 추억과 애정이 담긴 손편지를 읽는 순간을 사랑한다. 내가 애정하는 사람을 온전하게 축하해 줄 수 있는 순간을, 뜬금없이 도심을 떠나는 낭만 가득한 순간들을 사랑한다. 


더 사소하게는 나는 지나가다가 우연히 붕어빵 트럭을 발견했을 때 신이 나고, 처음 가본 카페에서 먹어본 커피가 맛있었을 때 행복하다. 조용히 혼자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사색하는 순간을 사랑하고, 도서관에서 나는 책 냄새와 낡은 책에서 나는 종이 냄새를 사랑한다. 


지하철을 타고 지나가며 한강에 반짝이는 윤슬을 보는 것을 사랑하고 바다에서 파도가 하얗게 물결치는 순간을, 산에서 비가 온 후 나는 짙은 풀내음을 사랑한다. 겨울에 술을 걸치고 나와 입김을 내뿜는 순간을 사랑하고, 절에서 들리는 목탁소리를 사랑한다. 


차를 타고 가며 바람을 맞는 순간과 한적한 지하철 안에서 들리는 평온한 덜컹거림을, 재즈 음악을 들으며 한잔 기울일 수 있는 순간을 사랑한다. 바쁜 와중 나에게 기꺼이 내주는 친구와 연인의 시간을 공유하는 순간을 사랑하고, 믿을 수 있는 사람과 나누는 유대감과 안정감을 사랑한다. 


각자가 사랑하는 순간들은 각자의 기억 속 행복 그루터기가 되어 지치고 힘들때 떠올리며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준다. 사랑때문에 힘들다가도, 이런 사랑하는 순간들이 모여 가장 편하게 쉴 수 있는 행복 그루터기라는 공간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연인과의 이별에 상처받고, 친구와의 거리가 멀어짐이 슬프고, 물리적 거리가 멀어질 때의 애틋함 혹은 반려동물과의 이별은 크고 작은 상처를 남기고는 한다. 


사랑했던 연인과 이별할 때에는 연인과의 아름다운 추억이, 사랑할 때 너무나도 예뻤던 나의 모습이 아쉬워 울었고, 죽음 혹은 물리적 거리가 멀어지는 이별 앞에서는 속절없이 무너지고는 했었다. 

필자는 사랑하는 것들이 너무 많았기에 모든 사랑하는 것들을 손에 쥐고 있고 싶어했고, 잃었을 때에는 그만큼 빠르게 좌절과 절망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 추억의 크기가 클 수록, 그 기억이 아름답고 빛날수록 아픈 것 아닐까 한다.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필자가 크게 상처받고 크게 절망했던 이유는 그만큼 사랑했고 그만큼 행복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코피 흘려가며 지새운 밤들을 만족스러운 결과물로 보상받는 순간에 행복했고, 내 재능을 찾았다고 생각했을 때 기뻤고, 필자의 능력을 인정받는 모든 순간들을 짜릿하게 사랑했다. 


남들 앞에 빛날 수 있을 정도로 완벽하게 준비한 것을 펼치는 시간들을 사랑했기에 완벽하지 않은 것을 용납할 수 없었고, 나의 찬란한 부분이 사라진 것처럼 느껴졌을 때는 삶의 의미를 잃은 것만 같았다. 

존재의 가치가 상실되었다고 느꼈을 때 젠가의 마지막 블록을 뺀 것처럼, 사람은 정말 쉽게 무너진다. 필자 역시 아등바등 버티려고 쌓은 성이 무너졌다고 느낀 순간, 이전까지 버텼던 시간이 무의미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걷잡을 수 없이 빠르게 추락했다. 


슬프게도 우울에 잠식되면 내가 사랑하는 것들과 사랑했던 것들이 퇴색되어 더 이상 떠오르지도 않고 무감각해진다. 단언컨대 우울한 와중 가장 슬펐던 것 중 하나는 내가 이전과 달리 사소한 순간들에서 사랑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끊임없이 내가 사랑하던 순간들을 복기했고, 새로운 행복과 사랑을 찾으려고 부던히도 노력했다. 


우울에 허덕이던 당시에는 별 것 아닌 일에 깔깔대며 웃고 밝았던 모습은 없어진지 오래였고, 어느 순간부터는 행복 뿐만 아니라 다른 감정들에도 무감각해져 감정이라는 것이 느끼고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맞게 연기하는 것이 되어버렸었다. 


대략 사년이라는 시간을 필요할 때마다 적절한 감정을 텅 빈 눈으로 기계처럼 시연하거나 무표정한 얼굴로 보냈다. 그 시간동안 주변인도 많이 지쳤었을 것이고, 필자의 가족들 역시 텅 빈 껍데기만 돌아다니는 듯한 필자를 보고 많이 아파했었다. 여전히 함께하고 있는 지긋지긋한 우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어느 순간부터는 다시 행복을 찾으려고 노력했고, 그 행복을 처음으로 입 밖으로 냈던 순간은 아직도 기억나는 순간 중 하나이다. 필자가 행복하다는 말을 장장 사년만에 처음으로 웃으며 말했을 때 어머니는 아버지께 전화해 대화내용을 전하며 뛸 듯이 좋아하셨고, 간만에 생기가 도는 집안 분위기를 보며 꽤나 가슴이 시렸다. 사소할 정도의 말에 주변인들이 크게 반응할 정도로 오랜 기간동안 무감정했고, 주변인들 역시 나만큼이나 힘들었으리라는게 느껴져서 말이다. 


여전히 우울에 잠식되어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잊을때가 있고 행복 그루터기에 가는 길을 잊은 것 같을 때가 있지만, 그럴때마다 글을 쓰고 밖으로 나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나며 나에게 사랑과 행복을 상기시키고자 한다.

 

물론, 우울에 휩싸였을 때는 행복을 상기시키고자 노력하는것조차 너무나도 버거운 일이라는 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안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나지 않을지언정 분명 당신에게도 마음 깊은 곳 존재하는 행복 그루터기가 있을 것이라고 믿기에, 사랑하는 순간들이 다시 생기고 이전의 행복한 기억들을 상기할 수 있기를, 행복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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