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첫 번째 비밀스런 방콕 산책은 짜런끄룽 로드(Charoenkrung Road)에서 시작한다. 짜오프라야강 줄기를 따라 길게 쭈욱 뻗어있는 짜런끄룽 로드는 방콕의 차이나타운부터 남서쪽 방코램 지역까지 8.6km를 잇는 도로다. 그중 오늘 우리가 산책할 곳은 BTS 싸판딱씬 역의 북쪽, 약 1km 정도 되는 구간이다.
오늘의 산책 루트. 그리 많이 걷지 않으니 겁먹지 않아도 된다.
서울이 익숙한 여행자들을 위해 한 마디로 이곳을 정의하자면, 흡사 서울의 힙지로 바이브를 내뿜는 곳이라고 하겠다. 방콕 근대화시기의 역사를 담고 있는 건축물, 오랜 세월 같은 자리에서 전통을 보전해 온 장인들, 그리고 미래를 바라보는 젊은 예술가들의 에너지가 함께 숨 쉬는 곳이다. 또 골목 사이사이 독창적이고 감각적인 공간들이 촘촘히 숨어있어 갈 때마다 보석 같은 장소들을 새로이 발견하는 짜릿함도 있다.
무심코 지나갈법한 길목에서 고개를 한쪽으로 돌리면 이런 비밀스런 공간이 숨어있다. 카페, 바, 소품샵 등이 자리 잡고 있는 43번 길. 바쁘게 걷다가는 그냥 놓치고 만다.
특히 최근 몇 년 사이 젊은 예술인들이 이곳에 커뮤니티를 형성하며 침체되어 있던 지역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는 점이 을지로와 닮아있다. 지난 2017년 TCDC (태국 크리에이티브 디자인 센터) 본부가 짜런끄룽에 자리 잡은 뒤로 지역장인들과 청년 예술가들의 상생 발전을 도모하는 다양한 프로젝트가 탄생했다. 이와 더불어 트렌디한 아트갤러리, 레스토랑, 카페, 바, 라이프스타일샵 등이 꾸준히 생겨나고있을 뿐만 아니라국제예술행사, 전시회, 축제까지 다수 개최하며 방콕의 새로운 예술 중심지로서 입지를 굳히고 있다.
세월이 느껴지는 건물들 사이사이로 벽화가 눈에 띈다. 습관대로 서두르던 발걸음을 조금 늦춰볼 또 하나의 이유다.
한 가지 힙지로와 다른 점이라면 짜런끄룽 로드는 태생이 국제거리였다는 사실이다. 짜오프라야 강과 인접한 위치 덕에 세계 각지에서 드나드는 상인들과 유럽 국가 대사관들이 이 근처에 일찌감치 터를 잡았다. 때문에 짜런끄룽 로드는 1860년대 건설 당시 방콕에 지어진 최초의 아스팔트 도로였고, 방콕의 근대화시기에 교통과 무역을 원활하게 돕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런 글로벌한 배경을 바탕으로 지금까지도 서로 다른 문화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 짜런끄룽이 가진 또 하나의 커다란 매력이다. 약 300m 반경 내에 가톨릭 성당, 불교 사원, 이슬람 사원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는 흔치 않은 광경을 볼 수 있는 데다한 끼를 먹더라도 타이, 중식, 무슬림 길거리 음식, 프렌치, 인디언까지 그옵션이 무궁무진하니 말이다.
오늘 우리의 산책 콘셉트는 '방콕의 역사, 예술, 글로벌한 문화를 즐기는 힙한 여행자'다. 예스러운 저층 건물들로 이어진 고즈넉한 거리를 따라 걸으며 여러 문화의 영향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건축물들을 구경하고, 감각적인 소품샵에서 독특한 기념품도 고르고, 아트카페에 앉아 직접 페인팅 체험도 해볼 거다. 물론 중간중간 커피도 한 잔 하고, 맛있는 식사와 디저트도 빼놓지 않을 예정이다. 그렇게 오늘의 산책이 끝나고 나면 "나 방콕에서 제일 힙한 동네의 길을 다 꿰고 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거다.
아침부터 오후까지 찬찬히 걸으며 둘러보기 좋은 짜런끄룽 로드 산책스폿들을 딱 열 군데로 추려보았다. 미처 이 글에서 다 소개하지 못한 장소들까지 포함해 전부 아래 구글맵 리스트에 넣어두었으니, 저장해 두었다가 여행 때 참고하면 된다.
오전 9시. 여기에서 우리의 하루를 시작한다. 이전에 빵순아 방콕 가자 글에서도 소개한 적이 있는 호주식 브런치 카페다. 태국식 요소가 가미된 브런치 메뉴와 직접 로스팅하는 원두로 내리는 커피가 유명하다. 방콕에 총 네 개 지점을 운영하고 있는데, 이 지점은 이름에 '사워도우'가 들어간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매장에서 매일 직접 구워내는 따끈한 사워도우 빵을 다른 지점들로 공급한다. 빵순이 피셜, 여기가 방콕 사워도우 1등 맛집이다. 쫄깃한 사워도우나 바삭한 크로아상에 향긋한 커피 한 잔 넘기며, 본격적인 산책 시작 전 여유를 부려보자.
카페인과 탄수화물로 에너지 충전도 했겠다, 이제 진짜 산책을 시작할 시간이다. 우리의 첫 번째 목적지는 사니즈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에 위치한 어섬션 성당.
일요일 오전 미사에 참석하는 신자들의 차로 붐비는 성당 앞
2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어섬션 성당은 태국의 주요 로마 가톨릭 교회로 두 차례 교황 태국 방문을 주최하기도 했다. 1821년에 프랑스 출신 선교사와 건축가의 합작으로 완공되었고, 현재 성당은 1909년에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재건된 모습이다.
1909년 재건 이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상당 부분 파괴되어 복원을 거치기도 했다.
매주 일요일 아침 10시에 영어로 미사가 진행되니 태국어를 모르는 이들도 참례할 수 있다. 성당 내부는 촬영을 금하고 있어 사진에 담지 못했지만, 정말 입이 떡 벌어지게 아름답다. 건축물에 관심이 있다면 미사에 참여하지 않더라도 꼭 들러보기를 추천한다. 만약 미사에 참여할 예정이라면 옷차림에 주의를 기울일 것. 민소매나 반바지 등 노출이 있는 복장은 삼가야 한다.
불교신자나 다른 크리스천 교파 신자들이 미사에 참례한다면 영성체는 하지 않는 것이 옳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앞으로 나오셔서 축복을 받고 가시라는 따뜻한 메시지가 주보에 담겨있었다.
성당에서 영혼의 위로를 받았다면, 이제부터는 자본주의 치유를 받으러 갈 차례다. 그 첫 번째 행선지는 센트럴: 디 오리지널 스토어.
방콕에 이미 다녀간 적이 있는 여행자들이라면 태국의 쇼핑몰 문화가 엄청나게 발달해 있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한국과 비교해도, 또 동남아 주변국들과 비교해도 태국의 쇼핑몰 문화는 단연 한 수 위라고 할 수 있다. 그런 태국 쇼핑몰 계는 두 양대산맥이 꽉 쥐고 있는데, 바로 더 몰 그룹(The Mall - 아이콘시얌, 시얌 파라곤, 엠콰티어, 엠포리움 등을 소유)과 센트럴 그룹(Central - 센트럴월드, 센트럴 백화점, 로빈슨 등을 소유)이다. 특히 센트럴 그룹 계열의 쇼핑몰들은 태국에 전국적으로 퍼져있다. 지방 소도시를 여행하다가 '이런 작은 도시에 이렇게 큰 쇼핑몰이 있다고?' 하는 의문이 들면 대부분 센트럴 계열의 몰일 정도다. 그렇다면 센트럴 그룹은 대체 언제부터 어디에서 시작해서 지금 이렇게 몸집이 커졌을까? 궁금할만하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는 공간이 바로 여기, 센트럴: 디 오리지널 스토어다.
센트럴 디 오리지널 스토어의 갤러리같은 내부
한 때 이 건물 3층 전시 공간에 센트럴 그룹의 창립 역사를 연대기처럼 볼 수 있는 상설전시가 열리기도 했었다. 그 내용을 짧게 요악하자면 이렇다. 센트럴 창립자는 1927년에 중국 하이난에서 아내와 2살짜리 아들을 데리고 태국으로 이주해 왔다.원래는 15평 남짓한 공간에 잡화점을 차려 운영하다가 1950년 성인이 된 아들과 함께 센트럴 무역회사를 출범했는데, 그 첫 번째 가게가 바로 여기, 짜런끄룽 로드 1266번지였다고 한다. 지금은 전국적으로 휘황찬란한 쇼핑몰을 수십 개 두고 있는 그 센트럴 그룹의 초심이 그대로 깃들어있는 역사적인 자리인 것이다.
1950년 문을 연 센트럴의 첫 번째 가게가 있던 자리. 지금은 카페, 바, 도서관, 전시공간이 있는 복합 공간으로 운영 중이다.
1층은 카페 및 소품샵, 2층은 소매업 관련 비즈니스 서적의 열람과 구매가 모두 가능한 도서관, 3층은 전시공간, 4층은 레스토랑이다. 짜런끄룽 로드를 따라 걷다가 좀 덥고 지친다 싶을 때 잠시 들러 구경하면서 카페인과 함께 감성도 충전하고, 열도 한 김 식히고 가기에 완벽한 곳에 위치하고 있다.
4. TCDC / 태국 크리에이티브 디자인 센터 (Thailand Creative & Design Center)
또 하나의 역사가 담긴 건물이다. 그냥 지나가다가도 '대체 저건 무슨 건물인데 저렇게 크고 장엄하게 생겼지?' 하고 관심이 생기는 외관을 하고 있다. 신고전주의(neo-classic) 건축양식으로 1940년도에 지어졌다. 원래는 영국 대사관의 자리였다가 1940년에 태국의 중앙 우체국이 들어섰다. 비교적 최근인 2017년에는 TCDC (태국 크리에이티브 디자인 센터) 본부가 여기로 둥지를 옮겨왔고, 이와 동시에 짜런끄룽 로드의 예술문화지구로서의 탈바꿈이 시작되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만약 디자인 분야에 관심이 있고, 여행 중 하루 정도 랩탑을 들고 나와서 몇 시간 일할 곳을 찾는다면 일일 이용권을 구매해 방문하는 것도 좋겠다. 그렇지 않다면 굳이 건물 안으로 들어갈 필요 없이 외관 정도만 구경하고 지나가는 것으로 충분하다.
지나가다 보면 그 규모 하나만으로도 궁금증을 자아내는 외관이다.
무료 방문객들은 앞쪽 건물만 이용할 수 있다. 1층 갤러리, 5층 카페, 그리고 루프탑 가든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반면 유료 이용자들은 뒷 건물까지 전부 자유롭게 쓸 수 있다. 디자인 서적, 저널, 잡지 등을 읽을 수 있는 라이브러리와 멀티미디어룸이 여기에 포함이다. 일일 이용권은 100밧(약 3,700원), 연간 멤버십은 1,200밧(약 44,400원)으로 일반 공유오피스 이용료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저렴한 가격이다. 내가 이 근처에 살았다면 아마 연간이용권을 구입해 뻔질나게 드나들었을 거다.
띠리링. 짜런끄룽 로드 자본주의 테라피 종착역에 도착하셨습니다. 웨어하우스 30는 레스토랑, 카페, 스파(Erb spa), 갤러리, 편집샵 등이 한 데 모여있는 공간이다. '아트, 라이프스타일, 크리에이티브 공간'이라 정의하고 있는데, 다르게 말하자면 '구경하고 먹고 마시고 쉬고 돈 쓰고 가는 곳'이 되겠다.
웨어하우스 30 외관
참고로 이 창고도 그냥창고가 아니다. 본래 1920년대에 지어져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군용 창고로, 이후에는 광물 및 원자재, 농업장비 보관 등 다양한 용도로 쓰인 역사가 있다. 이를 허물고 새로운 건물을 올리는 대신, 도시의 역사를 보존하는 동시에 새로운 용도로 바꾸는 길을 택하며 웨어하우스 30가 탄생했다.
기다란 창고를 한쪽 끝에서 반대쪽 끝까지 찬찬히 훑어보면서 마음이 끌리는 갤러리나 소품샵에 들러볼 수 있다. 이 중에서도 제일 구석에 있는 30-6 편집샵을 추천한다. '코끼리 바지'나 '야돔스틱'이 대표하는 방콕여행 기념품과는 사뭇 다른, 요즘 방콕 젊은이들의 감성이 담겨 있으면서 어딘가 삐뚤어진 내 취향과도 닿아있는, 그런 옷과 소품들을 기념품으로 건져볼 수 있다.
웨어하우스 30 바로 앞에도 갤러리가 여럿 자리하고있다.
웨어하우스 30 단지 내에도 물론 갤러리가 여럿이다.
창고 끄트머리엔 카페가 하나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그 카페 안쪽에 30-6 편집샵이 숨어있다.
귀여운 액세서리들과
잡동사니들(향초, 디퓨저, 로션, 키친웨어)을 구경하다 보면 시간이 순삭 되는 마법을 경험할 수 있다.
잠시 정신을 차려보자. 우리는 지금 오전 내내 커피 한 잔에 빵 한 조각을 먹고 짜런끄룽 로드를 따라 걸으며 역사와 예술을 감상했다. 이제 슬슬 배가 고파질 때가 된 것이다. 중간에 따로 간식을 챙겨 먹지 않은 이유가 다 있다. 바로 이 식당에서 메뉴에 있는 음식을 전부 다 시켜 먹어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믿기지 않겠지만, 둘이서 먹은 양이다. 셋이 갔을 땐 이 두 배쯤 되는 양도 거뜬히 먹었다. 그 정도로 맛있다.
오래된 샵하우스 느낌이 나는 와통 포차나의 1층 외관
칭다오 출신의 사장님이 운영하는 식당이다. 강단 있어 보이는 예술가 같은 분위기를 짙게 풍기는 그녀를 보면 왠지 음식도 허투루 만들지 않을 것 같다. 그리고 그런 내 촉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주문하는 족족 너어무 맛있어 눈이 돌아가는 메뉴들이 증명해 주었다. 그러니 망설이지 말고 다양한 사이드 요리를 궁금한 대로 다 시켜보는 것을 추천한다. 배가 불러도 싹싹 긁어먹게 될 테니. 참고로 가게에서 직접 만드는 두부가 정말로 맛있다.
매콤한 다진 고기와 두부 요리. 이건 무조건 시켜야 한다. 미친 맛이다. 이거에 밥 두 그릇 뚝딱 가능.
열면 "여기 있는 거 하나씩 다 주세요" 소리가 나오는 메뉴판
방콕 산책 시리즈에서 가장 처음으로 소개하는 식당이 태국식당도, 심지어 몇 대째 내려오는 태국식 중식당도 아닌 일반 중식당인 것이 의아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바로 이게 위에서 말한 짜런끄룽의, 그리고 방콕이라는 도시의 매력이다. 여러 문화가 만나고 섞여 더 멋진 것들을 탄생시킨 덕분에 우리의 산책이 보다 더 다채롭고 풍요로워진다.
개인적으로 당면보다 일반 소면이 더 내 취향. 하지만 현명한 쩝쩝박사들이라면 둘 다 먹어보고 판단하겠지.
말해 뭐 해, 만두도 맛있다. 매운 만두 메뉴가 따로 있는데, 차라리 기본을 시켜서 고추기름에 찍어먹는 것을 추천한다.
독특한 식감의 순무 튀김. 겉은 바삭 속은 쫀득한 식감의 조화가 아름답다. 같은 메뉴로 찜 버전도 있는데, 튀김을 추천한다.
이 집의 유일한 디저트. 단팥을 좋아한다면 무조건 시켜 먹어볼 것!
이 디저트는 영어로는 그라스젤리(grass jelly)라고 불리는 선초잎과 녹말로 만드는 젤리다. 중국 및 동남아 대부분 나라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디저트다. 한방 약재 비스무리한 향이 나는 것이 전혀 내 취향이 아니라 내 돈 주고 사 먹는 일이 없는 디저트인데, 와통 포차나의 grass jelly만큼은 예외다. 그런 향이 전혀 없고 식감도 너무 탱글 하지 않고 보들보들한 것이 아주 마음에 든다. 무엇보다 저 위에 올라간 부드럽고 달콤한 홈메이드 단팥과의 조합이 최고다. 한 그릇 50밧(약 1,900원).
1층은 에어컨이 없는 개방형 공간이라 대낮에는 조금 더울 수 있다. 2층에 에어컨이 있는 공간이 있으니 자리가 있는지 물어볼 것.
와통 포차나에서 딱 2분 거리에 있는 80년 된 아이스크림 가게. 겨우 2분 거리라니, 아무리 배가 불러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코스다.
지금 가게를 지키시는 우싸니(Ousanee) 할머니가 부모님과 조부모님으로부터 가게를 이어받으셨다고 하니 자그마치 3대째 내려져오는옛날 아이스크림 가게다. 2022년에는 메이드 인 짜런끄룽(Made in Charoenkrung) 프로젝트를 통해 청년 예술가들의 도움을 받아 젊은 층에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가게 외관과 메뉴를 새로 디자인하기도 했다.
홍후앗 코코넛 아이스크림 가게 외관
커피아이스크림은 더위사냥 믹스커피 맛에 부드러운 식감. 코코넛 아이스크림은 약간 서걱거리는 식감이었다.
아이스크림을 담아주시는 우싸니 할머니의 손
한국 디저트에 비유하자면 옛날빙수 느낌이려나 싶다. 요즘 것들의 입맛에 엄청나게 새롭지 않을 수는 있지만, 내가 겪어본 적도 없는 시절의 향수를 자극하는 어떤 세대를 관통하는 식문화. 그래서 더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고 계속 그 자리에 있었으면 좋겠는 그런 가게 말이다. 때문에 한 번은 꼭 경험해 볼 가치가 있다.
나에게는 할머니 할아버지 부부의 환한 웃음과 인자한 성품으로도 기억되는 가게다. 처음 방문했을 때 어색하게 이리저리 둘러보며 아이스크림을 먹는 나에게 할머니께서 "우리 집 아이스크림을 먹었으니, 이제 우린 친구야."라는 말씀을 하셨다. 시원하게 아이스크림 한 접시 먹으러 들어갔다가, 별안간 마음이 촉촉하고 따땃하게 데워져서 나오고 말았다.
디저트로 아이스크림까지 야무지게 먹었으니 이제 다시 걸어 다니며 소화를 시켜보자. 홍후앗 코코넛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동쪽으로 딱 200m만 걸으면 이렇게 가정집처럼 생긴 박물관이 나온다. 오래된 것을소중히 여기고 간직하려는 노력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또 하나의 공간이다.
방콕인 박물관의 외관
방콕스럽게 푸르고 평온한 정원의 풍경이 우리를 맞이한다.
각각 1929년과 1937년에 지어진 방콕의 중산층 가정집 두 채를 박물관으로 탈바꿈해 놓았다. 이 집의 마지막 주인은 3대째 집을 물려받아 이곳에서 평생을 살다 2017년 생을 마감하신 와라폰 교수님. 그즈음 시세가 약 1억 밧(약 37억 원)까지 치솟은 이 집을 그녀가 2004년 일찌감치 방콕광역시청(Bangkok Metropolitan Administration)에 기증하며 시민들에게 이 보물창고 같은 공간을 개방했다.
그녀는 집을 기증한 뒤에도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박물관을 지키며 시민들에게 오래되고 평범한 것들의 가치를 알렸다. 지금과 달리 뭐든 한 번 사면 쉽게 버리는 일이 없이 고치고 또 고쳐가며 소중히 아껴 쓰던 시절, 그녀의 어머니가 첫 월급으로 마련한 화장대와 어려서부터 쓰던 침대 같은 가구부터 반짇고리, 머리빗, 필기구, 손때 묻은 장난감,달력까지. 한 가족의 평범한 삶이 깃든 물건들이 마치 어제까지도 누가 이 집에 살았던 것처럼 생생하게 전시되어 있다.
방콕인 박물관에서 도보로 약 12분 거리, 오늘 산책 코스 중 가장 최북단에 위치해 있다. 하루 종일 짜런끄룽 로드를 걸으며 받은 영감을 빵! 하고 터뜨리듯 표현할 수 있는 곳. 물감으로 캔버스와 석고상에 페인팅을 할 수 있는 아트카페다. 독특한 점이라면 캔버스라고 내어주는 건 조각케이크고, 비너스 석고상은 초콜릿이라는 것. 열심히 색칠한 작품을 꼭꼭 씹어먹어 소화시키는 것으로 나만의 작품이 완성되는, 그런 비틀린 재미가 있다.
시그니처 조각케이크 캔버스와 화이트 초콜릿 석고상. 브러쉬와 식용 색소가 들어간 크림이 함께 나온다.
조각케이크는 시그니처와 초콜릿, 석고상은 화이트와 다크초콜릿 중에 고를 수 있다.
예약 없이 오픈 시간 중 언제든지 방문할 수 있다는 점이 큰 장점이다. 방콕 여행 중 아트 워크숍이나 원데이 클래스에 참여하는 건 시간이나 비용 면에서 번거로워 망설여지지만, 짧게 한두 시간 손을 꼼지락거리며 집중하고 마음을 비울 수 있는 가벼운 액티비티를 찾는다면, 그야말로 완벽한 선택지다. 자세한 글은 지난번 여기에 올려두었다: 내 마음대로 칠하고 먹는 케이크
저녁식사만큼은 각자의 취향과 당일의 식욕에 맡기겠다. 양식이 당기면 앙드레(André)에서 프렌치 요리를, 태국식 퓨전 음식이 궁금하다면 능러이 마하셋(100 Mahaseth) 또는 쌈러 (Sam Lor), 찐 태국음식이 당긴다면 하모니크(Harmonique)를 추천한다. 해가 진 뒤 칵테일을 한 잔 하며 하루를 마무리하고 싶다면 2023년 Asia's 50 best bars 리스트에서 6위를 차지한 트로픽 바(Tropic Bar)에 들러보기를.
이 중에는 오후 늦게 문을 여는 곳도 있고, 휴무일과 브레이크 타임이 모두 제각각이니 꼭 영업시간을 구글맵에서 확인하고 방문하는 것을 추천한다.