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도 전문직이다_(5)
언젠가부터 새벽 세 네시쯤 깨는 습관이 생겼다. 갱년기 증세란다. 멜라토닌을 먹으면 그나마 좀 잘 수 있는데, 그래도 푹 자긴 어렵다. 잠이 들다 깨다, 작은 소리나 심지어 불빛에도 잠이 깬다.
그날도 늦게 겨우 잠들어 새벽에 눈이 떠졌다. 몇 시지. 침대 아래 휴대폰을 놓고 잔 게 생각나 왼쪽으로 고개를 휙 돌려 휴대폰을 잡는 찰나, 갑자기 세상이 뒤집어졌다. 전에 없던 경험이었다. 빈혈처럼 그냥 잠껀, 어질어질 한 정도가 아니라, 이건 완전히 하늘과 땅이 빙글빙글 뒤집히는, 지옥이 있다면 이런 곳일까 싶은 고통이었다.
어. 어. 비틀거리며 일어나 자연스럽게 약부터 찾았다. 무슨 약을 먹어야 하나. 얼마 전 두통으로 처방받은 약이 마침 있어 진통제를 털어 넣었다. 편두통은 오랜 지병이라, 손 닿는 곳 어디든 강한 진통제를 구비해 둔다. 그런데 이건 그간의 두통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약을 먹고 침대에 눕는데 다시 빙글. 순간 머릿속에 뇌출혈, 뇌졸중, 급사... 무서운 단어들이 떠올랐다.
"오빠, 일어나 봐. 나 좀 이상해."
자고 있는 남편을 깨웠다. 남편은 나를 잡고 거실 소파에 앉혔다.
"오빠, 이상해. 너무 어지러워. 나 곧 죽을 건가 봐."
남편은 공황장애 증세 같다면서 숨을 크게 쉬라고 했다. 그러나 극심한 어지럼증을 동반한 공포는 쉬 가라앉지 않았고 구역질과 심호흡을 계속한 끝에 결국 응급실을 찾았다.
결과는 이석증. 응급전문의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침대에 누워 머리를 이쪽저쪽 돌렸다. 미칠듯한 어지럼증에 악소리가 절로 나왔다. 신기하게도 이내 극심한 고통은 가라앉았고 집으로 돌아와 수면제를 먹고 잠을 청했다.
이석증은 겪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귓속 평형기관을 담당하는 작은 돌 중 일부가 빠져나오며 겪는 질환인데, 모든 병들이 으레 그렇듯 스트레스, 과로 등이 원인이고 그 밖에 갱년기 여성들이 발생빈도가 높다 한다. 예방을 위해서는 칼슘과 비타민D를 꾸준히 먹는 것이 좋다 해서 이후로 아침마다 잊지 않고 챙겨 먹는다.
뇌출혈 같은 중한 병이 아니라, 그나마 다행이지만 만일 또다시 그와 같은 고통을 겪게 된다면. 생각만 해도 두려움에 치가 떨린다.
남편은 말했다.
"청소이모님을 좀 써. 도움을 받는 게 좋아. 네가 모든 걸 다 하려고 하니까 자꾸 병이 나지."
남편은 오래전부터 청소이모님을 쓰는 것을 권유해 왔다. 영유아포함 다섯 식구의 빨래와 청소, 정리, 요리 등은 제법 많은 에너지가 드는 일이지만, 나는 대부분의 주부들이 그렇듯 혼자 힘으로 해 내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진다. 물론 도움을 받으면 수고야 덜겠지만 직접 하는 편이 더 성에 차기도 하거니와 남과 한 집에 있는 것이 불편한 성정도 큰 이유 중 하나다.
이석증 이후 일주일 정도, 어지러움 증세와 정신적 충격(?)을 치료하는 동안 아이들은 배달음식으로 매 끼니를 때웠고 쌓여가는 재활용 용기들로 집안꼴은 피폐해져 갔다.
대부분의 근로자들이 그러하듯, 엄마도 병가가 필요하다. 집안 구성원들과 단 며칠이라도 떨어져 독립된 공간에서 푹 쉬고 잘 수 있는 그런 병가 말이다. 전문직 엄마가 되려면, 그에 맞는 복지도 따라주었으면 좋겠다는 계면쩍은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